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지식한 사람, 타협 않는 감독 좋아한다
감정 따라 달라지는 ‘민낯’의 힘 믿어
영화 속 소희 같은 경험 한 신인 모델
어떤 작품이든 너덜너덜해질 각오
이젠 나를 많이 칭찬하려 해
다음 생엔 금손 가진 화가로 살아보고파
배두나는 “삶에서 연기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 20대 때처럼 일과 일상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여전히 달달한 걸 좋아해요. 실은 이미 많이 먹었어요. 깎은 과일을 잔뜩 싸 왔거든요(웃음).”
자신의 ‘비밀’을 들켜선지 배두나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 스타카토 같은 리듬이 청각을 들뜨게 하는 웃음소리, 패션모델 부럽지 않은 세련된 핏, 영화 속 유진과 달리 메이크업을 곱게 한 얼굴까지 가만히 뜯어보니 10년 전에도 이랬지 싶다.
2013년 우리는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매개로 만났다. 그때도, 지금도 배두나는 월드클래스 배우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다음 소희’를 보니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캐릭터에 몰입하게 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영화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간 18세 고등학생 소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서 다룬다. 배두나는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으로 후반부에 등장해 소희의 죽음을 파헤친다. 취업률 지상주의에 빠져 부조리와 악습을 되풀이하는 교육 생태계의 시궁창 같은 현실을 마주하며 유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터뜨리고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특유의 오라(aura)로 스크린을 압도하는 그의 열연은 보는 이들의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리얼하다는 평이 이어진다.
‘다음 소희’는 그가 정주리 감독과 ‘도희야’(2014) 이후 재회한 영화다. 지난해 5월 칸국제영화제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프랑스 비평가협회 소속 최고 평론가들이 참신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엄선하는 비평가주간에 한국 영화 최초로 폐막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상영 후 7분간 기립박수를 받고, 칸국제영화제로부터 “충격적이면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후 북미 최대 장르 영화제인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관객상 2관왕을 차지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세계 각국에서 뜨겁게 반응한 영화는 2월 8일 비로소 국내 극장에 걸렸다.
코로나 사태 없었으면 계속 몰아붙였을 것
배두나는 영화 ‘다음 소희’에서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는 형사 유진 역으로 열연했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예상했다. 하하하. 이 정도로 칭찬받을 줄은 몰랐지만 콜센터 촬영분을 보면서 반응이 괜찮겠구나 싶었다. 영화가 시나리오 그대로 나오고 있었고, 연기가 너무나도 리얼했다. 느낌이 좋아서 잘될 것 같았다. 이게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초년생은 누구나 겪는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인간보다 돈이 먼저인 세태를 누구나 느끼며 살기에 해외에서도 공감을 얻을 거라 생각했다. 빨리 편집해 여기저기 출품해 보라고 정주리 감독에게도 말했다.”
칸국제영화제에 갔나.
“일하느라 가지 못했다. 원래는 해외 영화제에 영화만 가면 된다는 주의다. 영화만 좋은 평을 받으면 되고, 많은 사람이 보면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는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칸 레드카펫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출연한 또 다른 영화 ‘브로커’도 칸에 갔다. 두 작품을 찍었는데 하나는 비평가주간 폐막작, 또 하나는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배우한테 이렇게 영광스러운 해가 또 있을까 싶다.”
발목을 잡은 일이 뭔가.
“미국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다. ‘레벨문’이라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칸에 초청될 때마다 미국 영화를 찍고 있다. ‘다시 소희’가 지난해 2월 28일 촬영이 끝났는데 그해 3월 3일 미국에 출국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하루라도 늦으면 안 된다고 해서 3월 3일에 갔다가 10월 말에 돌아왔다. 촬영을 계속 하고 있어서 시간을 빼기도 힘들고, 코로나19 감염 우려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신동아’와 대면 인터뷰는 ‘클라우드 아틀라스’ 이후 10년 만이다. 그동안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뭔가.
