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호

할머니의 조각보, 세계적 문화재 되다! [명작의 비밀]

몬드리안에 비견되는 한국형 추상…10개국서 40여 차례 전시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1-10-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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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동화·박영숙 부부가 수집한 조각보. [동아DB]

    허동화·박영숙 부부가 수집한 조각보. [동아DB]

    요즘 여기저기서 조각보를 만나게 된다.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 전시는 물론이고 조각보의 독특한 디자인을 활용한 문화상품도 많다. 우산, 커튼, 쿠션, 방석, 소파, 의복, 컵, 책표지 등등. 조선시대 조각보 자체를 선보이는 전시도 있지만 여러 문화상품은 조각보 디자인 구성을 모티프로 삼은 것이다. 많은 미술가는 조각보를 변주해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그야말로 조각보 인기 만점이다.

    조각보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기하학적 공간 구성, 세련된 색채, 경쾌한 비례미와 절제미…. 조선시대에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지만 현대미술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던한 미감을 지니고 있다.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단순성, 꾸밈없음과 자연스러움, 일상과 미술의 만남 등을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인만 조각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조각보에 매료되는 외국인도 많다. 2020년 1월 영국의 리버풀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의 국립박물관 연합체를 둘러보고 박물관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때 선물로 조각보와 부채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부채보다 조각보가 더 반응이 좋았다. 조각보의 모던한 디자인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들은 “테이블을 장식하거나 벽에 걸어놓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이것은 원래 평범한 조선시대 여성들이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자 더 큰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일상용품에서 미술로…조각보의 변신

    조선시대에 주로 만들어진 조각보는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옷감을 이어 붙여 만든 보자기다.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운반하는 데 사용했고 또는 밥상을 덮어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예절과 격식을 갖추기 위한 의례용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조각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용품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조각보를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미술품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 조각보 자체보다는 조각보를 구성하는 디자인이 인기가 높다. 조각보 실물이든 조각보 디자인이든, 일상용품에서 미술품으로 대변신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조각보를 만들어 사용한 조선시대 여성들은 수백 년 뒤 후손들이 조각보를 감상의 대상으로 또는 한국적 미감을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조각보는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적 미감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허동화·박영숙 부부가 발견한 조각보의 미학

    조각보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미술품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데에는 문화재 수집가인 허동화(許東華·2018년 타계) 박영숙(朴永淑·89) 부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편 허동화는 전문적인 수집가였고, 부인 박영숙은 치과의사 겸 수집가다. 문화재 수집은 남편이 먼저 시작했다. 허동화는 1960년대부터 문화재를 수집했다. 허동화는 사실 처음에는 돈을 별 요량으로 도자기를 하나둘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화재 수집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10년도 가지 못했다. 전통 자수와 보자기가 방치되거나 외국으로 무더기로 반출되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자수와 보자기에 빠졌다. 이와 관련해 허동화는“남들이 내팽개친 것도 내 눈에는 참 예쁘게 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인도 여기에 가세했다. 내외는 50년 가까지 부지런히 보자기, 바늘집, 흉배, 안경집, 의복, 꽃신, 주머니, 안대, 수저집, 베갯보, 방석, 꽃버선 등을 수집했다. 모두 손바느질의 아름다움, 한구의 전통 색감과 미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핵심은 물론 자수와 보자기이며 조각보는 1000여 점에 달한다.
    허동화·박영숙 부부는 이러한 컬렉션을 토대로 1976년 서울 중구 을지병원 2층에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은 1978년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다른 박물관에서 이 부부의 유물을 대여해 전시를 열기도 했다.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자수특별전’을, 1983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한국전통보자기—한국자수박물관 소장품 특별전’을 개최했다.

