2020년 2월호

명사에세이

責子 ; 자식을 꾸짖다

  •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장

    cogito75@kic.re.kr

    입력2020-02-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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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말,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과일과 반찬거리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고구마를 구워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오시는 날 추위에 고생하실 것 같아 따뜻하고 편안하시도록 집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보일러와 형광등을 켜두고 출근했다. 

    아이들이 마치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크더라고 친구들이 말하던데, 아이는 아직 키워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부모님이 늙는 속도야말로 순식간이다. 안 보는 사이 부모님은 부쩍 늙으셨고 야위셨다. 안쓰러움을 느낄 새도 잠시, 퇴근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수십 년간 반복된 꾸지람이 들려온다. 

    왜 너는 맨날 인스턴트 음식만 먹니(맨날은 아니에요), 밤에는 음식 먹지 마라(예전보다 덜 먹어요), 저렇게 음식물 쌓아두고 밖에서 사 먹으면 낭비다(두 분 드시라고 꺼내놓은 건데), 다 본 책은 버리든지 정리를 하렴(아직 안 봤어요), 보지 않을 책은 그만 사고(나중에 다 볼 거예요), 걸으면 먼지가 푹푹 올라오겠다(어제 청소한 거예요), 이런 데서 잠이 오니(머리만 대면 잠들어요), 화장실 청소는 하는 거니(어제도 했다고요), 또 불 끄고 가는 것을 잊었구나(밝아 보이게 하려고요), 사람도 없는데 보일러를 켜두다니 정신이 있는 거니(추울까 봐 일부러 켜둔 거예요). 

    나 나름 청소도 하고 정리도 했는데 티가 안 나서 그런가. 어쨌거나 부모님과 마주하고 어리광을 부리니 사람 사는 것 같다.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니 어느덧 어린 시절의 철부지가 된 것도 같다. 대화의 주제가 점차 바뀐다. 대화가 더 구조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살은 언제 뺄래(나름 빠진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을 못하지(왜 ‘그러니까’죠?), 결혼은 언제 할래(때 되면 할 거예요), 네 나이 때 나는 애가 셋이었다(그건 결혼 안 해도 할 수 있어요), 아직도 TV 켜놓고 공부하는 버릇은 못 고쳤구나(외로워서 그래요), 음악 들으면 글이 머리에 들어가니(다 들어가요), 그렇게 늦게 자니까 낮에 피곤하지(일이 많아서 그래요), 걸을 때 쿵쿵 딛는 버릇 좀 고치렴(이 덩치에 사뿐사뿐 걸으면 더 이상해요), 저축은 얼마나 했니(…). 



    모자란 아들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폭된다. 봇물 터지듯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부모님의 잔소리는 스무고개와 같은 수수께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얼마 전, 내가 방송에 나가 인터뷰한 모습을 보시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신다.

    자식 된 도리

    어머니: 네가 저렇게 자기 관리 안 하고 못생겼으니까…. 그걸, 못하는 거야.
    아버지: 결혼?
    어머니: 그거 말고.
    아버지: 아이 낳기?
    나: 그건 결혼 안 해도 자신 있어요.
    모두: (침묵)
    아버지: 성공?
    어머니: 그것도 못 했지만!
    아버지: 출세?
    어머니: 그것 말고 또!
    아버지: 부자?
    어머니: 또 다른 거!
    아버지: 내 집 마련?
    어머니: 더 한심한 거! 

    끝내 어머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으셨고, 아버지는 즐거워하시며 내가 이루지 못한 몇 가지를 계속 끄집어내셨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뻔뻔해져서인지, 예전 같으면 울컥했을 법한 핀잔에도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심지어 마음이 편안해지고 슬며시 웃음조차 나온다. 막상 내가 매사에 정확하고 행실이 바르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자기 관리도 잘하고,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때는 TV나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면, 크게 성공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셋이나 낳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면. 게다가 걸을 때 사뿐사뿐 걸으면서 저축도 상당히 해두었더라면…. 

    아마도 부모님은 무척 심심하지 않으셨을까. 부모와 자식 간 대화가 단절되지는 않았을까. 나무랄 데 없는 자식이라는 존재는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부모님의 눈에 한없이 어리석게 보여야 모름지기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말이다.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연명(陶淵明)도 자식을 책망하는 시, ‘책자(責子)’를 남겼다. 그의 시를 읽어보자.

    아버지의 술

    白髮被兩鬢 肌膚不復實
    (백발은 양쪽 귀밑을 덮고, 피부의 탄력도 예전같지 않아) 

    雖有五男兒 總不好紙筆
    (비록 내게 아들이 다섯이나 있지만, 모두 글공부를 좋아하지 않네) 

    阿舒已二八 懶惰故無匹
    (舒라는 녀석은 벌써 열여섯이 되었건만, 게으름은 애초에 따를 자가 없을 지경이고) 

    阿宣行志學 而不愛文術
    (宣이라는 녀석은 열다섯이 다 돼가는데, 학문을 싫어하네) 

    雍端年十三 不識六與七
    (雍과 端는 나이가 열세 살이지만, 6과 7을 구별하지 못하고) 

    通子垂九齡 但覓梨與栗
    (通 녀석은 아홉 살이 다 돼가는데도, 그저 배와 밤만 찾는구나) 

    天運苟如此 且進杯中物
    (하늘의 뜻이 정녕 이러하다면, 거푸 술잔 속을 비울 수밖에) 

    지금 도연명의 시를 읽어보니 자식인 내가 보기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다섯이나 되는 아들이 죄다 게으르고 공부에는 뜻이 없고, 다소 덜떨어졌으며, 그저 식탐만 있다면 어느 아버지가 속이 편하겠는가. 

    물론 아버지가 바라본 다섯 아들의 모습이 전적으로 이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 눈에 자식들은 늘 어리석게 보이고 부족해 보일 테니까. 짐작건대 게으른 舒(서)는 대신 민첩했을 것 같고, 宣(선)은 공부는 싫어해도 음악을 잘했을 수 있지 않겠는가. 雍(옹)과 端(단)도 숫자에는 약해도 감수성이 풍부했을 것 같고, 아직 어린 通(통)도 성숙한 어른이 됐을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시인의 아들들처럼 모자란 자식은 아니지 않으냐고 생각하다가도 곰곰 따져보면 늦게 잠들고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니 게으르기 짝이 없고, 사물의 이치를 구별하지 못하며, 늘 배고파하니 식탐이 줄지 않았다. 심지어 학문을 직업으로 택했음에도 글공부를 싫어하고 지겨워한다. 옛사람들의 탄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아버지가 홀로 막걸리 한 병을 비우셨다. 아차!


    김대근
    ● 1975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법학박사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 실장
    ● 역서 : ‘차별이란 무엇인가’ ‘롤스의 정치철학사 강의’(근간) ‘정의론’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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