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호

‘목마른 용이 한강물 마시러 가는 형세’ 용산, 제자리 찾기 시작됐다

빼앗긴 땅 龍山, 빼앗긴 이름 둔지산을 찾다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2-05-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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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묘지, 일본군 주둔지, 용산 아방궁

    •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용산은 21세기 서울의 심장부

    • 일제가 지워버린 둔지산, 쫓겨난 둔지미 마을

    • 옛 노인들이 조선용산, 일본용산 구별한 이유

    • 대통령실 이전은 왜곡된 역사 복원의 시작

    서울 용산구 부군당 역사공원에서 내려다본 용산기지 메인포스트 지역. 멀리 왼쪽으로 전쟁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은 해방촌이다. [박해윤 기자]

    서울 용산구 부군당 역사공원에서 내려다본 용산기지 메인포스트 지역. 멀리 왼쪽으로 전쟁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은 해방촌이다. [박해윤 기자]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2021년 3월 4일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지 433일 만에, 그해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316일 만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첫날인 5월 10일 0시 용산 대통령실 청사(옛 국방부 본관) 지하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군통수권을 이양받고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대비 태세를 보고받는 것으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3월 20일 당선인 신분으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발표한 지 53일 만에 용산 시대가 개막됐다.

    오욕의 역사냐, 주권 완전 회복이냐

    전격적으로 진행된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한 반발은 적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불통과 독선, 강압적인 졸속 이전에 따른 안보 공백을 지적했고, 인근 주민들은 당장 고도제한 등 규제로 인한 집값 하락을 우려했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민주당이 재집권하면 청와대로 다시 갈 것”이라며 대통령실 이전 자체를 부정했다.

    역사 논쟁도 이어졌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3월 17일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용산 땅은 대한민국 국민 입장에서 오욕의 역사가 있는 곳으로 우리 대통령이 청나라 군대, 일본 군대가 주둔하던 곳에 꼭 가야겠느냐”고 꼬집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청와대 부지는 조선총독관저가 있던 곳”이라고 응수했다.

    ‘한겨레’는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이 2014년 일본 방위성 문서고에서 발굴한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1906년 일본이 군사기지 조성을 위해 만든 지도)를 근거로 “용산동 3가 삼각지 바로 옆 들머리 언덕배기의 국방부 청사 땅은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집단 묘역이었다”고 보도했다(3월 22일자 ‘국방부 청사 땅의 역사-윤석열이 찜한 용산 언덕, 원래 공동묘지였다’).

    덧붙여 이 기사는 1907년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차군사령관(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이 현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에 관저를 지었으나 1910년 8월 초대 조선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독관저로 바꿔버린 사실을 거론하며 “원래 군 장성 시설이던 것을 굳이 최고통치자가 자기 관저로 삼겠다고 해서 몰아낸 것이다. 지금 국방부 청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바꾸려는 것과 닮은 셈”이라고 꼬집었다. 일제강점기 ‘용산 아방궁’이라 불렸던 이 총독관저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됐고, 훗날 이 자리에 주한미군을 위한 121병원이 세워졌다.



    공동묘지, 일본군 주둔지, 총독관저, 용산 아방궁 등 개운치 않은 과거사는 용산 시대 개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반전 논리도 있다. “대통령실의 국방부 청사 이전은 신의 한 수”라며 용산 이전 계획을 적극 찬성해온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외국 점령군이 차지했던, 오욕의 역사가 많은 땅에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공간이 들어선다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의미가 있다”며 “과거 조선 한양의 중심축이 청계천이라면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축은 한강이다. 수도권이 확장된 21세기 서울의 중심부는 용산”이라고 했다.

    한 세기 넘게 기억상실증에 걸린 땅

    윤석열 대통령은 5월 3일 ‘용산 르네상스’를 주제로 ‘매일경제’가 개최한 ‘32차 비전코리아 국민보고대회’에 당선인 자격으로 참석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용산, 그리고 서울이 시민의 행복은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도시로 발돋움해서 더 많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용산 르네상스’를 외치기 전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 땅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최근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을 중심으로 보담역사문화연구소, 서울환경운동연합,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용산역사화사회적협동조합, 통일안보전략연구소, 한국땅이름학회,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가 ‘용산 둔지산 제자리 찾기 시민연대’를 결성했다.

