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언피니시드(The Debt)’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3-03-2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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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게 마련이다. 그 거짓을 덮으려고 거짓말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거짓 덕분에 안락한 삶을 얻은 사람이 진실을 밝혀야만 할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언피니시드’는 세 명의 모사드 요원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언피니시드’는 세 명의 모사드 요원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국가정보원을 지칭하는 NIS는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의 약자다. 정보의 한자 표기가 ‘情報’다 보니 인포메이션(Information)으로 착각해 NIS를 ‘National Information Service’의 약자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영문으로 표기할 때는 ‘Intelligence’를 써야 한다. 정보국의 정보를 의미하는 인텔리전스(Intelligence)는 인포메이션처럼 마음대로 삭제하거나 전달할 수 없는 국가 기록이다.

    아이큐(IQ·Intelligence Quotient)나 인텔리(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계층 또는 교양을 갖춘 사람)라는 용어에 익숙한 관계로 인텔리전스를 지능으로만 여기기 쉽지만 국익을 위한 기밀, 안보적 극비, 첩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텔리전스를 다루는 각국의 정보기관은 다른 부처와 협의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행위를 자행해 임무를 완수하는 방식은 지탄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사리사욕 없이 국가안보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요원들의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감이 될 만하다.

    그래서일까. 대표적 정보기관인 이스라엘 모사드의 아슬아슬한 활약상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인다. 영화 ‘언피니시드’(2011)가 그 예다. 모사드 요원들의 활약 이면에 자리한 충성심에 사로잡힌 이들의 그림자를 다룬다. 모사드의 첩보활동을 다룬 영화의 상당수가 실화에 바탕을 뒀지만 ‘언피니시드’는 그렇지 않다. 모사드 요원이 거짓 실적으로 30년 동안 출세 가도를 달리며 권력과 명예를 얻은 일은 없다. 한국에서는 ‘언피니시드’를 ‘끝나지 않는 족쇄’라는 의미로 번역해 영화를 개봉했지만 영문 제목은 빚, 부채를 뜻하는 ‘The Debt’다. 누가 누구에게 왜 빚을 졌는지, 그 빚을 어떻게 갚게 되는지 알아보자.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과 공동으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하며 공개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최초의 가스실 사진(왼쪽).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현장. [뉴시스, Gettyimage]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국립박물관과 공동으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하며 공개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최초의 가스실 사진(왼쪽).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현장. [뉴시스, Gettyimage]

    영화는 3명의 남녀를 중심으로 1997년과 1967년을 오가며 전개된다. 1967년, 암살도 서슴지 않는 현장투입팀 소속 키돈의 세 요원이 동독으로 급파된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지만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일념으로 레이첼(제시카 차스테인)은 미리 투입된 데이비드(샘 워싱턴), 스티븐(마튼 초카스)과 동베를린에서 합류한다. 나치에게 학살당한 아픈 가족사를 가진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끔찍한 인체 실험을 자행한 의사 보겔(제스퍼 크리스텐슨)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목표로 심장이 이글거렸다. 실제 이스라엘의 1967년은 ‘한번 칼을 뽑으면 끝장을 보는’ 모사드의 집요한 위력이 빛을 발하는 때다. 1960년, 이스라엘은 2년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찾아냈다. 그러곤 비밀리에 압송해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다.



    종전된 지 어언 15년이 지났고 세계는 냉전으로 재편됐다. 국제사회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어제의 아군은 오늘의 적이 됐다. 미국이나 옛 소련 공히 제2차 세계대전을 회자시켜 냉전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보란 듯이 아이히만의 모든 재판 상황을 생방송으로 해외에 송출했으며 세계는 나치의 잔학함에 치를 떨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나치를 응징하는 데 일종의 암묵적 면죄부를 부여받았다. 이스라엘은 모사드를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국익과 자국민에 해를 끼친 자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복수의 심판대에 세우기 시작한다. 극비리에 빈틈없이 행동해 누가 어떻게 어디서 어떤 작전을 수행했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모사드는 히브리어로 ‘연구소’라는 뜻이다. 일각에선 그들의 정보력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냉전기 소련의 KGB보다 한 수 위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적국에 둘러싸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중동의 화약고다. 따라서 정보력에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시킬 목적으로 1949년 발족된 정보·특수기관 모사드는 2년 만에 조직을 확대·개편해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는다.
    영화의 배경인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불안한 평화 대신 무력 침공을 선택한다. 이스라엘 군대는 한 나라도 아닌, 자국을 둘러싼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의 국경을 한꺼번에 넘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무모해 보였지만 이스라엘군은 6일 만에 속전속결로 항복을 받아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정보력 덕분이었고 그 중심에는 모사드가 있었다. 다만 1960년대까지 모사드의 존재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모사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만큼 모사드는 철저하게 음지에서 활동했다.

    어긋나는 사랑의 큐피드

    영화 ‘언피니시드’는 리메이크 작품이다. 다른 스파이 영화처럼 속 시원한 액션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함에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았다.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남녀 간의 사랑, 진실과 거짓, 국가와 개인, 비밀과 폭로 등이 탄탄하게 배합된 스토리 전개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감독 존 매든(73)은 40년 동안 고전, 전쟁,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등 각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메가폰을 잡았다. 배우들의 장단점을 간파하고 밋밋한 장면을 시시각각 절묘한 연출로 변주해 스크린에 투영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력을 입증한 헬렌 미렌이나 톰 윌킨슨을 주연으로 내세우는 한편, 신인 배우인 샘 워싱턴이나 제시카 차스테인을 등용해 세대 조화를 이룬 것도 감독의 묘수였다.

