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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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속으셨습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살며시 물었다.
“이번엔 진짜라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연암 어른께선 별고 없으신 게 맞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솥 안의 상태를 점검한 말년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 앙큼한 필덕이에게 다시 속으셨지요? 아까 신나서 나가며 휘파람까지 불던걸요.”
한숨을 몰아쉰 내가 뒷짐을 진 채 말년이 주변을 어슬렁대자 그녀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어서 안방으로 들어가세요. 어르신께서 친구 분들과 술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태 나를? 술도 잘 못하는데 그냥 여기서 뭉개다 천천히 들어가련다.”
슬쩍 날 올려다본 말년이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러다 벌주만 더 늘겠어요. 언젠가처럼 대취해 업혀 나오기 싫으시면 빨리 들어가세요! 자꾸 계집종 옆에 맴도시면 헛소문 새나갈지 알게 뭐냐고요?”
껄껄 웃어젖힌 내가 말년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며 대답했다.
“예끼! 내 이미 성가한 어엿한 가장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의 상전인데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벌떡 일어선 말년이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대답했다.
“그럼 쇤네가 계집으로 안 보인단 말씀이세요? 저도 곧 열여섯 살이에요! 좋은 데 시집가고 싶단 말이에요!”
당황한 내가 말년이를 구슬리며 이리저리 애를 쓰고 있을 때, 마침 필덕이가 멀리서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천천히 다가온 그녀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어르신께서 시키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안방에 계신 아버님 들으실까 화를 낼 수도 없어 필덕이를 노려만 보고 있자 말년이가 심사가 꼬였는지 볼멘목소리로 말했다.
“필덕이 년한테는 그리 잘도 속으시면서 왜 꼼짝도 못 하세요? 왜 허구한 날 저만 닭 모가지를 비틀어야 되느냐 그 말인 거죠. 필덕아, 네년도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을 해봐라!”
평소부터 일 같지도 않은 작은 일들로 서로 티격태격하는 둘로부터 서둘러 벗어난 나는 떠들썩한 안방 쪽으로 움직였다.
자꾸 잔치 벌이는 연암
술에 취해 비틀대며 방에 들어선 내가 간신히 잠자리에 들자 아내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아버님께선 손님들과 밤을 꼬박 새우실 요량이신 게죠?”
취기가 올라 혀가 꼬인 발음으로 내가 겨우 대답했다.
“병세가 좋지 않으신 게 분명한데도, 저러시니 난들 어쩌겠소? 자네도 할 만큼 했으니 편히 주무시오. 내일 꿀물이나 일찍 들입시다.”
몸을 자꾸 뒤척이던 아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필덕이가 또 당신을 속였다고 들었어요. 자꾸 종들에게 얕보이시면 안 됩니다. 우리 집안 체통이 뭐가 되겠어요?”
아내 어깨를 토닥이며 내가 대답했다.
“아버님 성품 잘 알지 않소? 원래 상것들과도 위아래 없이 막역하시지 않소? 우리 집안 가풍이라 여겨주시오.”
“하지만 당신 친구들은 또 어찌 생각하겠어요? 걸핏하면 아버님 위독하시다는 거짓말을 전하는 종들이 들이닥치니, 속으로 놀리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부스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은 나는 창문을 반쯤 열어 청량한 가을바람을 들인 뒤 천천히 속삭였다.
“살아 계신 아버님을 모실 날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소.”
놀란 눈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아내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리 혈기왕성하게 며칠 밤을 이어 잔치를 벌이시는 분이신데?”
방바닥에 놓인 사발을 집어 냉수를 들이켠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저건 다 이별의 인사 같은 거요.”
“이별 인사요?”
“그렇소. 몇 년 전 양양부사를 그만두실 때부터 묏자리를 보러 다니셨거든. 그리고 올해 초부터 잔치 벌이시는 횟수가 부쩍 잦아지지 않았소?”
“한 달에 한 번은 꼭 그러시는 것 같아요.”
“언제 갑자기 떠날지 알 수 없으시니, 시간을 아껴가며 많은 벗과 마지막 정을 나누시려는 것 같소.”
“그게 왜 꼭 술과 함께여야 하는 건가요? 좋은 약재와 의원을 쓰면 수명이 늘어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내를 그윽이 바라보던 나는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달 성균관 벗들과 삼청동천에 소풍 갔다 급히 귀가했던 날을 기억하시오?”
“그럼요! 그날도 필덕이가 쫓아가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며 다짜고짜 당신을 끌고 왔잖아요?”
피식 웃은 내가 대답했다.
“그날은 용케 새벽까지 술을 버텨냈잖소?”
