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호

‘최초의 질문’ 이정동 “한국이 반도체로만 먹고사나?”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직설

  • reporterImage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3-03-06 10: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반도체·배터리 너무 많은 주목 받아

    • 中, 삼성·하이닉스 역량 추격 힘들어

    • 반도체를 반도체학과에서 만들라니…

    • 대기업, 제2의 종합상사 역할 할 때

    • 기술 국산화? 19세기 쇄국 가까운 행보

    • EU ‘테크’ 리더십 쥔 독일 손잡아야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월 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 연구실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월 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 연구실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한국에는 축적이 없다. 시행착오가 쌓이지 않는다. 늘 텅 빈 공백에서 다시 출발한다.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혁신은 시행착오에서 축적한 경험지식에서 비롯한다. 그래야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고안하는 ‘개념설계’ 역량이 생긴다. 이 과정이 ‘스케일업(scale-up)’이다. 한국 기업은 기민한 모방으로 성공담을 썼다. 글로벌 선도 기업이 축적한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지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해 제자리만 걷는다. 추격자 습속을 벗지 못한다. 이정동(56)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칼럼과 책을 꾸준히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다.

    이 교수와는 구면이다. 2019년 4월 그를 인터뷰했다. 제조업의 미래, 중국 위협론, 규제 문제 등에 관해 질문했다. 그즈음 그는 대통령경제과학특보였다. 경제과학특보는 전례가 없던 직책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에게 혁신성장에 관해 자문하기 위해 신설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가 쓴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에 감명받았다고 했다. 인터뷰 당시 이 교수는 문 전 대통령에게 “기술혁신에 관해 조언하고 있다”고 했다.

    그를 또 찾은 까닭은 기술과 안보가 얽히고설킨 최근의 현실이 자못 심각하다고 생각해서다. 미·중 패권 경쟁의 다른 말은 기술 신(新)냉전이다. 한국은 기로에 섰다. 신냉전의 포탄이 언제 어떤 식으로 날아들지 모른다. 고유한 전략 기술이 없으면 냉혹한 국제정치에서 ‘을’의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반도체·배터리를 빼면 전략 기술이 떠오르지 않는다. 반도체 수출이 급감하면서 경기둔화의 그림자까지 드리웠다. 판이 바뀌는데 출구는 흐릿해 보인다. 2월 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에서 만난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국에 반도체·배터리 말고 전략 기술이라 할만한 게 있긴 있나.

    “반도체와 배터리는 산업이고, 이를 구성하는 기술은 여러 가지다. 한국에 전략 산업이 있느냐, 전략 기술이 있느냐는 조금 다른 얘기다. 산업으로는 그 두 개가 눈에 띈다. 비중이 크니까 경제를 지탱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반도체와 배터리가 너무 많은 주목을 받는다.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에 세계 4~5위 제조업을 영위하면서 자동차·휴대폰·배터리·조선·플랜트·FDA(미국 식품의약국) 신약·전투기를 다 만드는 나라는 전 세계에 몇 없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정도다. 이 가운데 자원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3만5000달러를 만든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반도체와 배터리가 큰 산업이기는 한데, 그 산업만으로 3만5000달러에 도달한 건 아니다. 한국이라는 항공모함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반도체와 삼성전자 구분해야”

    높은 반도체 의존도가 한국 경제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반도체와 삼성전자를 구분해야 한다. 반도체 수출액이 –40%라 나오는데, 반도체산업의 위기가 기업의 재무제표에 반영된 결과다. 반도체산업은 잘나가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죽을 쑤는 게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두 회사가 워낙 잘하니 두 회사 실적과 반도체 업황이 구분이 안 된 상태다. 지금의 위기는 코로나19로 인한 영향이 후행해서 나타나는 결과다. 곧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럼 (반도체) 값이 또 오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월 1일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1월 반도체 수출액은 1년 전보다 44.5%가 줄었다. 지난해 8월(―7.8%) 이후 6개월 연속 전년 대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같은 날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9~12월)에 1조7012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분기 기준으로는 2012년 3분기 이후 10년 만에 적자다. 전날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4조3061억 원으로 2021년 4분기보다 68.95%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 중 반도체 부문(DS) 영업이익은 27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6.9% 급감했다. 이 교수가 말을 이었다.

