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가 세상 아픔 외면하면 안 된다” 거리로 나선 큰스님
7월 22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입적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목마른 자에게는 법을 준 선승
‘깨달음의 사회화’로 한국 불교의 새 지평 연 선구자
제자 앞에선 한없이 자애로웠던 스승
“본래 마음을 깨닫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라”
동국대 이사장 성우스님. 1976년 월주스님 문하로 출가해 수십 년간 깊은 인연을 맺었다. [지호영 기자]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직후, 월주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자격으로 광주를 찾았다. 다친 시민을 위로하고, 희생자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열기 위해서였다. 1998년 외환위기 때는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 개신교 강원용 목사와 함께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활동했다. 2003년 국제개발구호 NGO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아시아·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우물을 파주고 학교를 짓기도 했다. 월주스님이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제창하기 전까지, 한국 불교는 참선 위주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월주스님을 통해 우리 불교의 외연이 한 차원 넓어졌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월주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성우스님(64·동국대 이사장)은 스승에 대해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법’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평생 ‘이 뭣고’ 화두를 들고 수행 정진하며,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자비행 또한 생활화하셨다”고도 했다. “은사스님은 늘 당당하셨다. 그 모습이 그립다”고 떠올릴 때는 노스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잘못된 만남”인 줄 알았던 인연의 시작
수행, 종무 행정, 사회 활동을 통해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
성우스님을 만난 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월주스님의 또 다른 면모를 알고 싶어서였다. 성우스님은 채 스무 살이 되기 전 월주스님 문하로 출가해 45년간 모셨다. 가까이서 지켜본 대종사(大宗師)의 삶에 대해 듣고 싶었다. 성우스님은 “나와 은사스님의 인연은 사실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됐다”는 알쏭달쏭한 말부터 꺼냈다. 성우스님 이야기를 옮겨보면 이렇다.
“저는 출가를 결심한 뒤 서울 성북구에 있는 대원암 탄허스님 문하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대원암을 거쳐 깊은 오대산으로 들어가리라. 그곳에 가면 금생에 아예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속세로 다시는 내려오지 않겠다’ 다짐했지요. 그런데 제 손을 붙잡고 가던 작은아버지께서 다짜고짜 성북구 개운사로 저를 데려가서는 마치 짐짝처럼 은사스님에게 맡기고 쏜살같이 나가버리시는 게 아닙니까. 그때 은사스님을 처음 친견했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시고 손으로 큰 나무염주를 돌리고 계셨습니다. 또 마당에서는 시봉(侍奉)스님이 장대를 힘차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가면 두 스님 손에 있는 지물로 죽도록 맞을 것 같아 하룻밤만 보내고 새벽녘 대원암으로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성우스님의 작은아버지는 월주스님과 친분이 있었고, 조카가 그 문하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사정을 전혀 몰랐던 성우스님으로서는 당혹스럽기만 한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왜 다음 날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궁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식사 직후 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차를 한잔 내주셨습니다. 이어 ‘이 작설차 맛과 같이 달지도 쓰지도 않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매사에 중도를 지키는 것이 중이다’ 말씀하시면서 ‘부처님의 생애’라는 책을 한 권 꺼내 주셨어요. ‘이걸 다 읽은 뒤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독후감을 써오거라’ 하시더군요. ‘단 한 줄’이라는 단서가 붙은 말씀에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예’라고 답했지요. 그 약속을 어기고 도망칠 수 없어 그만 ‘영어의 신세’가 됐습니다.”
옛 추억을 되짚는 성우스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소년 행자’ 시절로 돌아가 큰 배움을 베풀어주신 은사스님을 자랑하는 듯 보였다.
불가에서는 보통 출가 후 일정 기간 행자 생활을 하며 수련한 뒤 사미계를 받는다. 이때 비로소 승려가 된다. 행자 생활은 쉽지 않다. 끝없이 자신을 낮추고(하심·下心) 욕됨을 참아야 하는(인욕·忍辱) 시간이다. 성우스님은 개운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중 한 스님께 말대답을 했다가 크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다고 한다. 이번엔 그때의 추억이다.
