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극렬해도 선거는 전쟁 아니다
이낙연 패배 인정, 환영할 일이지만…
민주주의 원칙 어긋난 與 당규해석
‘투표’와 ‘득표’는 엄연히 다르다!
소급 무효? 他 후보 매수 나설지도
여당서 사라진 盧·최동원의 ‘우공이산’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가 10월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 합동연설회에서 후보자 수락 연설을 앞두고 두 손을 올려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다들 많이 하는 소리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종종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다. 얼핏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 선거와 전쟁 모두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권력을 두고 벌이는 다툼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패자에게는 형식적인 격려와 칭찬의 박수 외에 남는 게 없다. 그러니, 선거는 전쟁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선거와 전쟁의 유사성은 은유 차원에서 머문다.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전쟁은 상대가 다시는 아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굴복시킬 때 끝난다. 반면 선거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과가 나오면 막을 내린다.
전쟁을 끝낼 때 ‘다음 전쟁은 몇 년 후에 하자’고 기약을 하는 전쟁 당사자는 없다. 모든 전쟁은,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라고 공표하게 마련이다. 반면 선거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치러진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다음 선거가 기다린다. ‘이번 선거는 마지막 선거’라는 식으로 치러지는 선거는 정상적인 선거일 수가 없다.
문제의 특별당규가 논란인 까닭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들이 벌이는 극한의 투쟁이라 해도,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선거는 전쟁과 달리 ‘규칙성’과 ‘반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대표를 선출하거나 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이미 정해진 방식에 따라 참여자의 동의하에 수행된다.반면 전쟁은 ‘무규칙’이다. 선거가 링 위에서 벌어지는 스포츠라면, 전쟁은 길거리 싸움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길거리의 깡패가 상대방에게 칼을 맞으면, 물론 재기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복귀가 어려울 것이다. 반면 운동선수는 몇 번이고 쓰러져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이 또한 전쟁과 선거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다소 길게 일반론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두고 벌어진 논란과 후폭풍에 대해 짚어보기 위해서다. 정치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참여하는 이른바 ‘정치 고관여층’, 특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정치 고관여층 사이에서는 정치와 전쟁을 동일시하는 시각이 흔히 보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이러한 관점이 여당의 열혈 지지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는 소리다.
10월 13일 당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경선 패배를 인정하면서 민주당의 내분은 일단 진정되는 모양새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정당의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와 무관하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지닌 초대형 여당에서 극렬한 내분이 발생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의 불행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불거지게 만든 민주당의 당규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대선후보 경선의 특별당규가 모호하게 짜여 있었다는 것부터 문제적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당규를 해석함에 있어서 당원들의 투표를 무효로 만드는 방향으로 당 선관위가 해석을 내렸다는 데 있다. 단언컨대, 그러한 해석론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문제의 특별당규 ‘제20대대통령선거후보선출규정’의 제59조 1항은 후보자의 사퇴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
이를 두고 이재명 지사와 그를 지지하는 측은 ‘무효라고 써 있으니 무효가 되는 것’이라는 문언적 해석을 앞세우고 있다. 문언적 해석이란 말 그대로 쓰인 말을 그대로 읽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이 사안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무효는 무효다’라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제59조 1항이 과연 그렇게 ‘명백’한 규정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후보자에 대한 ‘투표’와 그 후보자가 얻은 ‘득표’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제20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이재명 경기지사 등 당 지도부가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지도부-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상견례’에 참석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다른 후보 매수할 유인동기 생겨
제59조 2항과 함께 읽어보면 1항의 의미는 다른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제59조 2항은 “후보자가 투표 시작 전에 사퇴하는 때에는 투표시스템에서 투표가 불가능하도록 조치하되, 시간적‧기술적 문제 등으로 사퇴한 후보자를 제외하는 것이 불가능한 때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치 방법을 정한다”고 규정한다. 1항에서 말하는 ‘투표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제59조 2항은 이런 뜻이다. 후보자가 투표 시작을 한참 앞두고 사퇴할 때에는 투표용지를 다시 인쇄하는 등, 아예 무효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하지만 투표 시작을 눈앞에 두고 사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며, 무효표가 최소한으로 나오도록 선관위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제59조 1항은 사퇴 이후에 발생하는 투표를 무효로 한다는 것이지, 사퇴 이전의 표까지 소급해서 무효라는 뜻이 되기 어렵다.