    “노키아의 사례와는 다르다. 노키아는 (스마트폰) 산업이 떠오르는데 말아먹었다. 지금은 우리 기업들이 기술 리더십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반도체) 사이클 문제로 나타난 현상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아직도 긍정적으로 전망한다.”

    추격해 오는 후발주자들이 있지 않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쌓아놓은 제조 역량이 대단하다. 중국이 쫓아오기 쉽지 않다. 걱정을 안 할 수 없지만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다. 최근 반도체학과를 열심히 만드는데, 반도체학과가 반도체를 만드는 게 아니다. 물리학, 화학, 재료 전공자가 각기 있어야 한다. 모터 기술도 활용되니 전기과 전공자도 필요하다. 급하니 물리학, 화학 전공자들한테 ‘그런 거 하지 말고 반도체 해’라는 식인데, 지나친 위기의식이 잘못된 단기 대응으로 이어지고 왜곡을 낳는다. 한국이 반도체로만 먹고사나? 조선과 자동차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배터리도 배터리학과가 아니라 소재와 화학 전공자가 협업해 만든다. ‘펀더멘털한’ 인력을 골고루 키우고 융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너무 특화된 형태로 키우면 적응 역량이 떨어진다.”

    정부·여당은 ‘반도체 특별법’을 통해 시설투자 세액공제를 확대하겠다고 했는데.

    “차세대로 무얼 해야 할지 기업이 더 잘 아니까 투자 세액공제가 좋다. 정부는 민간을 뒷받침하는 인프라, 법·제도, 거버넌스를 조성하는 게 낫다. 굳이 정부가 R&D(연구개발)를 하겠다면 ‘차차세대’를 해야 한다. 기업이 들었을 때 갸웃거릴 수준의 R&D는 정부가 나서는 거다.”

    2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으로 불리는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으로 불리는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대안)이 가결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논문으로는 中이 美 추월

    밖으로는 중국 반도체가 위협이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 업체에 판매하지 못하게 하는 수출 통제 조치에 나섰다. 한국에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중국은 연구자 수는 물론 R&D 비용도 압도적이다. 한중 반도체 격차가 좁혀지리라는 우려가 여전한데.

    “D램을 포함해 한국이 잘하는 분야에서는 아직 격차가 있다. 돈으로 될 일이면 일찍 다 했지. 중국 축구와 똑같다.(웃음) 나보고 걱정하라면 중급(中級) 시장을 언급하겠다. 미국은 메모리건 비메모리건 중국이 첨단 제품 만드는 걸 막으려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기술이 첨단이 아닌 중간 단위에서 움직인다. 중국도 조금씩 전략을 바꾸는 것 같다. 미국이 저 난리를 치니까 ‘오케이, 첨단 안하고 중급 하겠다’는 거다. 중급은 (미국이) 안 막으니까. 중급 시장이 굉장히 크다. 프런티어 밑에 있는 시장에서 새로운 공정과 설계 기법을 만들면서 승부를 볼 경우 (중국에) 예상치 못한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한국도 중급 시장을 놓칠 수 없지 않나.

    “(고급과 중급을) 다 할 수는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 학술지 ‘과학과 공공 정책(Science and Public Policy)’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보니 중국 논문이 100개 들어올 때 한국은 3개 수준이라 언급한 내용(‘조선일보’ 인터뷰)이 인상적이었다.