    김천수 씨는 “용산 미군기지 안에는 용산(龍山)이 없다. 따라서 세간에 떠도는 용산의 지맥, 용의 기운이 모이는 명당 운운하는 것은 지금의 용산과 무관하다”면서 “용산기지 터는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둔지방 내 둔지산과 둔지미 마을이 있던 지역으로, 이곳에 있던 나지막한 산 이름이 둔지산이고, 산을 뜻하는 우리말 ‘미’가 붙어 둔지미라는 고유 이름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둔지산 일대를 강제 수용해 한국 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제멋대로 용산이라고 바꿔 불렀다.

    조선시대 수도인 한성부는 한양도성과 성저십리(도성 밖 10리, 4㎞)까지 관할구역이었는데 성저십리 인구가 계속 증가하자 영조 때 남부에 두모방·한강방·둔지방을, 서부에 용산방·서강방을 신설했다. 신설된 5개 방은 모두 한강변에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서도 용산방은 서부, 둔지방은 남부에 속하는 엄연히 다른 구역이었다. 당시 둔지방은 서빙고1계, 서빙고2계, 지어둔계, 이태원계, 청파계, 전생내계, 전생외계로 나뉘었는데 지어둔계가 현 용산기지에 해당된다.

    시민연대 측은 100여 년 넘게 관행적으로 불러온 용산이라는 지명을 당장 바꿀 수는 없지만, 둔지산이라는 고유 명칭이 있었음을 밝히고 둔지산 자락에 자리 잡았던 둔지미 마을(정자동, 신촌, 대촌, 원내촌)의 정확한 위치와 지명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명칭 회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잘못 지어졌거나 왜곡된 역사적 지명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다면 진짜 용산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용산의 동서를 가르던 만초천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남산 아래 둔지산이 갑자기 용산으로 둔갑한 이유는 무엇일까. 러일전쟁을 빌미로 일본 군대가 점령한 후 한 세기 넘게 이방인의 땅이었던 용산기지는 어떻게 기억되고 보존돼야 하는가.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최근 일본군 병영지 일대의 변천사, 용산연병장과 남영동의 지명 유래, 용산역 설치 연혁,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시기 효창원 구역의 수난사 등을 정리한 책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1·2’권이 출간됐다. 이 책의 저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10년간 금융인으로 살다 20년 전부터 일제강점기 이후 문화재 수난의 흔적을 찾고 기록하는 데 주력해 온 독특한 이력의 역사학자다. 2013~2019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위원을 지냈고, 2021년 6월부터 지금까지 두 번째 임기를 보내고 있다.

    이순우 씨는 이 책에서 “근대시기 이후 용산 일대는 식민 지배 체제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던 일본 군대가 직접 주둔했던 곳이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주한미군의 핵심 주둔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공간”이라며 “오랜 세월 이방인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면서 일제 침탈과 분단 시대의 고통과 상처가 고스란히 겹쳐진 지역으로 남게 됐다”고 한다.

    김천수 센터장 또한 용산 지역학 연구에서 독보적 인물이다. 2009년부터 5년간 한미연합사령부에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용산 연구를 시작해 용산기지와 용산 지역사 연구에 집중해 왔다. 이를 토대로 ‘우리가 잘 몰랐던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2014),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2017), ‘6.25전쟁과 용산기지’(2021) 3부작을 잇따라 발표했다. 또 신주백 교수와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용산기지 옛 사진과 각종 설계도면을 확보해 2017, 2019년 두 차례 사진전을 열고 ‘사진과 지도, 도면으로 본 용산기지의 역사’를 펴냈다.

    김천수 씨는 “대통령실이 이전하는 국방부 땅은 세간에 회자되듯 외세 주둔의 역사와 오욕의 역사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다”라며 “한 세기 전만 해도 이곳은 목멱산과 한강을 벗하며 만초천을 품은 둔지산 구릉지대로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사후의 거처(공동묘지)였다. 지금은 이 일대를 용산으로 알고 있지만, 일제가 100여 년 전 용산기지를 만들기 이전부터 수백 년간 둔지산 또는 둔지미로 불렸다”고 한다.

    1908년 초 둔지미 신촌과 정자동에 살던 사람들이 강제 이주된 곳은 현재 보광동 4통과 5통 지역으로, 둔지미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 ‘새말’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훗날 ‘용산 아방궁’이라고 불린 총독관저가 들어서게 된다.

