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은 거짓말쟁이” 김정은 密談
北·中관계 약화 노린 폼페이오 전략
김정은 발언, 北·中관계 변곡점 될 것
한반도 외교 새 길 찾을 기회
[Gettyimage]
1월 24일 출간된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의 회고록 ‘한 치도 내주지 마라: 내가 사랑한 미국을 위한 싸움(Never Give an Inch: Fighting for the America I Love)’. [동아DB]
北, 中 대신 美 택할 수 있어
김정은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리던 폼페이오 앞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북·중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충격 발언을 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충격적이다.첫째, 중국 지도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인식 속엔 북한 사회 내부에 있는 반중정서(反中情緖)가 반영돼 있다. 필자가 만난 다수 탈북인사 및 북한학자의 인식과 맥을 같이한다. 북한 지식인 상당수는 중국에 대해 반화사상(反華思想)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한국 사회의 반미사상과 비슷한 정서가 북한 사회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6·25전쟁 중 북한은 중국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지만 그 이후 전개된 북·중관계사 속에서 베이징은 평양에 대해 이른바 ‘갑질’을 했다. 또 6·25전쟁 기간과 그 직후에 중국군 지원사령관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갈등, 북·중 국경선을 최종 확정하는 과정, 한·중수교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누적됐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과정에서 북측 입장이 중국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자 북한은 공개적으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 바 있다. 김정은이 미국 관료 면전에서 중국을 비난한 것은 시진핑 체제에 대한 중대한 외교적 도발로 여겨진다. 김정은의 발언은 충동적 발언이 아니다. 중국에 대한 김일성·김정일의 부정적 인식을 이어받은 듯하다.
둘째, 주한미군이 북한 체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김정은의 인식이다. 김정은은 “북한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며 미국 지상군 및 전략자산 강화에 북한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1990년대 초 북한의 “주한미군 역할 변화를 전제로 주둔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같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의 리종혁은 “미군이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북한군 판문점대표부의 리찬복은 “주한미군 역할이 대북(對北) 억제로부터 한반도 전체의 안정자·균형자로 변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주한미군 관련 김정은의 주장이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발언은 1990년대 초의 주한미군 역할 변경론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주한미군이 있어서 중국으로부터 체제를 지킬 수 있다는 주장으로 논리가 발전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셋째,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대한 중국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정은의 “중국이 북한 지역을 티베트와 신장 지역처럼 다루려고 한다”라는 발언은 중국 지도부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신장위구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정책, 특히 인권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은 서방의 비판을 내정간섭이라고 규정하며 예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김정은의 발언은 중국의 내정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김정은은 북한 지역이 신장위구르처럼 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가 북한 지역의 신장위구르화를 막기 위해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다고 해석할 여지를 준다.
1월 24일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회고록을 통해 2018년 3월 30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나눈 밀담 내용을 폭로했다. [AP 뉴시스]
몰랐다면 참사, 알았다면 도발
차기 미국 대통령을 꿈꾸는 폼페이오가 소설을 쓸 리는 없다. 김정은의 발언은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발언이 회고록의 형태로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될 줄 짐작했을까. 몰랐다면 북한식 외교 참사이며 알았다면 중대한 도발이자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 셈이다. 즉 북한이 친중국가가 아닌 친미국가가 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김정은은 왜 그런 발언을 했을까. 폼페이오는 왜 김정은의 발언을 이 시기에 폭로했을까. 손자병법에 대입해 해석해 본다.손자병법엔 간첩을 활용하는 병법, 용간(用間)이 다섯 개로 나뉘어 설명돼 있다. 적국 사람을 유인해 활용하는 향간(鄕間), 적국 관리를 포섭해 활용하는 내간(內間), 이중간첩을 활용하는 반간(反間), 허위 사실을 전파하도록 하는 사간(死間), 허위 사실 유포 결과를 활용하는 생간(生間)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김정은의 내간계는 폼페이오가 그의 발언을 믿고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취할 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오와 트럼프 정부는 김정은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폼페이오의 借刀殺人