    “국내 기관에서 분석한 결과로는 인용 횟수 상위 1%의 논문 건수로도 중국이 세계 2위다. 한국은 14위다. 다른 데서 본 통계로는 중국이 논문의 질로도 세계 1위였다. 1위건 2위건 추세로 보면 중국이 논문에서는 미국을 추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수치는 발표된 논문 기준이다. 투고된 논문은 아무도 통계를 잡은 적이 없다. 내가 맡은 학술지와, 내가 아는 다른 학술지 편집장들에게 물은 결과를 종합하면 중국의 투고 논문이 압도적으로 많다. 논문 게재 거절 사유를 듣고 나면 또 실력이 향상된다. 이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것이야말로 축적 아닌가.

    “그렇다. 이 과정을 통해 스케일업 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못 낼 것 같은데 또 낸다. 그런 점이 무섭다.”

    일각에서는 기술 신냉전에 살아남기 위해 국산화나 기술 독립을 주장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소재나 부품, 장비 국산화를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고 했다. 국산화가 만능열쇠는 아닌데.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한국이 다 하겠다고 하면 국회의원도 좋아하고 언론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이 세컨드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폐쇄적 기술 주권이 아니라 협력적 기술 주권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협렵적 기술 주권 하에서 경제안보도 강화된다. ‘네가 이걸 문제 삼아? 나는 이걸 문제 삼을게’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경제안보를 지킬 수 있다. ‘네가 문제 삼을 수 있으니 내가 직접 개발할게’라고 하면 기술 포트폴리오가 너무 넓어져 다 커버할 수가 없다. 독립이나 자부심 같은 단어와 연결되는 순간 지대 추구 구조에 빠질 가능성도 생긴다. 기술 주권을 지키려면 더 개방적이고 더 협력적으로 가야 한다.”

    “포항제철 지을 때 얘기”

    독일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왜 꺼냈나.

    “미국과 EU(유럽연합)는 TTC(무역기술위원회)를 한다. 여기서 나온 어젠다를 투영하는 곳이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다. 쿼드의 서브 커뮤니티 중 하나가 AI(인공지능) 커뮤니티다. 4명이 마주 앉아 ‘똑같은 거 하지 말자’며 역할 분담을 한다. 한국도 협력의 대안을 넓혀가야 한다. EU는 뜯어보면 남은 나라가 프랑스와 독일뿐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기술력 차이가 제법 벌어져 있다. 현재 EU의 ‘테크’ 리더십을 쥔 나라는 독일이다.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포트폴리오가 겹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스마트 팩토리 분야에서 한국과 독일이 협력하면 양쪽 다 덕 볼 일이 많다. 한국은 기계가 약하되 소프트웨어가 강하고, 독일은 IT(정보기술)는 약한데 기계가 강하다. 주고받을 게 많다.”

    과학기술이 국제질서의 중심에 놓이는 기정학(技政學) 시대다. 국수주의적 정치인들이 국산화 담론을 이용할 여지도 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무시할 수는 없는데, 유럽에서도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협력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논의가 나온다. 몇 년간 미·중 갈등 탓에 기술 주권에 대한 관심이 높고 (각국이 기술적으로) 독립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이것이 답이 아니네’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각국이 짝짓기를 한다. 쿼드도 그 일환이다. 중국의 경우 세계 인터넷 콘퍼런스(World Internet Conference)를 한다. 한국도 국가적 독립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이건 19세기 쇄국에 가까운 행보다. 큰일 날 일이다. 독립이라는 단어를 빨리 없애야 한다. 혼자 돌아다니면 국제 무대에서 물건 못 팔아먹는다. 협력하지 않으면 국제표준에 끼워주지도 않는다.”

    국산화나 독립에 대한 착시 효과가 강해 보인다. 옛날 신문을 보는 느낌도 나고.

    “옛날 신문이지. 포항제철 지을 때 얘기다.”

    그렇다면 G2 경쟁 구도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한국이 글로벌 밸류체인(가치사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깊이를 갖춘 영역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차세대나 차차세대에서 승부를 보던지. 우리가 상당한 규모로 산업 및 기술 기반을 갖춘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를 통과하지 않고는 안 될 만한 산업이나 기술이 무엇이 있을까 물었을 때는 솔직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기술 기반 벤처 스타트업에서 차세대와 차차세대 기술의 싹을 키워야 한다.”