    용산의 정상에 있는 용산성당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 경조(京兆)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한성부를 가리킨다. 지도에서 ‘용산(龍山)’과 ‘둔지산(屯之山)’이 각각 다른 위치에 표시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 경조(京兆)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한성부를 가리킨다. 지도에서 ‘용산(龍山)’과 ‘둔지산(屯之山)’이 각각 다른 위치에 표시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

    흔히 용산이라고 하면 용산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삼각지, 용산역, 이태원을 떠올리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인 방(坊)을 기준으로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에 걸쳐 있었다.

    용산이라는 지명도 북악산, 인왕산, 남산과 같이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러나 1860년대 김정호가 한양도성과 성저십리(도성 밖 약 4㎞) 일대를 그린 ‘경조오부도’를 보면 도성 서쪽 인왕산과 무악(안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만리현과 효창묘를 거쳐 한강변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만리재에서 효창공원과 새창고개를 거쳐 산천동, 청암동 일대에 이르는 긴 구릉지가 형성돼 있다. 이 산줄기 형세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용산이 됐다. 혹자는 목마른 용이 한강물을 마시러 가는 형세라고도 한다.

    김천수 씨는 “1970년대부터 급속한 도시화와 개발로 용산의 산줄기가 고층아파트와 연립주택으로 뒤덮여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용산의 산줄기는 현재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산천동 천주교용산성당이 자리한 곳이 용산의 정상이라고 한다.

    1451년 편찬된 ‘고려사’를 보면 고려 숙종 6년(1101)에 수도 남경의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노원역, 해촌, 용산 등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454년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용산강은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을 거둬들이는 곳으로 군자강감(軍資江監·군량미를 관리하던 창고)과 풍저강창(豊儲江倉·궁궐에 올리는 쌀을 관리하는 창고)이 있다”고 했다.

    당시 용산강은 전국 8도 물자의 집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 일대 절벽(지금의 용산구 청암동, 산천동 서쪽 지역으로 한강을 끼고 있음)은 오늘날로 치면 한강 조망권이어서 풍광이 좋기로 소문이 나 역대 권력자들이 이곳에 누각, 정자,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조선시대 정조는 이곳 별영창(훈련도감 군병의 급료를 관리하던 곳으로, 속칭 벼랑창이라고 불렸다) 옆에 읍청루를 짓고 누각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2009년부터 5년간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서울 남영동 연구실 옥상에 서면 용산기지가 발밑에 있는 것처럼 가깝다. [김도균 객원기자]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2009년부터 5년간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서울 남영동 연구실 옥상에 서면 용산기지가 발밑에 있는 것처럼 가깝다. [김도균 객원기자]

    조선용산, 일본용산 뒤죽박죽된 지리적 위상

    읍청루 뒤 언덕에는 대한제국 말기 총세무사로 정부 재정을 좌지우지한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덕수궁 석조전 건축 추진)의 별장이 있었다. 원래 조선시대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아들로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함)의 정자 ‘담담정’이 있던 자리로, 안평대군이 죽자 신숙주의 별서로 쓰이다 어느 시점에 사라졌다. 그 터에 세관감시서가 세워졌고, 이 집은 다시 브라운의 별장이 됐다가 일제강점기 정무총감 별장으로 사용됐다. 광복 직후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이화장으로 옮기기 전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마포장’으로 언론에 등장했던 파란만장한 역사가 서린 장소다.

    하지만 용산과 마포의 경계에서 한강 쪽으로 툭 튀어나온 이 언덕이 왕래에 지장을 주자 일제강점기에 강변도로를 개설하면서 읍청루를 비롯해 별영창 일대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이순우 씨는 오늘날 담담정 터를 마포동 419-1번지로, 별영창 읍청루 터를 청암동 168-53번지로 고증한다.