“당신답지 않게 밤을 새우고 아침 반주까지 모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 아침, 손님들 모두 떠나고 아버님과 단둘이 나눈 말들이 있소.”
“네 형 가끔은 만나고 있니?”
불콰하게 취하신 아버님께선 찬란히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반주 삼아 아껴두셨던 홍로주 한 잔을 시원스레 들이켜며 물으셨다.
죽음이라는 놀이
“네. 가끔 만납니다. 형수 돌아가신 뒤론 더 쓸쓸해하는 것도 같고.”대답하는 내게 잔을 건네 가득 따라주신 아버님께서 말을 이으셨다.
“너희 큰아버지, 그러니까 희원 형님도 홀아비 인데다, 그분께 양자로 들인 네 형 종의마저 홀아비가 됐어. 비록 형님에게 입적시켰다만 종의의 아내는 내 맏며느리나 마찬가지였다. 집안 종부가 사라진 셈이지. 종채야, 무슨 말인지 아니?”
차오르는 취기를 누르며 난 겨우 대답했다.
“집안 운명이 제게 달렸다는 말씀 아니신지요?”
고개를 약간 숙이신 아버님께선 내가 건네는 잔을 받아 쥐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마저 네 어미를 오래전 잃었으니 집안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부디 어서 자식을 낳아 이 집에 온기를 불어넣어라. 살아서 그 녀석들을 볼 순 없겠다만, 마음속에선 이미 오뉴월 봄바람처럼 살랑대며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 같구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처음으로 아버님께서 약해지셨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 생각을 읽으신 양 아버님께서 기운찬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종채야, 벼슬은 하지 마라. 하더라도 높이 오르려 마라. 나처럼 조정과 거리를 둬라.”
“왜 그래야 합니까?”
수염을 몇 차례 쓰다듬으신 아버님께선 언제 그 많은 술을 드셨냐는 듯 형형한 눈빛으로 대답하셨다.
“세상에서 온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따뜻한 정이 없다는 건 뭘 뜻하는 걸까?”
“뭘 뜻하는 것인지요?”
“식었다는 거야! 차갑게 식은 거지.”
“체온이 식었다는, 그런 뜻인지요?”
“그래. 죽었다는 거야. 사람이 죽으면 몸부터 식는다. 차가워지지. 세상도 똑같아. 죽어갈수록 체온이 식다가 마침내 차가워지지.”
“조선이 죽고 있습니까?”
야릇한 미소를 띤 아버님께선 쉽게 대답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홍로주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당신께서 마침내 입을 떼셨다.
“조선은 죽기 직전이다.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바꿀 순 없겠습니까? 그 운명?”
고개를 가로저으신 아버님께서 침통하게 대답하셨다.
“잠시 연명이야 할 수 있겠지. 한 번 생겨나면 한 번은 사라지는 게 우주의 생리 아니겠니? 사람이 태어나 결국은 죽듯이, 모든 건 시한이 정해져 있다.”
우울하게 바닥을 바라보는 아들이 가엾으셨는지 아버님께서 덧붙이셨다.
“난 요즘 죽기 전에 마음껏 노는 중이야. 죽는 게 왜 꼭 슬퍼야만 하지? 양껏 살다 명을 채우고 떠나니 즐거운 일 아니냐? 살아서 맺은 인연들과 다른 악업 쌓지 않고 떠나게 됐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 죽음은 누구나 당연히 가야 할 정해진 여행이다. 울고불고할 일이 아니야.”
“아버님과 더 오래 함께하고 싶습니다.”
“잘 들어라. 내가 죽고 나면 너에게 자식이 태어날 거야.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태어나는 거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죽어야 다른 게 태어난다. 세상이 죽어간다면 그걸 억지로 막으려 말고 나처럼 즐겨라. 그래야 새로운 게 태어나지.”
허생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물끄러미 내 눈을 바라보며 아내가 가늘게 속삭였다. 바람이 차 창문을 닫으며 내가 말을 이었다.
“머잖아 세상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질 거요. 아버님께선 그걸 탄생의 고통이라고 하셨소.”
“뭐가 탄생하는데요?”
“나도 잘 모르겠소. 인력이 감당할 일이 아니니 자중자애하라고만 하시더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잖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아내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어서 아이를 낳긴 해야겠어요. 아버님 살아 계실 때 후손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상냥한 아내의 얼굴이 창호지에 스며드는 달빛에 더욱 곱게 보였다. 그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내가 말했다.
“지금 저 안방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손님들 중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소.”
호기심에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아내가 급히 물었다.
“누군데요?”
목소리를 잔뜩 낮춘 내가 속삭였다.