    바이오산업의 미래는 어떤가.

    “국내에 수준 높은 바이오산업의 싹이 있다. 다만 아이디어 상태로 싸게 팔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SK나 LG가 갖고 있는 바이오 기업들이 스케일업 역량을 갖고 있다. 1980년대부터 바이오학과 많이 만들어놓고 정작 졸업생들이 갈 데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있으니 (대기업이) 스케일업만 해준다면 가능성이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2년 10월 28일 ‘국가전략기술 육성방안’을 발표하면서 △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첨단 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 △첨단 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AI) △차세대 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 등 최종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했다.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12대 국가전략기술에도 바이오가 포함돼 있더라.

    “바이오도 (아이디어 상태에서 끝날 게 아니라) 끝을 달려보는 게 중요하다. 백신도 아이디어는 많다. 끝까지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야 하는데 다 중단하지 않았나.”

    그러면 축적이 안 되는 셈이니….

    “그렇다. 비용이 더 들어도 완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누리호처럼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한번 쏴봤다는 게 중요하다. 그 역할은 민간이 못 한다. 국민의 삶과 관련된 기술은 설사 다른 데 위탁하더라도 경험을 갖고 위탁하는 것과 경험을 갖지 않고 위탁하는 것은 다르다.”

    “아카데미가 10만 개쯤 생겼으면…”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협렵적 기술 주권하에서 경제안보도 강화된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협렵적 기술 주권하에서 경제안보도 강화된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2019년 4월로 돌아가 보자. 대통령경제과학특보였던 그에게 ‘혁신성장은 단임 정부 안에 결론 내기 힘든 문제 아닌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당시 정부의 혁신성장이 포장지만 휘황찬란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혁신성장에서는 정부(의 차이)를 반드시 넘어서야 한다. 누구라도 승계, 발전시켜야 한다”면 “대통령 포함해서 우리 사회 의사결정 라인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산업 혁신의 문제에서만큼은 비정치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권이 교체됐으니 재차 물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바뀌면서 혁신성장에서도 단절선만 짙어 보인다.

    “오늘 읽은 논문에 따르면 역대 정부가 발표한 혁신성장 기술을 쭉 연결해 보니 거의 연속적으로 유지됐다고 한다. 이번에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국가전략기술도 2021년 12월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10개 기술에 2개를 추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2021년 12월 발표한 10대 필수전략기술에 △첨단 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을 추가하고 기존 △우주항공에 ‘해양’ 분야를 더했다. 12대 국가전략기술의 예산을 연평균 10% 안팎 증액해 앞으로 5년간 총 25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 교수가 부연했다.

    “1980~90년대에 GDP 대비 R&D 비율이 1~2%가 됐다. 지금은 4%대다. 대통령은 군인이었다가 민간인으로, 보수였다가 진보로 바뀌는데도 이 비율만큼은 계속 상승했다. 정부 예산 토의할 때 ‘다리 놓아라 마라’ 난리 치면서도 R&D만큼은 손대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던 거다. 지금 선진국 중에도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 수준일 때 들인 R&D 비용에 다다르지 못한 데가 많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한국을 두고 ‘초등학교 교사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R&D를 하겠다고 돈을 넣어?’라고 생각했겠지. 완전히 미친 짓이다.(웃음)”

    2025년에는 이공계 석·박사 과정 학생이 절반 이하로 감소한다는 조사(과학기술정책연구원, 2월 3일)가 나왔다. 과학기술 인재 감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한국에 유학 와서 내 밑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졸업 뒤에는 100% 자국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한국에 살면서 결혼하고 연구하면 본국서 갖고 있던 작은 인적 자원도 우리 자원이 된다. 미국의 첨단산업은 이민자가 이끌어간다. 오늘날의 기술은 1970년대 기술과 달리 모두 연결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뭘 해보겠다? 정말 낡은 방식이다. 전 세계 똑똑한 젊은이들이 첫 번째까지는 아니지만 두 번째 목적지로는 한국을 택하고 판교를 택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고급 인재 유치다. 이를 위해 지금의 상식을 벗어난 수준의 아주 획기적인 움직임을 취해야 한다.”