깊은 밤 한 제자만을 위해 연 수계식
“스님 다섯 분이 제게 ‘몽둥이 50대를 맞고 행자 생활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매를 맞지 않고 이대로 속세로 돌아갈 것이냐’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매를 맞고 행자 생활을 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지금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세로 나갔을 텐데(웃음), 그때는 스님이 되고 싶은 열정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가 매를 맞았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으셨는지, 그날 밤 은사스님이 비밀리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녹차를 한잔 내주시며 구정선사의 일화를 들려주시더군요. ‘승려가 되고 도를 깨우치려면 인욕(忍辱) 수행이 제일이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대장부여야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연꽃처럼 청정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내일 아침을 먹고 속리산 법주사로 가서 행자 생활을 하여라’ 당부하셨지요. 이것이 스님께 받은 초발심(初發心) 가르침입니다. 그때 말씀은 아직도 제 등불이자 지남(指南)입니다.”법주사는 월주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당신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절로 제자를 보내신 셈이다. 성우스님은 이후 법주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 월주스님이 계신 금산사로 옮겨 사미계를 받았다. 1976년 음력 7월 15일의 일이다. 이날 성우스님에게는 ‘스승의 사랑’을 실감한 또 한 번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사시(오전 9시~오전 11시)에 금산사 대적광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여러 행자님이 사미계를 받으셨어요. 행자 가운데 저를 포함해 2명만 제외하고요.”
- 왜 그렇게 된 건가요.
“저는 법주사에서, 다른 분은 불국사에서 각각 행자 생활을 했습니다. 금산사에서 계를 받으려면 행자 생활을 더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비극적인 소식이었지요. 성격 급한 다른 행자님은 바로 봇짐을 싸서 석양 무렵 산문을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행자실에서 한없이 울었어요. 그러다 지쳐 저녁 공양이 끝난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제 얼굴을 흔들더군요. 계 받을 준비를 하라고요. 꿈인지 생시인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법당에 들어가자 은사스님이 함박웃음을 짓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시고는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계를 설하기 시작하셨죠. 수계식은 한밤이 돼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수계식은 보통 사시에 열립니다. 저는 한밤중에 계를 받은 유일한 승려입니다. 제가 어찌 은사스님 은혜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우스님은 또 한 번 활짝 웃었다. 이번엔 웃음 끝이 촉촉했다. 성우스님은 “은사스님을 떠올리면 뵙고 싶다는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 제자가 상심할까 봐 월주스님이 밤늦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신 거군요.
“그러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하룻밤만 더 자고 다음 날 새벽 쥐도 새도 모르게 절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어요. 스님은 그런 저를 한 번 더 잡아주신 겁니다. 제가 평소 은사스님 말씀을 잘 따른다고 저를 ‘효상좌(孝上佐)’라고 하는 문도(門徒)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절대 효상좌가 아닙니다. 제게 베풀어주신 은사스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지시 사항에 대부분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살아온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
2010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에서 열린 초등학교 기공식에 참석한 월주스님(왼쪽). 오른쪽 사진은 북한 농기계수리공장 준공식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으로 식사하는 성우스님(왼쪽)과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 성우스님 제공]
‘깨달음의 사회화’를 강조하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등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월주스님은 봉사활동과 비정부기구(NGO) 간 교류 등의 목적으로 종종 해외를 다녀오곤 했다. 성우스님은 그 길에 동행한 기억도 떠올렸다.
“1996년 은사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시절 함께 유럽에 가서 2주 동안 그린피스, 옥스팜, 소비자보호연맹 등 다양한 분야 비정부기구를 방문하고 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은사스님은 여행 비용을 아끼고자 ‘3류 호텔’만 이용하셨어요. 일정 내내 현지 시민단체 활동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중생을 돕는 데 더 바람직한 방향을 찾고자 토론하셨고요.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스님의 사상과 삶의 방향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르침이었지요.”
성우스님은 2002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활동 일환으로 평양을 찾은 일도 잊지 못했다. 당시 월주스님과 함께 옥류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꺼내 보이며 “이것을 보니 밥과 법을 다 중요하게 여기신 은사스님의 삶이 새삼 떠오른다”고 했다.