“아버님께서 쓰신 글 가운데 허생 이야기가 있지 않소? 그 글에 나온 허생이 지금 저기 있소.”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아내가 물었다.
“그건 소설이잖아요? 허생이 있다면 이름이 허풍일 거라며 사람들이 웃었잖아요? 그런데 안방에 그가 와 있다니, 당신 많이 취하신 거 아니에요?”
고개를 크게 저은 내가 말했다.
“물론 지금 꽤 취한 건 맞소. 하지만 분명 그가 하는 얘길 들었고, 아버님께서 그를 허생이라 부르는 것도 틀림없이 이 귀로 들었소.”
“우리 집에 워낙 장안의 괴짜들이 많이 몰려오잖아요? 아버님께서 사귀시던 예인 아닐까요?”
아내 말을 듣다 보니 그 또한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허생이 한 말은 비범해 시정의 예인 따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 그에게 들은 얘길 자네에게 해볼 테니 들어보겠소?”
재화복덕 평등세계
“미래란 본디 불경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미륵 부처가 바로 미래 세계의 부처지요. 그러니 제가 말하는 미래세계는 미륵이 꿈꾸던 대평등계일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스스로를 허생이라 소개한 자는 밤늦도록 벌어진 말의 잔치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님을 좌장으로 떠받들던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는 자기 의견을 펼치는 데 어떤 거침도 없었고 때로는 너무 엉뚱해 위험해 보였다. 그는 이렇게 떠들기도 했다.
“사해가 절대 평등하다는 말을 잘들 알고 계시지요? 알고나 떠드는 걸까요? 사해가 어찌 평등합니까? 평등이란 무궁무진한 우주의 인연 운동, 흔히들 연기법이라 하는 그런 거대한 관점에선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사바세계의 움직임이 과연 절대적으로 평등할까요? 평등하다면 선택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뜻일 뿐입니다. 따라서 평등계는 각자 자기가 자기 삶의 임금으로 사는 세계인 거지요. 우리 모두가 왕이라 그겁니다! 한데 왕은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자기 힘으로 삶을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신하나 종들에게 의지해야 살 수 있다면 그건 노예지요.”
좌중의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모두가 왕이 되는 세상, 자기가 자기 삶을 책임지는 세상이 그대가 말하는 미륵의 미래평등계인 건가?”
팔짱을 낀 채 상대를 지긋이 노려보던 허생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각자 결정해 힘껏 살아보는 거지요. 그러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기회는 또 올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만의 무늬와 색깔로 자유자재한 삶을 사는 겁니다.”
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
“모두 왕이 되겠다고 하면 어쩌오? 왕이 둘이나 셋이 될 수는 없는 법 아니오?”
히죽 웃은 허생이 즉시 대답했다.
“돌아가며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머쓱해진 허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은 바뀝니다. 지위나 자리가 힘을 만들어주는 시대는 곧 끝납니다.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이 가장 중요해지는 거지요. 뭐가 능력을 증명할까요? 양반님들이 가장 천하게 여기던 것, 바로 돈이 능력이라 이겁니다. 돈만 있으면 연경에 땅도 살 수 있고, 그 땅에 상점을 지을 수도 있으며, 상점으로 번 돈을 재화로 바꿔 조선으로 가져올 수도 있겠지요? 조선에 왕이 있다한들 그만한 힘을 지닐 수 있을까요? 다들 모른 척 위선을 꾸며내고 있지만, 돈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누군가 이 엄청난 힘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슬기롭게 다룰 줄 아는 자들이 번갈아 왕을 하면 되는 겁니다.”
처음 질문했던 자가 다시 물었다.
“돈을 잘 다루는 누군가가 그 힘으로 왕이 돼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게 진시황제가 아니면 뭔가? 천하에 무식한 상것 중 하나가 돈 버는 재주 하나로 왕이 됐다 치세. 그게 지옥이 아니면 뭔가?”
허생이 목소리를 낮춰 천천히 대답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돈은 한 사람에게만 모이질 않습니다. 돌고 돌며 또 돕니다! 그래서 돈이지요. 돈을 잘 벌며 동시에 왕 노릇도 잘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쨌든 운세의 수레바퀴는 돌고 또 돕니다. 다 같이 평등하게 그 바퀴에 올라탈 기회를 부여받는 거지요. 이것이야말로 재화복덕의 상대적 평등계이며 미륵부처가 현세 다음에 만들어놓은 미래세계입니다. 우주법계의 절대평등계는 인연법 너머에서 유희하는 더 높은 단계지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논할 일이 아닙니다.”
미래에서 온 사나이
“어머 기이해라! 허생이란 그분이 했다는 말이 놀랍고도 해괴합니다. 그런데 묘하게 깨달음을 주는 것도 같아요.”아내가 안방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자네도 가학이 깊어서인지 세상 물정을 짐짓 잘 아는 것 같소?”
