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들어 금 간 74년 동업
한화·LG 참전으로 커진 판
지분율 차이 10→4%포인트 박빙
실적 뛰어난 최家 우세 점쳐져
3월 주총이 승기 향방 가늠쇠
그간 소유는 장 씨 일가가, 경영은 최 씨 일가가 맡아왔다. 지난해 8월 제3자 유상증자를 시작으로 균열이 생겼다. 두 일가는 각자 계열사를 동원해 고려아연 지분을 끌어모았다. 장 씨 일가의 우세로 10%포인트 가량 벌어져 있던 지분율은 4%포인트대로 좁혀져 박빙 상황이다. 우수한 경영 성과를 입증한 최 씨 일가가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승기를 가늠할 3월 주주총회에 이목이 쏠린다.
최家 3세 최윤범, 불을 댕기다
고려아연의 역사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해도 출신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는 함께 영풍기업사를 설립해 아연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석포제련소를 운영하는 영풍은 장 씨 일가가, 1974년 영풍의 계열사로 설립돼 온산제련소를 운영하는 고려아연은 최 씨 일가가 경영을 맡았다. 분리 경영 체제로 돌아가긴 했지만 상대 일가의 계열사 주식을 상호 보유했다. 예컨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가 영풍이고, 최 씨 일가의 ㈜영풍 지분도 20%에 육박한다. 이처럼 ‘한 지붕 두 가족’으로 74년을 지냈다.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왼쪽).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 [고려아연, 영풍]
지난해 8월 5일 고려아연 이사회가 ‘한화H2에너지 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두 가문 간 갈등설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당시 한화H2에너지 USA는 4717억5050만 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최 회장과 친밀한 사이로 알려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최 씨 일가에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장 씨 일가는 영풍의 계열사 코리아써키트 테라닉스, 에이치씨 등을 통해 고려아연 지분 0.58%를 추가로 사들이면서 맞불을 놨다. 코리아써키트는 영풍이 최대주주이자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장병희 창업주의 아들)의 장남 장세준 씨가 대표다. 장 대표는 영풍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8월 말~12월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아연 주식 총 11만여 주를 사들였다. 모두 장내 매수로 약 670억 원에 달하는 규모다.
그동안 최 씨 일가는 다시 한화, 이어 LG를 끌어들이며 판을 키웠다. 지난해 11월 11월 한화가 보유한 자사주 7.3%와 고려아연의 자사주 1.2%를 맞바꿨다. LG화학엔 자사주 1.97%를 주고 LG화학의 자사주 0.47%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다시 생긴다. 한화와 LG화학을 ‘우군’으로 확보한 셈이다. 이외에도 최 씨 일가는 한국투자증권, 세계 2위 원자재 거래 기업 트라피구라에 자사주를 넘기는 등 꾸준히 우호 지분을 늘렸다. 계열사 ‘영풍정밀’도 동원했다. 영풍정밀은 최창걸 명예회장의 부인이자 최윤범 회장의 모친인 유중근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최대주주다. 장형진 고문 등 장 씨 일가의 지분이 21%에 달하지만 최 씨 일가 지분이 30%대로 더 많아 사실상 최 씨 일가가 지배한다. 지난해 12월 27일 영풍정밀은 고려아연 주식 6만2056주를 장내 매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350억 원 상당이다. 공시된 취득 목적은 ‘지배권 강화’다.
겉으로 드러난 실적은 최 씨가 압도
경영권 쟁탈전 승자는 최 씨 일가가 되리라는 관측도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경영 실적만 보면 뛰어나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5년간 고려아연과 영풍의 실적을 비교하면 전자의 그것이 압도적이다. 매출액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추세다.2017년 고려아연과 영풍의 매출 실적 격차는 3조9940억 원, 2018년은 4조1459억 원으로 나타났다. 2019년엔 3조8708억 원으로 격차가 잠시 줄었지만 이듬해부터 다시 차이가 벌어졌다. 2020년엔 4조4188억 원을 기록하더니 2021년엔 5조8280억 원이 됐다. 2021년 고려아연 매출 실적은 7조1625억 원, 영풍은 1조3345억 원이다. 영풍 매출액은 고려아연의 18.6% 수준에 그친다.
