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
美 민주·공화 공히 아프간 철군 선호
‘역사의 종언’ 이후의 정체성 정치
탈레반의 ‘문화’도 존중의 대상인가
‘다문화’라 쓰고 ‘억압’이라 읽는다!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의 지도부들이 8월 15일(현지 시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에 모여 있다. [AP 뉴시스]
역사는 끝났다. 여기서 우리는 후쿠야마가 ‘역사’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뜻으로 쓰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차원의 역사라면 인류가 단번에 멸망하지 않는 다음에야 종언을 고할 수 없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란 거대 담론과 투쟁의 역사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갖고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하면 더 나은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와,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 관리할 때 인류가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투쟁이, 공산주의의 패배로 마무리됐다는 의미다.
그 결과, 짧게 보면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인 1917년부터 동구권이 해체되기 시작한 1989년까지, 혹은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치열하게 이어져온 거대 담론과 투쟁의 시대가 끝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 국제 경제 체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하던 청년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은 일순간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으로 인해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만이 남게 될 것이라 보았다. 니체의 ‘마지막 인간’이란 그 어떤 숭고하고 위대한 업적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말초적인 쾌락과 안전에만 몰두하는 자다. 역사의 위대한 투쟁이 사라졌으므로 위대한 인간도 없다. 역사의 종언,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해 온 세상은 자본주의의 단일한 질서 속으로 편입됐다. 모든 인간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매혹
8월 30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은행 앞에 현금을 찾으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후 현금 인출 수요가 폭증하자 탈레반은 시민들의 인출 금액을 한 주에 200달러로 제한했다. [AP 뉴시스]
그러나 진보 운동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현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이념 혹은 최소한의 방향이 절실했다. 하지만 냉전은 끝났고 20세기 진보 운동의 가장 큰 밑거름이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파탄을 맞이했다. 대체 무엇으로 그 빈자리를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1990년대부터 문화, 특히 ‘다문화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은 그래서였다. 자본주의 체제 극복을 위한 대안 논리를 사회주의 이론과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문화, 인종, 종교, 젠더 등 다양한 ‘차이’의 요소를 발견하고 드러내어 논쟁하는 담론이 힘을 얻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나라 미국에서 ‘역사의 종언’은 곧 미국을 향한 애국심의 종언을 뜻했다.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 특히 진보 성향이 강한 지식인들은 애국심을 드러내는 것, 혹은 아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다. 대신 그들은 문화의 ‘차이’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에서 후쿠야마에게 국제정치학을 가르친 스승인 새뮤얼 헌팅턴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교육받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에서 국가적 정체성은 때로 멀리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세계화, 다문화주의, 범세계주의, 이민, 하부국가주의, 그리고 반국가주의가 미국인들의 의식을 약화시켰다. 대신에 민족적, 인종적,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 전면에 부상했다.”
이는 ‘역사의 종언’과 함께 놓고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투쟁이 살아있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미국 지식인에게 국가적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선다는 말과 동일했다. 반대로 국가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표방하는 국제주의와 이상주의의 편에 선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거대 서사가 사라졌으므로, 엘리트 지식인들은 국가나 이념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 정치’에 매혹되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국의 무덤’
다소 길고 복잡한 설명을 내놓은 이유가 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그에 따른 여파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다.사람들은 흔히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의 무덤’이라 부른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속 없는 전쟁을 벌이다 퇴각하고 말았던 그 전철을 미국 또한 밟고 있다. 소련이 치렀던 20세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냉전의 종말을 불러온 중요한 기점이 됐다. 그렇다면 미국이 소련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럽게 상처투성이의 퇴각을 하고 만 것 역시, 거대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중동에의 군사적 개입을 줄이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적 방향에 따른 행위다. 바이든 대통령이 성급하게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지만, 중동에서 발을 뺀다는 전반적 방향은 민주당과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국 정계가 대체로 공유하고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냉전의 종식과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 미국의 탄생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거칠게 요약하면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한 진보 운동의 시대가 저물고,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 등을 앞세운 새로운 진보 운동의 시대가 개막했다.
그러한 흐름은 1960년대에 시작돼 19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 번 헌팅턴의 책을 인용해보자.
“1990년대에 이르러 전문가들은 해체주의자들의 승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그리고 1997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학자 네이던 글레이저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 모두는 다문화주의자다’.”
헌팅턴은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와 그 여파는 다문화주의의 승리에 약간의 제동을 걸었지만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불러오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는 다문화주의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라! 차이를 존중하라!’ 이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만으로 진보적 논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 군인들이 8월 28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픽업트럭을 타고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AP 뉴시스]
그 문화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
8월 15일 카불 함락은 그런 면에서 국제정치적 사건을 넘어서는 철학적 사건이다. ‘역사의 종언’ 이후의 지성계를 지배해온 다문화주의의 파국을 전 세계인에게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2021년 현재도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다문화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많은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테다. 하지만 다문화주의에 기반을 둔 정책은 진지한 도전과 검토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처절한 실패 사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카불 함락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자. 탈레반은 마치 자신들이 달라진 것처럼 홍보했지만, 막상 점령이 시작되고 나니 그들의 행태는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온 몸을 두르고 눈까지 가려야 하는 억압적인 의상 ‘부르카’를 마련하지 못한 여성들은 출퇴근도 하지 못한 채 집에 갇혀 있다. 현장을 중계 중이던 CNN의 여성 기자가 탈레반에게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탈레반의 억압이 오직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 엄숙주의와 계율에서 벗어난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폭력으로 짓눌러야 할 무언가로 여겨진다. 탈레반을 풍자하던 코미디언, 아프가니스탄 전통 민요를 발굴하고 부르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가수 등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다문화주의는 모든 문화와 관습에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공적 영역에서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때로는 지나치거나 소모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특정 국가 안에서 다문화주의 담론과 그에 따른 논쟁은 그간 소외돼 있던 이들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면에서 유익할 때가 많다.
‘다문화주의의 종언’
문제는 다문화주의 관점을 타국의 경우에도, 혹은 타국에 존재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느냐다. 모든 문화와 관습에 나름의 이유와 존재의 당위가 있다는 주장을, 탈레반의 만행을 지켜보며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문화, 종교, 관습 등을 ‘다르다’며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탈레반의 극단주의도 하나의 문화라고 한다면, 그 문화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물론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사람들 상당수가 지지하는 문화와 관습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다.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는 정부군이 아닌 탈레반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틀린 문화’를 존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카불 함락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이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논의가 주한미군 철수라던가 자유의 소중함 같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주제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역사의 종언’을 넘어 ‘다문화주의의 종언’을 목격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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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