“영화 촬영차, 패션 쪽 일로 해외 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정신없이 10년을 보냈다. 심지어 코로나19가 확산될 때도 영화를 찍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그나마 요 몇 년간은 나름대로 집에서 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큰 변화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라도 쉬지 않았다면 나를 계속 몰아붙이고 있을 것이다.”
외적인 부분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없어 보인다.
“많이 변했다. 예전 사진 보면 눈꼬리가 요렇게 올라가 똘망똘망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려고 노력한다.”
영화 속 유진은 ‘생얼(민낯)’처럼 보였다. 여배우가 연기를 위해 미모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 아닌가.
“맞다. 생얼이다. 나는 생얼의 힘을 믿는다. 얼굴빛이 감정에 따라 달라진다.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차단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영화제 레드카펫이나 패션 행사에 갈 때는 엄청 꾸미는 걸 좋아한다. 다만 연기할 때만큼은 얼굴빛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의다. 메이크업의 힘이 필요한 캐릭터에서는 분장을 한다. ‘마약왕’에서 그랬고, ‘공기인형’에서도 인형으로 보이기 위해 전신 메이크업을 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클론 역을 할 때도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화장을 했다. 만약 내 마음을 들켜야 하는 작품이면 메이크업을 피한다. 반짝거리는 소품이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도 관객의 시선이 분산될까 봐 착용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 시선이 쏠리게 하기 위해서다.”
영화를 위해 ‘민낯’으로 연기한 배두나.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사회 초년병의 비애
관객의 시선이 눈에 쏠리게 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내가 옛날 사람이라 고지식하다. 스크린에서 배우의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으로는 그게 안 보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객은 분명 다 알 거라 여기고 내 눈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눈을 안 보면 왜 이렇게 연기가 불친절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번 작품에선 엄청 지쳐 보여야 해서 원래 갖고 있던 눈가 다크서클과 기미 같은 게 필요했다(웃음). 내가 가진 걸 다 이용했다.”
배두나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1998년부터 모델로 활동했다. 배우 데뷔작은 1999년 방영된 KBS 청소년 드라마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앞서 영화 ‘링’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연기에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거나 관심이 있진 않았다. “그저 용돈 좀 더 벌어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연기를 시작한 지가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었다. 거의 해마다 필모그래피에 작품을 올린 점도, 배우로서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놀랍다.
연예계에 데뷔한 후 계속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남이 모르는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나.
“당연히 있다. 때때로 겪는 것 같다. 벽에 부딪힌다는 생각은 굉장히 많이 든다. 세상이 다 내 맘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매년 한다. 그걸 다 수용하고 더는 기대를 안 하며 산다. 다행히 아주 심각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없다.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적은 별로 없지만 서러웠던 기억은 많다.”
의외다. 그게 언제인가.
“지금은 주변 사람 누구나 나한테 잘해 주지만 신인 때는 서러운 일을 종종 겪었다. 그런 기억이 남아 있어 촬영장에 가면 신인이나 한두 신 나오는 배우들에게 잘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잡지 모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되게 잘나가는 모델이어서 중철지에 들어가는 패션 사진을 여러 개 찍었는데 그때는 페이를 거의 회수하지 못했다. 페이를 잡지사가 아닌 내가 입은 옷을 만든 브랜드에서 줬다. 여기서 5만 원, 저기서 5만 원을 받아 내 페이를 채워야 하는데 브랜드에 요구하면 안 주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 악착같이 받아내는 언니들도 있었는데 나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새내기다 보니 주면 고맙지만, 못 받은 적이 많다.”
영화 속 소희 상황과 비슷하다.
“이번 영화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거라 자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난 ‘알바(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생각해서 심각한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소희와 유사한 일을 겪은 사회 초년병이 많을 거다.”
좋은 영화 만든다는 자부심
정주리 감독 작품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정 감독을 어떻게 평가하나.“말이 별로 없지만 한 마디가 굉장히 날카롭고, 가치관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존경스러운 분이다. 영화를 만들 때도 융통성이 없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노선을 끝까지 지켜낸다. 그런 면이 신뢰가 간다.”
‘도희야’에 이어 이번 영화에 출연한 이유가 뭔가.