영풍 관계자는 “고려아연과 영풍 간 실적 차이가 큰 건 맞다”면서도 “고려아연이 운영하는 온산제련소는 해안가인 울산에 있는 반면 영풍이 운영하는 석포제련소는 내륙인 경북 봉화군에 있어 입지적으로 불리하다. 온산제련소는 환경 규제도 덜하고 확장성도 더 좋다. 단순히 경영 능력 차이로 해석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해명했다.
3월 주총에서 판가름
현 이사회는 최 씨 일가로 기운 상태다. 지난해 주총에서 최윤범 사내이사 선임은 의결권 발행 주식 가운데 99.2%의 찬성을 얻은 반면 장형진 기타비상무이사 선임은 찬성률 83.5%, 반대 및 기권이 16.5%나 됐다. 성용락·이민호 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반대 및 기권이 각각 1.3%와 0.2%에 그친 점과 비교하면 장 씨 일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셈이다.
새 이사회도 최 씨 일가에 유리하게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고려아연 지분 8.75%를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이 ‘캐스팅보트’다. 두 일가 간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은 만큼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의 설명이다.
“국민연금공단의 투자 기준은 간단하다. 더 많은 수익, 즉 뛰어난 경영 성과를 통해 주주의 이익 극대화·기업가치 제고를 이룬 경영진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간 최 씨 일가가 경영을 맡아 더 나은 성과를 보인 만큼 국민연금은 최 씨 일가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장 씨 일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영진을 세우려면 이사회를 장악해야 한다. 가능성은 낮다. 지분율 차이가 미미한 상황이라 국민연금에 더해 소액주주들 가운데 일부만 최 씨 쪽으로 돌아서면 승산이 없다.”
최 씨 일가가 이사회를 장악하면 경영권 사수를 넘어 계열분리를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철강업계 관계자 A씨는 “최윤범 회장이 독자적으로 여러 신사업을 추진하려는 의욕이 강하다”면서 “현재와 같은 지배구조 상황에선 고려아연 경영에 장 씨 일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최 씨 일가가 경영권을 지킬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고, 지분 매입 목적은 계열분리로 보는 게 적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주근 대표도 “최 씨 일가가 계열분리를 염두에 둔 것 같다”고 분석했다. 2월 2일 최윤범 회장이 발표한 중간 배당 정책이 근거다. 박 대표는 “고려아연의 최대 주주가 장 씨 일가인 상황에서 배당을 강화하면 장 씨 일가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되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이는 종국엔 계열분리를 통해 자신들의 경영 성과, 즉 배당금을 최 씨 일가가 가져가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주주총회 이전에 주주 권익 제고라는 메시지를 던져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니 일석이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다만 계열분리 현실화는 쉽지 않다. 고려아연이 영풍그룹에서 분리되려면 장 씨 일가의 지분을 3% 미만으로 줄이고 임원의 겸임이 없어야 한다. 2월 13일 기준 고려아연 시가총액(10조6467억 원)을 고려하면 장 씨 일가가 보유한 지분 가치는 3조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최 씨 일가가 이를 매입해야 하는데, 만만치 않다. 또 장 씨 일가로서는 그룹의 ‘돈줄’인 고려아연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로서 배당 수익을 누려왔다. 영풍이 고려아연으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5년간(2018~2021) 2967억 원으로 전체 배당 수익의 97.2%를 차지한다. 같은 기간 영풍 당기순이익 합계(2059억 원)를 넘어서는 액수다.
변종만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고려아연 계열분리는 영풍과 장 회장 측의 의지가 중요하다. 영풍과 장 고문 측에서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을 정리해야 하는데, 추가로 지분을 매수한 것을 감안하면 앞날을 예상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영풍 측은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모양새다. 영풍 관계자는 “고려아연과 영풍은 오랜 동업 관계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협력해 왔고, 이는 지금도 변함없다. 양 일가 간 지분 매입은 단순한 경영활동의 일환이다. 회사 내부적으론 경영권 분쟁이나 불화 분위기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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