    흔히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초중고 시스템에 대한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진짜 문제는 신산업이 생겨도 다른 산업에 있던 사람들이 진입을 못 한다는 점이다. 반도체 인력이 없다고 하는데, 19세짜리를 키워 언제 써먹나. 최근 반도체산업협회에서 아카데미를 하나 만들었다. 반도체업에 진입하고 싶은 다른 업종 사람들을 (수강생으로) 받는다. 몇 개월간 날밤으로 집중 교육을 하면 현장 투입이 가능하다. 정부도 돈을 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돈을 낸다.”

    이 교수가 언급한 건 지난해 12월 1일 출범한 한국반도체아카데미다. 아카데미는 산업계에 필요한 현장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을 표방한다. 설계, 장비·부품·패키징 등의 분야에서 총 26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초대 원장은 이석희 전 SK하이닉스 사장이 맡았다. 이 교수의 말로 돌아간다.

    “그런 아카데미가 산업별로 10만 개쯤 생겼으면 좋겠다. AI만 해도 분야마다 쓰이는 방식이 다르다. 예컨대 언론홍보와 AI를 어떻게 접목할 것이냐에 대한 아카데미를 만드는 거다. 지금은 (평생학습이) 직업교육과 실업자 대책의 성격이 뒤섞여 있다. 레벨과 교육수준이 낮고 하이테크 분야는 없다. 주로 하는 일도 (실업급여) 부정수급 단속하는 것이다.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오염된 이유다. 23세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거대한 학교’가 필요하다. 학교의 연인원은 2000만 명이다.”

    2000만 명이면 대다수 성인을 포괄하는 셈 아닌가.

    “국내 상용 근로자 규모가 2700만 명쯤 된다. 2700만 명이 매해 다녀야 한다. 현재 교육정책의 초점은 30만~40만 수준인 19세에 맞춰져 있다. 돈을 수십조 원 쏟아부었다. 말이 안 된다. 그건 그것대로 하고, 나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베이비붐 세대(1차 1955~1963년생, 2차 1968~1974년생)가 은퇴를 시작했다. 한 해 100만 명씩 (고용시장에) 나온다. 친구들 보면 황당하다. 멀쩡히 대기업 임원 하고 나와서 완전히 막막한 거다. 재교육을 받아야 움직일 텐데 갈 데가 없으니 화산회에 간다. 화요일에 산에 다니는 모임.(웃음) 그들이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신동아’에서 국가적인 운동을 해줬으면 좋겠다.”

    세상은 ‘이정동’ 하면 축적과 스케일업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기자의 눈에 그의 활동을 관통하는 낱말은 평생학습이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신기술에 대한 학습 기회가 넘치는 나라처럼 보인다.

    “베트남 젊은이가 한국의 아카데미에서 6개월간 교육받고 퍼포먼스가 좋다면 왜 삼성전자에 입사하면 안 되나. 그러면 한국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게 아닌가. 주무 부처는 고용노동부나 교육부 말고 국무총리실이나 산업통상자원부가 맡아야 한다. 반도체학과 같은 걸 만들면 ‘대학이 기업의 인력 양성소인가?’라고 문제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정부가) 대학에 와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진짜 게임은 24세부터인데, 그들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공간을 펼쳐놓아야 한다.”

    로드맵 밖의 ‘다른(different)’ 질문

    그는 지난해 4월 책 ‘최초의 질문’을 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은 41쪽에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혁신 생태계에서 이렇게 로드맵 밖의 질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로드맵 밖의 ‘다른(different)’ 질문은 자기검열로 없애버리고 선진국보다 ‘더 좋은(better)’ 기술 개발에 집중한다. 탁월한 문제 해결자의 습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보다 먼저 읽어야 할 책 같더라.