뒤이어 제60조로 넘어와도 마찬가지다. 1항. “선거관리위원회는 경선 투표에서 공표된 개표결과를 단순합산하여 유효투표수의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민주당은 여러 차례 순회 경선을 하고 투표하며 매번 투표가 끝날 때마다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므로 어떤 표가 무효인지 유효인지는 매번 투표 후 ‘개표’하고 ‘공표’할 때 결정된다. 그리하여 나온 유효투표수를 단순 합산해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재명 측의 주장대로 정세균 후보와 김두관 후보가 사퇴 전에 얻은 2만3731표와 4411표가 무효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제60조 1항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소급 무효’는 “경선 투표에서 공표된 개표결과를 단순합산”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번 행해진 투표를 개표하고 공표하여 확정된 유효표는 설령 그 후보가 이후 사퇴했다 해도 유효로 봐야 한다. 그래야 제60조 2항에 정해진 결선투표의 취지에도 부합할 뿐 아니라, 전체 조문의 논리적 구성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미 민주당 당무위원회는 결정을 내렸다. 이낙연 후보 스스로 수용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국민적 시각에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언적 해석을 표방한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사퇴한 후보자의 표를 소급해서 무효 처리한다면, 특정 후보는 다른 후보를 매수하거나 설득해 전체 유효투표의 모수(母數)를 조작할 유인동기를 갖게 된다. 육상, 빙상 경기 등에서 1위를 할 수 없는 선수가 같은 편을 돕기 위해 유력한 경쟁자 앞에 넘어지거나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그런 이상한 경선 룰이 되고 만다. 민주당 당무위의 결정에는 선거를 경쟁이 아니라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고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일까.
노무현과 최동원의 정치
9월 29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회의실 벽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그러므로 선거를 전쟁으로 보는 단순 과격한 시각은 잠시 접어두자. 전쟁과 달리 선거는 상호 합의된 합리적 규칙에 따라 반복적으로 치러지는 평화적 행사다. 선거는 전쟁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아무리 치열하게 싸웠다 해도, 선거가 끝난 후에는 웃으며 승자는 패자에게 위로를,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선거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상 작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거는 전쟁이 아니라 무엇이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민주국가의 선거란 ‘경연대회’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당선 가능성을 보고 뛰어들어 실제로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도 있다. 매번 선거마다 판세를 유심하게 관찰한 후 ‘이기는 편 우리 편’의 마음으로 대세에만 표를 던지는 식의 유권자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당장의 당선 가능성과 무관하게 선거에 출마한다. 선거가 치러지는 공동체에 대해 후보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지, 그런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적 행사가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마치 돌을 하나씩 날라 산을 옮기고자 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비록 지금은 다수가 아니지만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올바른 이야기를 하겠노라고 마음먹는 정치, 세상에는 그런 정치도 있다.
노무현은 호남 차별에 맞서기 위해 부산에 출마했다가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노무현에게도 선거는 당선을 위한 전쟁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누군가는 3당 합당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그의 정치 행보를 지배했다. 노무현뿐만이 아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 역시 부산의 영웅이었고 김영삼(YS)과 각별한 사이였지만 3당 합당에 찬성하지 않았기에 민자당이 아닌 ‘꼬마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섰고, 패배했다.
대역전극 펼쳐지려던 찰나 뚝 끊겼다
쉽게 이기고자 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굳이 지는 길로 걸어 들어갔던 이런 사례들에서, 우리는 선거가 전쟁이 아닌 더 숭고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비록 지금 내 생각은 소수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선거라는 무대를 통해 꾸준히 대중을 만나 설득하다보면 언젠가 세상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런 바보 같은 믿음으로 인해 때로는 정말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오늘날의 민주당을 ‘노무현의 정당’이라 할 수 있을까?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을 보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대장동 의혹에 경선 판 전체가 휩쓸려 들어가면서 진흙탕 싸움이 돼버렸다. 막판 대역전극이 펼쳐지려던 찰나, 1위 후보에게만 유리한 식으로 룰을 해석하면서 경선 자체가 중간에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이는 민주당 지지자 뿐 아니라 국민 전반에도 큰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다. 이낙연 후보가 패배를 인정한 마당에 정해진 경선 결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이 경선을 자기 성찰 및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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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