“은사스님이 평소 찬 음식을 즐기지 않으셨는데 이날 평양냉면만큼은 참 맛있게 드셨어요. 다만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은 제게 권하셨죠. 그날 아이스크림을 제 것까지 두 배로 먹은 탓인지 이후 배탈이 났습니다. 북한에 있는 내내 끙끙 앓으며 틈날 때마다 화장실을 오가느라 애를 먹었지요.”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다 빙그레 미소지으며 성우스님이 들려준 옛 이야기다. 그가 떠올린 추억담은 또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15시간, 차량으로 5시간을 더 가면, 케냐 마사이족 인키니 마을에 도착합니다. 말 그대로 오지지요. 그곳 아이들은 소똥으로 뒤덮인 황무지에서 뒹굴며 지내요. 스님은 그곳에 농장과 최첨단 태양광 식수시설, 그리고 학교를 짓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스님이 일흔이 넘으셨을 때 그 마을에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달라진 모습을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시던지요. ‘건강이 다시 좋아진 것 같다’고 환히 웃으셨어요. 돌아보면 스님은 미소가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가장 그립습니다.”
성우스님은 월주스님의 삶은 그 자체가 곧 수행이었다고 돌아봤다. 월주스님이 2016년 펴낸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는 “나의 수행 현장은 사회와 지구촌의 구석진 곳이다. 나는 늘 그곳에 서 있을 것이다”라는 다짐이 담겨 있다. 이것이 그저 선언적인 문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성우스님 설명이다.
“참선 수행이 습관화되면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시끄럽거나 고요하거나(語默動靜), 어떤 악조건에도 화두에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 또는 수자의삼매(隨自意三昧)라고 하지요. 은사스님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하지 않고 ‘이 뭣고’ 화두를 참구(參究)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생활 자체가 참선 수행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전, 한때 월주스님은 밤낮을 잊은 채 수행에 전념하다 건강을 해친 일도 있다고 한다. 월주스님 회고록에는 스승 금오스님이 “수행과 계율을 강조한 호랑이 스승”이었다고 묘사돼 있다. 성우스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오노스님은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계율을 어기거나 참선을 기피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경내 청소나 3000배를 시키셨지요. 은사스님은 평생 노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재물과 여인을 멀리하고,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셨지요. 젊은 시절 밤잠을 자지 않고 금강경 독송에 매달리다 오랫동안 앓던 병이 위중해지신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스승께 받은 ‘이 뭣고’ 화두 수행을 거듭하자 모든 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은사스님이 당시 천지가 본래 크게 비어 있다는 실상을 자각하고(天地本太空·천지본태공) 일시적으로 허무공에 빠졌지만, ‘이 뭣고’ 화두 수행을 통해 불퇴전의 원력보살로 환골탈태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은사스님은 일체 중생을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공양하며(一切亦如來·일체역여래), 동체대비의 보현행원을 평생 수행하셨습니다(唯我全生涯 卽是臨終偈·유아전생애 즉시임종게).”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9월 9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엄수된 월주스님 49재. [금산사 제공]
월주스님은 이처럼 깊은 수행과 큰 사랑을 바탕으로 언제나 제자에게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성우스님이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은사스님은 2011년 전주혁신도시의 종교용지 608평(약 2010㎡)을 평당 180만 원에 불하받았습니다. 4년이 지나자 땅값이 평당 600만 원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제가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도 크지만 투자 능력도 대단하십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러기가 무섭게 은사스님께서 ‘성우스님이 포교당을 신축하도록 하려고 산 땅’이라 하시더군요. 순간 정신이 멍해졌어요. 시주 능력이 전무한 제가 어떤 재주로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쭙자 ‘영화사에서 5억 원을 송금할 테니 종잣돈 삼아 건물을 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격려의 말씀을 듣는 순간 힘이 샘솟았고, 쇠뿔을 단김에 뽑듯 공사를 시작해 일사천리로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주금이 예상보다 많이 모여 내부 집기는 물론 버스까지 구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절이 수현사입니다. 마침 부근이 공원용지라 지자체에서 절 주위로 1만5000평(약 4만9600㎡) 규모 도심공원까지 조성했습니다. 누군가의 가피(加被)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주스님 회고록에는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즉 ‘본래 마음을 깨닫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라’라는 경구를 지남(指南)으로 삼고 살았다는 대목이 있다. 성우스님은 더할 나위 없이 큰 본보기였던 스승의 뒤를 따라 이 삶의 길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은사스님은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스님 말씀처럼 ‘살 때는 온 힘을 다해서 사시고, 죽을 때는 온 힘을 다해서 죽으셨습니다(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그동안 우리 스님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돕고, 추모해 주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스님이 남긴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이어가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성우스님의 다짐이다.
#월주스님 #성우스님 #요익중생 #보현행원 #신동아
생전 사찰 경내를 걷고 있는 월주스님. [금산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