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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읽은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 하나가 나를 그렇게 살도록 했다. “시 하나 제대로 쓰기에도 인생 100년은 너무도 짧다.” 오늘에 이르러 나는 정말로 시를 제대로 쓰면서 일생을 살았는지 반성하는 바가 없지 않다. 어차피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엎질러진 물은 엎질러진 물이다.
인생이란 문틈으로 본 것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라 감격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스물세 해나 지나서 올해가 2023년. 벌써 많은 날이 흘렀다. 흔한 말이고 헤먹은 말이지만 “세월이 유수 같다” “세월이 쏜살같이 간다”는 말을 실감한다. 세월 앞에 가장 뜨끔한 말은 ‘장자’에 나온다는 ‘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이란 말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인생이란 문틈으로 흰 망아지 한 마리가 달려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아, 나는 문틈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흰 망아지를 분명하게 본 일이 있는가? 아니면 희끗한 어떤 자취만 보았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았는가? 이제 내 나이 78세. 아무래도 적은 나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나이가 됐다. 조금만 더 나이가 적었더라면 해외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도 했으리라.
하기는 코로나19가 처음 번지던 2020년 1월에 아프리카 탄자니아 여행을 계획한 일이 있었다. 한 출판사로부터 사막을 주제로 한 시집 출간 제의를 받고 이미 다녀온 아시아의 사막과 미국 사막의 시에 아프리카 사막을 둘러보고 그 소감을 적은 시를 보태어 시집을 내자는 의도였는데 그만 보기 좋게 출발하기도 전에 망가지고 말았다.
그렇다. 젊은 시절 같았으면 새해가 되고 새봄이 오면 해외여행을 꿈꾸는 것이 가장 신나는 일이고 해보고 싶은 일일 것이다. 그 밖에도 젊은이들은 새로운 직장을 꿈꾸기도 할 것이고, 사랑하는 상대가 있다면 결혼을 소망하기도 할 것이고, 사업을 하는 분이라면 새로운 제품 생산이나 새로운 사업 계획에 골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새해가 되고 새로 봄이 와도 새롭게 꿈꾸거나 가슴이 울렁이거나 신나는 일이 도무지 없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해 벽두부터 새로운 책이 두어 권 출간됐다. 50권째 창작 시집이 출간됐고 사랑을 주제로 한 400페이지가 넘는 사랑 시집도 출간됐다. 또 무슨 책이 어떤 출판사에서 나올지 모른다. 하여튼 올해도 이곳저곳 출판사에서 여러 종류의 내 책이 나올 것이다.
이제 책을 내는 일은 나의 문제가 아니고 출판사의 일이고 독자의 문제다. 나는 거기에 수동적으로 따르면 된다. 무슨 말인가? 독자들이 내 책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기에 출판사들이 내 책을 내는 것이고 나는 그에 따라 수동적으로 호응한다는 말이다. 이것도 소통이고 응원이고 공감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노력이면서 그 결과다.
이제 우리는 혼자서 자기 의도대로만 사는 세상을 고집할 수는 없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아파해야 하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리하여 함께 멀리 길을 떠나야 한다. 서로 위로가 필요하고 축복이 있어야 하고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럴 때 나는 독일의 메르켈이라는 여성 총리가 16년이나 머물던 총리직에 물러나면서 했다는 말에 귀를 준다.
‘멍때리기’가 절실한 이유
“앞으로도 세상을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볼 것을 추천한다.” 정말로 그것은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아니 전 세계적 인류적으로 자기의 입장만을 고집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살 때가 됐다. 이 세상은 오직 한 사람의 ‘나’와 그 나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너’로 구성돼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가장 소중한 존재인 내가 잘살고 좋아지기 위해서는 너의 협조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그래서 너에게 잘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따스하게 섬겨야 하고 부드럽게 모셔야 한다. 내가 먼저 자청해 그래야 한다. 그 길만이 살길이고 그 길만이 좋은 방책이다. 섬김과 모심, 그것은 인간사 모든 것을 초월해 아름다운 나의 행위이고 나의 활로이며 나의 방책이 돼야 한다.
새해가 되고 새봄이 돼 왜 개인적으로 할 일이 없고 나 나름대로 가슴 설레는 일이 없겠는가!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새로운 문학관을 짓고 개관하는 문제가 난제로 앞에 와 있다. 현재 내가 충남 공주 시내에서 운영하는 풀꽃문학관은 정식으로 인가된 문학관이 아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고 기준 이하라서 그렇다. 문학관 협회에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관광객이 아주 많이 찾아온다.
“왜 힘든 날 멀리서 오셨는가?” 물어보면 고달파서 왔노라는 것이 그들의 답이다. 여기서 고달픔은 몸의 고달픔이 아니고 마음의 고달픔이다. 이것이 문제다. 마음의 고달픔. 이것이 정말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래서 먼 곳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자 함이요, 위로받고자 함이요, 휴식을 얻고자 함이다.
이런 제반 분위기를 뭉뚱그려 요즘 사람들은 ‘힐링’이라고 말한다. 오죽했으면 ‘멍때리기’가 유행일까! 멍. 이때의 멍은 ‘멍하다’란 형용사의 어근으로서의 멍이다. ‘멍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이렇다. ‘1.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 2. 몹시 놀라거나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얼떨떨하다.’ 그런 멍을 요즘 사람들은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놀멍축제’를 벌인 지자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장소를 골라 거기에 많은 사람을 불러 멍하니 앉아 있게 하는 것이 축제이고, 이른바 놀멍축제라는 것이다. 그만큼 요즘 사람들은 지쳐 있고 또 심정적 여유를 원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들판이 넓은 고장에 들판을 바라보는 쪽으로 넓은 창을 내고 ‘들멍카페’란 이름의 찻집이 생기고 거기에 많은 사람이 소문 듣고 찾아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요구하지 않기’와 ‘거절하지 않기’
해마다 나에게는 1월과 2월이 쉬는 달이고 몸이 아픈 달이고 새로운 책을 쓰는 달이다. 그 두 달을 보내고 학교에서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국 곳곳의 학교나 지자체나 도서관에서 나를 불러 강연을 시킬 것이다. 그러면 나는 힘든 몸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그 모든 곳을 찾아가리라. 요구하지 않기와 거절하지 않기가 나의 생활신조이므로 올해도 부디 그 신조가 잘 지켜지기를 바란다.몇 년 동안 짓는다 짓는다 하면서 미루고 또 미룬 ‘나태주풀꽃문학관’ 신축공사도 올해 전반기엔 기어코 시작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문학관 건물이 새롭게 아름답게 지어지는 것이 올해 나에게 급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고 가슴 들뜨게 하는 일이다. 새로 문학관이 지어지면 거기에서 전국으로부터 온 관광객들을 모셔놓고 문학 강연을 하리라.
그때는 내 몸이 더 늙고 말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가 있어야 하는 것이 시인이고, 독자들이 요구하면 언제라도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시인인 것을 내가 모르지 않으므로 목숨 붙어 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고 다하리라.
나태주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 등단
● ‘풀꽃’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外 시집 다수 출간, 산문집 그림시집 동화집 등 150여 권 출간
● 소월시문학상, 흙의 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外 수상
● 충남 공주 ‘나태주풀꽃문학관’ 설립·운영, 풀꽃문학상 제정·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