내 가슴을 슬쩍 밀치며 아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어려서부터 친정아버님으로부터 제법 많은 걸 배웠어요. 지금은 시아버님이 되셨지만 한때는 연암 선생님 글도 곧잘 읽고 꽤 이해했답니다.”
결국 나와 아내는 잠들지 못하고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야 말았다. 그러는 도중 술이 차츰 깨버렸고 내친김에 아내를 도와 아침 해장국을 끓이는 걸 도와주고 싶었다. 부엌에 들어서자 아내에게 한소리 들은 듯한 필덕이가 분한 표정으로 큰 솥에 육수를 들이붓고 있었고, 아내와 말년이는 커다란 상에 밑반찬들을 진설하고 있었다. 다진 양념을 솥에 부어 넣은 내가 대파를 썰려 하자 아내가 만류하며 말했다.
“이런 건 손님들 없을 때나 하세요. 어서 안방으로 가서 형편이 어떤지 살피고나 오시고요.”
힐난하는 듯한 낯빛으로 날 쏘아보던 말년이가 퉁명스레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벌써 몇 분 가시는 것 같던데요. 잘못하단 이걸 우리가 다 먹어야 할 판이에요.”
서둘러 안방으로 간 나는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손님 대부분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버님께서 젊은 손님 둘과 남들이 잠에서 깰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긴한 얘기를 속삭이고 계셨다.
“종채 왔구나. 아침 준비는 다 됐니?”
날 발견하신 아버님께서 밝은 표정으로 물으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님 숫자를 헤아리던 내가 조심스레 여쭸다.
“한 분이 모자랍니다. 귀가하신 것인지요?”
그제야 손님들을 쭉 둘러보시던 아바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허생이 안 보이는구나. 소피보러 갔나 했더니 아예 가버린 게로군.”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닫으려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여쭸다.
“그런데 아버님. 허생이란 분, 어디 사시는 분이신지요?”
날 멀뚱히 바라만보시던 아버님께서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리시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하셨다.
“모른다.”
나 역시 아버님을 한참 바라만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
“모르신다고요?”
천천히 고개만 끄덕이신 아버님께서 이상한 표정으로 웃으시더니 젊은 손님들을 둘러본 뒤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미래에서 왔다는 건 안다.”
갑자기 젊은 손님 둘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아버님께서 익살맞은 음성으로 덧붙이셨다.
“자유자재한 재화복덕 평등세계에서 왔다 하지 않았니? 그게 우리 미래 아니냐?”
가회방 벽돌집은 아버님께서 손수 지으신 것이다. 한양 북촌 어디에도 비슷한 집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가끔 집을 구경하러 들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자랑스레 집안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즐거워했다. 그런 그녀도 첫째가 태어나자 몸이 무거워져 안방에만 누워 있기 일쑤였다.
아내를 대신해 집을 소개하는 일을 맡은 건 말년이었다. 같은 동네 머슴에게 시집간 그녀는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속량해 주셔서 자유로운 신분이었는데도 매일 집안일을 도우러 들르곤 했다. 어떤 때는 벼슬 없이 놀고 있는 내게 타박을 일삼기도 했지만 계집종치고는 꽤나 의리가 있었다.
말년이가 우리 집의 특이한 구조와 그 과학적 의미에 대해 손님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면 여전히 노처녀 신세로 우리 집에 기식하고 있던 필덕이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표정으로 그 주변을 서성거리곤 했다. 세상사는 주변머리 없이 고지식하던 그녀는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는 거짓말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제일 지독한 장난이었는데 이제 그마저 할 수 없는 신세였다.
말년이가 유창한 말솜씨로 생전의 연암 선생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안방에 들어가 첫째를 안고 나온 필덕이가 내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녀가 강보에 싸인 첫째 얼굴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아기 도련님 좀 보세요. 돌아가신 연암 어르신과 빼쏘았어요. 풍채 좋으신 것 하며.”
첫째를 바라보며 내가 속삭였다.
“우리 규수야. 박규수야. 할아버님 닮겠느냐? 아니면 나 박종채를 닮겠느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말년이가 필덕이가 안고 있던 규수를 덥석 뺏어 자기 가슴에 품더니 손님들 쪽으로 걸어가며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들 보시오! 이 아기 도령이 바로 연암 선생 손자십니다. 성함은 박규수! 앞으로 크게 되실 분이니 미리 잘 봐두시오. 저기 종채인지 총채인지 하는 분은 관심 끄시고!”
*이 작품은 박지원의 ‘허생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