    “잘 보셨다. 쓰고 보니 프리퀄이 됐다.”

    기존의 책에서 의도했던 바가 효과를 못 냈다고 생각한 건가.

    “어떤 리더가 명시적으로 내 책을 인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조직 구성원들로부터 ‘저런 사람이 어떻게 리더가 됐지?’라는 평을 받는 사람인데, 핑계 대기를 ‘시행착오 축적 중이니 기다려달라’ 했다는 것이다. 막연히 시간을 보낸다고 축적이 이뤄지는 게 아니다. 30년 차가 곧 고수는 아니다. 30년 차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 나훈아 씨는 계속해서 새로운 노래를 부른다. 쫄딱 망한다 해도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고수로 가는 길이 열린다. 시행착오가 도전하지 않는 리더들의 방패막이가 돼선 곤란하다.”

    시간만 허투루 보내는 일이 고수가 되는 길인 것처럼 오용된다는 얘긴데, 원인이 뭘까.

    “2000년대 이후 우리 산업이 글로벌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각 산업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많아졌다. ‘이 분야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산업에도 모종의 루틴(routine)이 생긴다. 신산업으로 변신해야 할 상황에서 축적이 아닌 퇴적이 나타난다. 책임은 산업계 리더들한테 있다.”

    전작들의 화제성에 비하면 산업계가 정말 달라졌나 싶은 생각도 든다.

    “젊은 친구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벤처 스타트업 피칭(pitching)에 가보면 대단한 친구들이 있다. 젊은 친구들이 뛰고 대기업이 스프링보드가 돼야 한다. 우리 대기업이 종합상사이던 시절, 지방에 있는 조그만 볼트 만드는 회사가 종합상사를 통해 물건을 팔았다. 대기업이 제2의 종합상사 역할을 할 때가 됐다. 시장을 이해하고 마케팅과 엔지니어링을 해결하는 건 아이디어와는 다른 문제다. 그에 필요한 많은 역량을 대기업이 축적해 왔다. 조인트벤처가 됐건 M&A(인수합병)가 됐건 여러 방식으로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의)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몇 년 전엔 젊은 세대를 두고 공무원만 꿈꾼다고 비판하더니, 최근에는 젊은 세대가 보상만 바란다고 낙인찍는 분위기가 있다.

    “(사회의) 인센티브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재 70살 된 사람들은 젊었을 때 안 그랬나. 1970년대 초반에 똘똘한 학생들이 서울대 전기과, 전자공학과, 물리학과 간 이유가 뭔가. 그때는 그 학과에 가는 게 사회적으로 숭상받았기 때문이다. (수능에서) 만점 받은 학생들이 의대 가는 걸 보면 진짜 가슴 아프다. 그렇다고 학생이나 부모를 욕할 수는 없다. 훌륭한 인재가 미래를 개척할 인센티브 구조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지, MZ세대의 품성을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나의 소명

    꾸준히 대중과 소통하는 이유는 뭔가.

    “내 연구 분야는 기술 진화의 원리다. 연구를 하는 긍극적 이유는 새로운 것이 창발되는 원리를 알아내고 싶어서다. 내가 쓰는 칼럼과 책은 기술 진화의 근본 원리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회사를 애플처럼, 자기 자신을 스티브 잡스처럼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를 찾았으면 한다. 이 원리를 전파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2019년 4월 인터뷰는 그가 꺼낸 두 문장으로 마무리됐다. 1시간 30분의 대화를 마치고나니 이번 인터뷰의 마무리로도 제격이겠다 싶다. “지금은 선진국 산업 중 우리가 잘할 것 같은 걸 뒤따라 하려 해도 중국이 더 잘한다. 이제는 ‘New to the World’, 전 세계가 안 해본 것을 해야 한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AI 시대에도 결국 ‘사상’이 중요하다

    “경기동부, 총선에서 최대 7석” [여의도 고수]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