    조각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척박하던 시절, 조각보를 박물관에서 만나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어. 저 조각보 우리 집에서도 봤는데. 근데 조각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성과에 힘입어 이듬해인 1979년 정부는 일본 도쿄에 한국문화원을 개관하며 첫 전시 주제로 자수와 조각보를 선정했다. 공신력이 높고 관람객도 많은 국립박물관과 공공기관에서 조각보를 전시하면서 사람들은 조각보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몰랐던 조각보의 미학을 제대로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생활용품 ‘조각보’ 박물관 데뷔…일약 문화재로

    허동화 부부는 용기를 얻었고, 2000년대 들어선 한국자수박물관에서 빈번하게 전시를 개최했다. 자수박물관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면서 전시를 찾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조각보에 대한 학술 연구도 확산되었고, 현대미술과 문화상품에 조각보를 응용하는 사례도 부쩍 많아졌다.

    조선시대 조각보 컬렉션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규모의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조각보를 쉽게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 컬렉션이 없다고 해서 조각보를 전혀 보지 못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 때부터 전해 오는 조각보는 어딘가 곳곳에 있다. 누군가의 집 장롱이나 옷장 속 어딘가에 할머니 때부터 사용해 오던 조각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적(私的)인 공간에서 한두 점씩 보자기를 감상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각보를 만나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고 만다. 조각보를 통해 전통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혼자만의 경험에 불과하다. 사적인 영역에 머물고 말 뿐이다. 많은 사람이, 한두 점이 아니라 다수의 조각보를 박물관 또는 미술관이라는 공적(公的)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감상할 수 있을 때, 조각보는 비로소 미술품으로 자리 잡게 된다. 조각보가 사적 생활용품에서 공적 미술품으로 바뀌어야 한국적 미감의 문화재로 인식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허동화·박영숙의 조각보 컬렉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각보가 K-문화재가 된 것은 운명

    외국인들이 조각보를 좋아하게 된 데에도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의 기여가 컸다. 한국자수박물관은 국내 전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시를 많이 열었다.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호주 일본 등 모두 10여 개국에서 40여 차례나 전시회를 개최했다. 국내 전시보다 해외 전시가 더 많을 정도였다.

    국내의 박물관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자주 전시를 개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국공립이 아니라 사립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더욱 독보적이다. 해외 전시를 연 박물관은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트 뮤지엄, 호주의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 일본 도쿄 민예관과 오사카 민예관 등 유수의 박물관이다. 이에 힘입어 해외에서 한국 보자기에 대한 인식과 평가도 높아졌다. 전시가 열린 박물관의 위상만으로도 외국인들이 조각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외국인이 특정 장르의 우리 미술품을 좋아하려면 해당 미술품과 자주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미술품이 외국으로 자주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각보는 조건이 매우 유리하다. 문화재나 미술품이 외국으로 나가려면 포장과 운송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문화재나 미술품이 훼손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포장해 옮겨야 한다.

    조각보는 이 포장의 어려움이 없다.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깨지거나 훼손될 우려도 적다. 이동이 상당히 수월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해외 전시가 다른 경우보다 손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조각보가 외국인들과 친해질 수 있는 운명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까. 조선시대 조각보는 원래 사용하기 편하고 접어 보관하기 편한 것이었다. 그러한 특성과 장점을 지금도 맘껏 발휘하고 있다.

    외국인이 놀라는 점이 또 있다. 조선시대에 조각보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평범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조각보는 예술가가 아니라 일반인이 만든 작품이다. 현대미술 용어로 설명하자면 조각보는 ‘생활 속 미술’인 셈이다. 이 같은 매력이 외국인들의 마음을 더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서울공예박물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이 상설 전시돼 있다.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서울공예박물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이 상설 전시돼 있다.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자수박물관 조각보, 기증으로 전 세계에 퍼져

    허동화 부부는 기증을 통해 조각보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1995년부터 11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트 뮤지엄 등 국내외 박물관에 한복 노리개, 자수 보자기, 부채, 다듬잇돌 등 1000여 점을 기증했다. 2018년 5월엔 조각보, 자수 병풍 등 평생 모은 수집품 5000여 점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기증품은 지금 현대 서울공예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허동화 박영숙 부부는 평생 모은 컬렉션 거의 전부를 사회에 기증했고, 허동화는 기증 직후 세상을 떠났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올해 7월 개관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로터리 옆 옛 풍문여고 자리에 터를 잡았다. 남녀노소 불물하고 사람들로 늘 붐비는 곳. 교통의 요지이자 문화와 낭만의 거리다. 개관 소식이 알려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면서 인기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곳에선 현재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자수, 꽃이 피다’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의 상설전과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 등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이 가운데 ‘자수, 꽃이 피다’와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 전시가 허동화 부부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전시다.