“‘도희야’를 선택한 건 시나리오의 문체 자체가 우선 좋았다. 정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엄청 좋아한다. 여백이 많고 배우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명도 많지 않아서 헷갈릴 수 있는데 이런 시나리오를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다시 소희’ 역시 시나리오가 좋더라.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여전하구나 생각했다. 감독님이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알겠더라. ‘도희야’로도 칸에 갔었고 대중이 원하는 바와 타협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는 뚝심을 응원하는 마음도 작용했다. 기사나 뉴스를 보며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던 소재와 주제이기도 했다. 아이나 청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사건을 접하면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모로 내 취향이나 성향과 잘 맞아떨어져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10년 전처럼 지금도 ‘몰입을 잘할 수 있는 작품’을 고집하나.
“이번에도 잘 몰입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출연 결정을 도왔다. 다만 10년 동안 변한 게 있다면 이제는 몰입을 잘할 작품만 고집하지는 않게 됐다는 것이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더라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도전해 본 10년이었던 것 같다.”
소희가 갔던 가맥집에 유진이 두 번째로 갔을 때 낯빛이 무척 안 좋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촬영 전 엄청 울었다. 촬영할 때는 울지 않는다. 그 눈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울만한 일, 울만한 감정이라고 느끼도록 강요하는 것 같아 촬영하면서 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주리 감독이 특별히 주문한 사항이 있나.
“유진이 엄청 지쳐 있고, 엄청 어둡고, 한 일주일 동안 못 잔 사람처럼 보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감독마다 주문하는 스타일이나 범위가 다르다. 엄청 디테일한 선을 그려주는 감독도 있고 정주리 감독처럼 여백을 주는 분도 있다. 감독의 어떤 주문이든 충실히 따르려고 한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었던 점을 떠올린다면.
“어느 작품이든 감정이 너덜너덜해질 각오로 촬영에 들어간다. 이번 작품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다. 힘든 지점이 별로 없었다. 이제 이 정도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촬영 현장에서 마음이 되게 편했다. 스틸 기사, 의상 팀 식구 모두 ‘도희야’ 촬영을 함께 한 스태프들이다. 그분들이 옆에 있어 행복했고 좋은 영화를 찍는다는 자부심이 큰 현장이었다. 행복한 촬영이었지 절대 힘들지 않았다. 영화 속 유진은 감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배두나는 행복했다.”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춤 좀 추는 편인가.
“이번 작품을 위해 한 달 좀 넘게 배웠다. 춤에 소질은 없는 것 같은데, 춤을 잘 춘다고 마인드컨트롤하면서 그 장면을 찍었다. 친구들이 보면 웃을 것 같다. 원래 막춤밖에 못 춘다. 정 감독이 나를 센터에 세워 춤을 안 배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심도 있는 안무를 배워야 할 줄은 몰랐다. ‘유진이 이런 진지한 힙합 전사가 맞느냐’고 감독에게 물어봤다. ‘맞다’고 했다. 정 감독은 남이 춤추는 걸 보는 게 좋단다.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무조건 감독 위주
언론 시사회를 마치고 기자간담회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소희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소희를 위로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유진보다는 배두나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할 때 네가 떠나서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런 마음을 지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알게 하고, 많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많은 사람이 너를 애도하게 만들려고 노력은 했다. 여전히 답은 안 나오고 있지만 그게 내 마음이었다’고 말이다.”