남조 송(宋)의 단도제(檀道濟)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삼십육계(三十六計)’ 가운데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방책이 있다.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폼페이오는 북·중관계에 치명적 손상을 주려는 전략으로 김정은의 발언을 폭로했을 가능성이 높다.폼페이오는 하원 의원 4선을 지낸 정치인 출신이다. 2017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거친 후 국무부 장관도 지냈다. 특히 CIA 국장이 되기 얼마 전엔 “북한 지도부를 음파·전자파·방사선으로 파멸해야 한다”고 초강경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CIA 국장으로서 북핵 문제와 러시아·중국 내부에서 진행된 CIA의 활동을 트럼프에게 인상 깊게 브리핑한 것이 국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계기가 됐다는 설도 있다. 이는 그가 외교보다는 CIA 국장의 시각, 공작적 안목으로 북한 내부를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혈맹적 북·중관계를 약화시켜야 대북제재 효과를 높이고, 북핵 폐기 등 미국의 한반도 전략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2018년 6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고 있다. [동아DB]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내하면서 북한에 대한 경제적·외교적 지원을 해왔다. 그런데 김정은이 ‘거짓말쟁이’ ‘북한의 티베트화’ 등의 발언으로 시진핑의 역린을 건드렸다. 시진핑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발언의 진의와 관계없이 분노할 것이다. 이는 외교적 불신으로 이어져 북·중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북·중관계에 생긴 내상이 중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이제 알았다면…
2018년 3월 30일 김정은과 폼페이오의 만남 이후 북·미관계는 같은 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개선됐다. 폼페이오를 활용한 김정은의 내간책이 상당 부분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한국 정부와 일절 사전 의논 없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라는 선물을 줬다.싱가포르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평화체제 논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 송환에 합의했다. 이후 실무 회담과 두 차례 추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 즉 북한에 속았음을 알았다. 김정은 역시 폼페이오를 활용한 내간계가 더는 작동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이것이 김정은-트럼프 관계의 전말이다.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은 북한 내 대표적 친중 인사로 꼽혔다. [동아DB]
첫째, 북·중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상황이다. 중국 당국이 김정은 체제와 북한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분리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다. 북한 체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유지해 영향력을 확보하되, 김정은 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유보하는 것이다. 유엔 제재를 구실로 삼아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줄일 가능성도 있다. 둘째, 그럭저럭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상황이다. 중국이 미·중 갈등의 큰 틀에서 북한과 김정은 체제를 계속 두둔하며 지금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다. 셋째, 미국의 북·중관계 약화 전략을 막기 위해 이전보다 더 전폭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경우다.
첫째 상황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시 말하지만 폼페이오의 회고록이 소설일 리 없기 때문이다. 폼페이오는 회고록을 발간하기 이전에 북한과 중국의 대처에 대비해 녹취 등 관련 자료를 꼼꼼히 확인했을 것이다.
폼페이오가 준 기회 활용해야
지난해 8월 폼페이오는 한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윤석열 대통령을 예방해 북핵 문제와 한반도 안보 상황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폼페이오와 김정은이 나눈 대화 내용이 윤 대통령에게 전달됐을 것으로 사료된다.지난해 필자는 폼페이오가 참석한 포럼에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그는 포럼에서 한반도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통일 전략에 대해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필자는 토론자로서 그에게 네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난 싱가포르 회담에서 결과적으로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둘째, 문재인 정부의 북한이탈주민 강제 북송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가. 셋째, 대만 안보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무엇인가. 넷째, 한국의 독자적 핵 보유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폼페이오는 답을 피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트럼프 정부는 비핵화 약속을 이끌어냈지만 곧 북한이 이를 지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북한의 내간책에 트럼프 정부는 혼란을 겪었는데, 시간이 흘러 폼페이오가 회고록을 통한 차도살인으로 북·중관계에 엄청난 돌직구를 날렸다.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오른쪽)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 회담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다. [아사히신문]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신동아 3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