    1992년 11월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 일부를 반환받아 용산가족공원을 조성할 무렵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용산공원 명칭고(名稱考)’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본래의 용산은 이처럼 원효로와 접한 한강변 일대였는데 지금은 용산 하면 한강 인도교에서 국방부나 옛 육군본부 옛 미군기지에 이르는 일대를 연상하게 된다. 용산은 용산이지만 이쪽 용산은 일본 사람들이 침략 시절에 대규모 병영을 짓고 저희네 집단 취락지를 만들면서 신용산으로 명명한 왜색 용산인 것이다. 옛 노인들이 본래의 용산을 조선용산이라 하고 신용산을 일본용산으로 불렀던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조선일보 1992년 11월 15일자)

    옛 노인들이 조선용산, 일본용산을 따로 부른 것은 당연했다. 어제까지 둔지산이던 곳을 어느 날 갑자기 일본군이 차지하더니 이제부터 용산이라 부르라 하고, 자기들도 헷갈리니 구용산, 신용산으로 구분하는 행태가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대가 떠나자 용산이 살아남고 둔지산이 잊혔다. 현재는 신용산 지역을 용산으로, 구용산 지역은 상당 부분 마포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시대 마포는 용산방의 일부였음을 떠올리면 세월 따라 지명에도 부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우 씨는 애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1899년 12월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가는 전차가 처음 개통됐을 때 종착점이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다 1910년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되자 종전의 용산역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 종점이 생겨났고, 기존 용산 포구 쪽 역은 ‘구용산’ 종점이라는 억지스러운 이름이 붙었다. 이씨는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 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둔지방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광동수사제독 오장경이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남단(南壇), 이태원, 둔지미, 하도감, 마두산 등지에 진영을 꾸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둔지산 일대에 주둔한 청나라 군영을 방문했다가 중국 톈진으로 압송되는 치욕의 역사도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때도 일본군 병력이 이곳에 주둔했지만 본격적인 군사기지화가 진행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였다.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해 서울 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다. 이곳은 원래 둔지방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1권)

    만초천을 경계로 서쪽은 용산방, 동쪽은 둔지방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도 지금의 용산기지 일대가 일본군 군사용지로 수용되기 전 용산방 지역과 장소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둔지방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조선왕조 개창 이래 둔지산과 그 산자락에 기대어 살아온 둔지미 마을의 명칭에서 유래됐다. 1751년 한성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인왕산에서 흘러 내려와서 지금의 용산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만초천을 경계로 그 서쪽은 한성부 서부 용산방으로, 그 동쪽은 한성부 남부 둔지방으로 행정구역을 구분했다. 이후 두 지역은 행정적, 공간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역으로 인식되고 유지돼 오다가 일본군 군사기지로 수용되면서 그러한 역사성과 장소성이 소멸돼 둔지방의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용산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둔지미’의 이름을 되찾을 기회가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캠프 서빙고’로 명명됐고, 1953년 8월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학에 있던 미8군 사령부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지금까지 용산 미군기지로 통용됐다.

    이는 지난해 초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가 국가공원 명칭 공모전을 열어 9401건의 시민 제안을 받았음에도 최종 선정된 이름이 다시 ‘용산공원’이라는 웃지 못할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위원회 측은 “기존 명칭인 용산공원은 100여 년간 사용돼 국민들에게 친숙하고 부르기 쉬우며 직관적으로 그 대상이 떠오른다는 강점이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일부 시민들은 “말은 맞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배경식 씨는 용산문화원 학술세미나(2021년 8월 27일)에서 “단순히 고유한 행정구역 명칭이 소멸되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아쉬움이 아니라 국가공원 명칭으로 확정된 ‘용산공원’이 역사성과 장소성을 무시한 잘못된 명칭임을 지적하고, 반환되는 용산기지 일대의 왜곡된 역사성과 장소성을 복원하는 공론의 장이 제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덕의 ‘둔’일까 병영의 ‘진’일까

     광복 직후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옛 일본군 용산기지 일대 전경(1945년 9월 4일). 김천수 씨가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김천수]

    광복 직후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옛 일본군 용산기지 일대 전경(1945년 9월 4일). 김천수 씨가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김천수]

    조선시대 화가이며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말년에 둔지산에 정자를 짓고 ‘두운지정(逗雲池亭·구름이 머무는 연못이 있는 정자라는 뜻)’이라고 명명했다. 실제 이 지역에는 정자가 많다 해서 ‘정자동’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강세황이 두운지정에 앉아 관악산과 동작나루를 마주하고 첩첩의 봉우리가 병풍을 친 듯하고 흰 모래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풍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두운지정기’라는 글을 남겼다. 그중 둔지산이란 명칭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나온다.