드라마(‘비밀의 숲’ 시즌1과 시즌2)에 이어 영화에서도 정의로운 형사 역을 맡아선지 실제로도 그런 성격일 것 같다는 반응이 많다. 평소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정의의 투사 스타일인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투사 같은 역할을 하는 걸 좋아한다. 나와 비슷해서라기보다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살아볼 수 있어서 너무 고맙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난 불의를 보면 어떨 땐 참는다. 정주리 감독을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얘기를 거침없이 해서다. 너무 멋있는 분이다.”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 검사 역으로 열연한 조승우 씨가 다시 연기 호흡을 맞추고 싶은 배우로 배두나 씨를 꼽았다. 본인에게도 그런 배우가 있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연기 호흡이 잘 맞는다. ‘비밀의 숲’은 황시목 검사와 한여진 형사(배두나 분)가 쌍으로 나와야 시너지가 극대화되는 작품이 됐다. 한여진이 황시목을 돋보이게 하고, 황시목은 한여진을 돋보이게 한다. 둘이 만나 한 캐릭터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 조승우 씨한테 여러 면에서 감동받았다. 그분도 나처럼 고지식하다. ‘비밀의 숲’ 끝나고 그분이 사극영화 ‘명당’에 출연했다. 어느 날 만났는데 머리를 길렀더라. 왜 길렀냐니까 사극 분장 때문이라고, 뒤에 머리 올려서 상투 튼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기른 거더라. 그 지점에서 감동받았다. 많은 배우가 짧은 머리로 그냥 찍는다. 그런 고지식한 면, 배우로서 작은 디테일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정말 존경한다. 드라마 찍을 때도 되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 게 둘 다 내 연기보다 하모니, 앙상블을 중시한다. 신 자체가 관객이 부담스럽지 않게 연기자랑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른다. 얼마 전 조승우 씨 촬영장으로 커피차 보내면서 언젠가 꼭 다시 같이 하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동요 말고, 아파 말자”
배우로서 철칙처럼 지키는 나름의 원칙이 있을 것 같다.“일할 때는 절대 늦지 않는다. 항상 촬영하기 20~30분 전에 현장에 먼저 가 있다. 또 모니터는 감독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든 감독 위주로 한다. 감독이 오케이면 나도 무조건 오케이고, 감독님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좋았어도 아닌 거다. 헤어스타일 연출은 평소 내가 다니는 미용실이 아닌, 분장 팀이 데려가는 데서 한다. 모니터는 감독이 책임지고 각종 파트는 담당자가 책임지게 한다. 하하하. 그렇게 내 캐릭터를 모두 같이 만들게 한다. 촬영용 의상은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새 옷이 아닌 내가 입던 옷으로 대신할 때가 가끔 있다. 그때도 물론 의상 팀에 의견을 먼저 구하고 입는다.”
연기 말고 다른 일을 꿈꾼 적이 있나.
“없다.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다. 삶에서 연기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져서 인간 배두나는 계속 누워 있다. 집에서 누울 수 있는데 왜 앉아 있어 할 정도로 게으르다. 개인적 삶이 거의 없다. 20대 때는 안 그랬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일상도, 일도 즐겼다. 나이가 들면서 배우 생활에 힘을 더 쏟다 보니 균형이 깨졌다.”
최근 감독이나 화가에 도전한 배우가 많다. 그런 소식을 접하면 연출에 대한 욕심이 생기거나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원래 연출에 관심이 있어서 아닌가.
“바로 연기 전공으로 바꾸긴 했다(웃음). 20년을 연기해 보니 연출은 내가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화가는 정말 멋진 직업인 것 같다. 배우는 선택을 받아야 연기를 할 수 있는데 화가는 본인이 작가 역할도 할 수 있고, 연출자도 될 수 있고 배우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부럽다. 모든 세상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지 않나. 문제는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 금손으로 다시 태어나면 화가에 도전해 보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기자의 시그너처 질문을 던졌다. “살아가면서 방황하거나 흔들릴 때 마음을 다잡아 주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무엇이냐”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가 입을 열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내 좌우명은 ‘작은 찬사에 동요하지 말고, 큰 비난에 아파하지 말자’다. 아직까지 잘 지키면서 살고 있다. 다만 생활 태도가 바뀌었다. 전에는 겸손해지려고 나를 지나치게 다그치는 경향이 있었다. 찬사에 동요하지 않으려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 자신을 많이 칭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려 한다.”
배두나는 오늘도 영화의 일부분으로 어딘가에서 ‘고지식한’ 미덕을 발휘하며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또 영화 속 소희처럼 양심 없는 어른들 때문에 희생되는 아이들 걱정도 마음 한구석에서 떨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냉철해 보이지만 여리고,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웃기도 잘하는 이 여자가 앞으로 인생 노트에 써나갈 이야기가 벌써 궁금하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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