    2018년 5월 24일 타계한 허동환 한국자수박물관장. [동아DB]

    2018년 5월 24일 타계한 허동환 한국자수박물관장. [동아DB]

    서울공예박물관이 위치한 인사동에서는 조각보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카페에 가도 여기저기 조각보 장식이 걸려 있다. 언제든지 조각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허동화 박영숙 부부가 설립한 한국자수박물관이 궁금해진다. 알아보니, 한국자수박물관은 컬렉션 기증 이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컬렉션 전부를 서울시에 기증한 데다 허동화 관장마저 세상을 떠났기에,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한국 대표 추상 작품 ‘조각보’

    조각보의 추상성,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조형미를 두고 네덜란드 출신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의 추상화에 비견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시대 조각보는 몬드리안이 1920~1930년대에 제작한 ‘콤포지션(Composition)’ 연작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사람들은 우리 조각보가 몬드리안의 추상화보다 더 앞선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탁월한 능력의 예술가가 아니라 평범한 여성들이 만들었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한다.

    조각보 디자인과 몬드리안의 미술을 접목하려는 움직임도 많다. “조각보, 몬드리안을 담다”라는 표현도 종종 만날 수 있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보의 미감과 몬드리안 추상의 미감은 좀 다르다. 조각보의 구성 디자인이 좀 더 편안하고 그윽하다. 이것은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차이다. 몬드리안 추상의 매력도 대단하지만 우리 조각보 추상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인 것 같다.

    조각보에는 겉으로 드러난 미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행위를 통해 복을 기원하는 기복적 신앙이 담겨 있다. 또 물건을 주고받는 데 예의와 격식을 갖춘다는 한국적 심성이 담겨 있는 물건이기도 하다. 조각보는 따라서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미감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적 미학까지 담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몬드리안의 추상화로 장식된 네덜란드 헤이그시 청사.

    몬드리안의 추상화로 장식된 네덜란드 헤이그시 청사.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시(市) 청사 건물 외벽에 몬드리안 추상화가 등장한 적이 있다. 100년 전, 몬드리안이 주도했던 추상미술 운동 ‘데 스틸(De Stijl)’을 기념하기 위해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확대 복제해 시청사 외벽에 붙인 것이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미술평론가 공주형 한신대 교수는 동아일보 2017년 5월 16일자에 이렇게 썼다.

    “하얀 건물을 캔버스 삼아 솟은 검은 수직선과 창문 옆으로 이어지는 굵은 수평선이 산뜻한 삼원색 면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회화가 탄생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몬드리안의 그림’으로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데 스틸을 기념하고자 했답니다. 소식을 접하며 새롭게 다시 호출된 듯했습니다. 차이와 차별이 초래할 비극을 수직적 ‘만남들’로 해소하며 평등한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미술가의 꿈, 우리의 유토피아 말입니다.”

    헤이그시 청사의 몬드리안 그림은 무척이나 상쾌하고 아름답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에게는 조각보가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조각보는 구성의 특성상 다채롭게 변주가 가능하다. 그것이 건물 외벽이든, 미디어아트든 문화상품의 차원을 넘어 좀 더 과감하고 창의적으로 변주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한식에 비빔밥 있다면 한국미술에는 조각보

    조각보는 볼수록 아름답다. 일상용품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조각보는 여전히 실용적이다. 조각보를 실제 보자기로 사용하거나 장식용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 디자인을 모티프로 삼아 다양한 문화상품도 만든다. 또한 직접 조각보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이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조각보는 우리 곁에서 웅변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을 꼽는 이들이 많다. 비빔밥은 융합, 조화를 상징한다. 그것을 조각보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버려지는 자투리 옷감을 서로 이어 붙여 새롭게 만들어낸 하나의 디자인. 이래저래 조각보는 참으로 절묘하다.

    #조각보 #몬드리안 #서울공예박물관 #신동아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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