    “도성의 남대문을 나서 꺾어져 조금 동쪽으로 10리 못 미친 곳에 둔지산이 있다. 봉우리와 바위, 골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산이라는 명칭이 있고 둔전(屯田)을 둔 땅은 없지만 둔전의 땅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는 정말 따져 힐난할 것은 되지 못한다. 들길이 구불구불하고 보리밭 두둑이 높았다 낮아지는데, 마을 수백 기가 있다.”

    ‘둔전’이란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다. 강세황이 보건대 주변에 병영이나 둔전이 없음에도 둔지산 또는 둔지미(마을)라고 부르는 것이 다소 의아했던 모양이다. 다만 “따져 힐난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문상명 성신여대 연구교수는 둔(屯)을 진(鎭)으로 해석했다. 현 용산기지 일대가 예전에 넓은 모래밭이어서 효종 이후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군사들이 진법을 연습하거나 관병하는 장소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동국여도’ 중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를 보면 군대를 훈련하는 교장(敎場)과 노량진(鎭), 한강진(鎭)이 삼각형으로 배치돼 있고, 그 사이에 둔지미 마을이 위치해 있다. 이를 근거로 문 교수는 둔지산 일대는 평상시 둔전으로 부치던 밭이 있는 마을이지만, 유사시 중요한 진영(鎭營)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문 교수는 “군사도시로서 적합한 환경을 갖춘 곳에 일본은 자신들의 군사도시를 설계했고, 미군은 일제가 떠난 자리에 다시 자신들의 역사를 중첩했다”고 했다(‘둔지산의 유래와 공간적 특성’, 2021년 8월 용산문화원 학술세미나 발표 논문).

    반면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은 둔지산이라는 이름을 ‘담’ ‘돔’ ‘둠’과 같은 토박이 우리말과 연결시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 또는 평지에 오똑 솟은 언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배경식 부소장도 둔지산 앞의 한강은 서울에서 가장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곳으로 사방이 뻥 뚫린 백사장이 방어진지로서 적합하지 않아 둔지를 둔덕(언덕)으로 해석하는 쪽에 손을 들었다. 김천수 씨도 둔지가 지형적 특징과 관련 있는 명칭으로 보고, 둔지산이 ‘그리 높지 않은 둔덕 같은 산’이라고 할 때 강세황이 묘사한 “들길이 구불구불하고 보리밭 두둑이 높았다 낮아지는” 것과 합치된다고 했다.

    지금도 용산기지 내 ‘드래곤힐’ 호텔 언덕에 가면 수령 200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군락지가 둔지산의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삼남 가는 옛길은 끊기고…

    둔지산 일대는 숭례문을 나와서 동작나루와 서빙고나루를 통해 영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 만큼 둔지산 북쪽 기슭에 공용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이태원이 있었다. ‘옛길 위의 조선통신사’의 저자인 양효성 씨는 조선통신사들이 남대문 밖 남묘를 지나 전생서 인근을 지나 둔지산과 부어치(버티고개)를 넘어 한강을 건너갔던 사행길의 주요 루트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둔지산 일대가 강제 수용되면서 조선통신사의 길도 끊겨버렸다.

    일제강점에 사라진 또 다른 교통요지가 청파 배다리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남쪽을 향해 한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는 동작나루를 건너는 8대로(해남 방향), 서빙고로 넘어가는 4대로(동래 방향), 노량진으로 연결되는 7대로(수원 방향) 세 가지가 있었다. 이들 모두 숭례문을 벗어나면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을 거쳐 석우참(돌모루참)에 이르러 각각 길이 갈라진다. 이순우 씨는 당시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은 오늘날 경부고속도로 양재톨게이트나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었다고 말한다. 정조가 화성 원행에 나서거나 효창묘에 행차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청파 배다리가 있는 것은 만초천이 흘렀기 때문이다. 고종 초기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만초라 불리는 넝쿨풀이 많이 자라서 붙은 이름으로 너추내, 넝쿨내, 무악천, 만천이라고도 했다. 게가 많이 잡혀 ‘만초천의 게 잡는 불빛’이 ‘용산팔경’에 꼽히기도 했다.

    만초천은 경성 서쪽 모악(무악)에서 발원해 성을 감싸고 돌아 남쪽으로 흐르며 청파 남쪽의 주교(배다리)를 거쳐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으로 들어갔다. 현재 위치로 보면 인왕산 기슭과 무악산(안산) 남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해 서대문 사거리의 적십자병원~이화여고 부근~서소문공원~청파로~용산전자상가~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용산강)과 합류하는 7.7㎞에 이르는 물줄기다.

    조선 태종 때에는 만초천 물줄기를 이용해 용산강에서 들어오는 배를 숭례문 앞까지 끌어올리는 이른바 ‘만초천 대운하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좌의정 하륜의 아이디어로 대부분의 신하들이 찬성했지만 개국 이래 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추가적인 백성 동원에 부담을 느낀 태종이 보류했다고 한다.

    도성 안 청계천, 남대문 밖 만초천

    만초천 본류 외에도 남산 후암동에서 내려오는 후암천 지류(현 용산고등학교에서 숙대입구역 방향)와 현 경리단길에서 용산기지를 지나 삼각지 부근에서 합류하는 지류가 있는데 이 두 지류는 둔지방 주민들의 젖줄이었다. 도성 안에 청계천이 있다면 남대문 밖에는 만초천이 흘렀다.

    그러나 1902년 경부철도를 착공하면서 숭례문에서 청파·돌모루·당고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삼남대로가 폐쇄됐고, 경인철도 직선화와 도로 개설 과정에서 만초천 물길도 큰 변화를 겪었다. 광복 이후 1962년부터 서울역 뒤에서 원효로에 이르는 만초천 2㎞ 구간에 대한 복개공사가 시작돼 1979년 복개공사가 완료되면서 만초천 물길은 대부분 땅속으로 사라졌다.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서소문 아파트도 만초천을 복개한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나마 물길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만초천 대신 ‘욱천(旭川)’으로 기억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지명인 욱천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줄곧 이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1995년 서울시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만초천으로 바꾸기로 했으나, 청파로에서 용산전자상가로 이어지는 고가차도는 여전히 ‘욱천’으로 불리고 있다.

    서울시내에서 만초천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뜻밖에도 용산기지 메인포스트 구역에서 복개되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만초천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개천은 현 경리단길 인근 옛 이태원 마을에서 용산기지의 한미연합사 뒤를 지나 삼각지 부근으로 흐르고 있다. 일장강점기에는 소조천(小早川), 즉 고바야카와로 불렸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바야카와가 말에게 물을 먹인 장소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씁쓸한 역사지만 이 또한 만초천이 간직한 역사인 셈이다. 사라진 둔지방과 만초천의 이야기는 김천수 씨가 쓴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개정판 2021)에 수록돼 있다.

    둔지산의 역사성 회복할 마지막 기회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의 공식 임기가 시작된 5월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태극기와 함께 봉황기가 게양돼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의 공식 임기가 시작된 5월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태극기와 함께 봉황기가 게양돼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과 함께 주한미군이 기존 국방부 청사 앞 50만㎡ 규모를 조기 반환하기로 하면서 용산기지 공원화에도 가속이 붙고 있다. 전체 200만㎡(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기존 용산공원 포함하면 300㎡) 가운데 25%가 반환되는 셈이다. 올해 9월 중 일반에게 임시 공개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용산 대통령실 건물에서 직선으로 250~300m 떨어진 헬기장과 그 일대를 잔디광장으로 만드는 계획도 잡혀 있다. 백악관 잔디밭을 벤치마킹해 이곳을 대통령과 시민의 소통 공간으로 만들고 대통령실의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국민들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세기 이상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이 땅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국민 소통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면 이제 속전속결, 전격 추진 같은 말들은 내려놓아야 한다.

    “오랜 세월 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 침탈과 분단 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 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이순우,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1권)

    김천수 씨는 대통령실 이전과 함께 기지 반환이 앞당겨지고 국가공원이 조성되는 지금이 둔지산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되찾을 마지막 기회라고 말한다.

    “용산기지(용산공원 부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는 장소로서 특히 ‘동아시아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거울’이다. 따라서 이곳이 단순한 근린공원으로서가 아니라 또한 권력 중심의 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에 대한 성찰과 교훈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며, 나아가 한반도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방향으로 공원이 조성돼야 한다. 또한 미래 세대가 이 땅에서 힐링, 휴식과 더불어 역사성과 장소성을 꼭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공원이 돼야 한다. 여기는 미국 백악관이나 센트럴파크 공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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