    원작은 감독이자 극본가인 아사프 베른슈타인(53)의 이스라엘 영화 ‘부채(The Debt)’다. 이스라엘 태생으로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베른슈타인 감독은 디아스포라(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와 점점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조국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첫 장편영화 ‘The Debt’는 이스라엘 내 영화제를 휩쓸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곤 할리우드 자본에 의해 재탄생됐다.

    영화 ‘언피니시드’에서 나치 전범을 처단하기 위해 적진에 잠입한 레이첼과 데이비드(오른쪽).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언피니시드’에서 나치 전범을 처단하기 위해 적진에 잠입한 레이첼과 데이비드(오른쪽).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언피니시드’에서 모사드 요원들은 나치 전범 보겔 박사를 납치한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언피니시드’에서 모사드 요원들은 나치 전범 보겔 박사를 납치한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속 사랑의 큐피드는 어긋나기만 한다. 현장 요원으로 적진 한가운데 잠입한 레이첼은 점점 지쳐갔다. 레이첼은 다정다감한 데이비드에게 사랑을 느끼고 구애한다. 데이비드도 레이첼에게 동지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만 가족 모두를 홀로코스트로 잃은 그의 사전엔 임무 완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애써 레이첼을 외면한다. 감정이 격해진 레이첼은 맘에도 없는 스티븐과 가까워진다. 세 청춘 남녀의 사랑은 뜻대로 성취되지 못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보겔 납치에 성공하며 조국의 뜻에는 부응한다. 이제 그를 기차에 실어 서독으로 보내야 한다.

    어떻게? 베를린은 자유 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 진영의 동베를린으로 양분돼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독일을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했다. 동독 지역에 속한 독일의 심장 베를린이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연합국은 베를린도 조각내 분할 통치했다. 그렇게 동독 한가운데 독야청청 위치한 서베를린은 무수한 비밀첩보 작전의 무대가 됐다. 이들이 보겔을 데리고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서베를린과 서독을 오가는 화물열차뿐이었다. 잠시 정차했을 때 보겔을 재빨리 태워 기차가 서독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서방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보겔을 이스라엘 재판정에 서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이히만의 사형 집행 후, 모사드는 ‘죽음의 천사’라고 불린 요제프 멩겔레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서 악명 높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의사로 있으면서 나치의 우생학을 입증하기 위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모사드는 멩겔레를 이스라엘 법정에 세우고자 부단히 애썼지만 작전은 번번이 물거품이 됐다. 소문만 무성하던 멩겔레의 잔혹한 인체 실험을 입증할 확실한 단서를 잡았을 때는 이미 한발 늦었다. 그가 남미에서 재혼까지 하며 무탈하게 지내다가 사망한 이후였다.

    비밀로 묻힌 진실과 거짓

    작전 성공을 코앞에 둔 순간, 마취에서 깨어난 보겔이 난동을 부리면서 요원들의 정체가 발각된다. 데이비드는 총격전을 불사하며 보겔을 데리고 겨우 은신처로 돌아온다.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3명의 요원은 탈출구를 찾지만 만만치 않다. 미국의 도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총격으로 사망자가 나온 상황에서 미국도 섣불리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신한 레이첼은 보초를 서면서 급격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혼란스러워한다. 의사답게 레이첼의 임신을 단박에 알아차린 보겔은 레이첼이 당번인 틈을 이용해 혈투를 벌인 후 도주한다. 요원들은 패닉에 빠진다. 스티븐은 조국에 치욕을 안길 수 없다며 레이첼이 도망치는 보겔을 사살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하자고 제안한다. 어차피 보겔은 평생 숨어서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세 사람만 입을 다문다면 비밀은 영원히 묻힐 것이라고 설득한다. 마땅한 출구가 없던 이들은 모두 동의한다. 다만 입신양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조국의 영광을 위한 결정이라고 자위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개선장군처럼 환대받는다. 레이첼은 데이비드를 맘에 두고도 아이 때문에 스티븐과 결혼한다. 어느 날, 데이비드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며 모든 진실을 밝히고 외국으로 함께 도피하자고 제안한다. 레이첼은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에 잠시 흔들리지만 딸 사라가 떠올라 매몰차게 거절한다.

    시간이 흘러 1997년이다. 그사이 레이첼과 스티븐은 이혼했다. 스티븐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됐다. 스티븐은 ‘보겔 암살 사건’ 이후 승승장구하며 이스라엘 내각에까지 들어갔다. 기자가 된 딸 사라는 부모의 이야기를 논픽션으로 출간한다. 모든 일이 순탄해 보였다. 보겔을 잊은 지도 오래다. 사라의 논픽션이 구구절절 진실을 호도해도 레이첼은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 연락조차 없던 데이비드가 레이첼을 찾아와 진실을 밝히자고 다시금 설득한다. 30년이 지나 모든 것이 바뀌어 돌이킬 용기조차 나지 않던 레이첼은 또다시 거절한다.

    영화에서 레이첼은 우크라이나 신문사에 몰래 들어가 보겔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낸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에서 레이첼은 우크라이나 신문사에 몰래 들어가 보겔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낸다.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낙담한 데이비드는 자살한다. 데이비드의 자살 이유를 조사하던 스티븐은 보겔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아챈다. 우크라이나의 작은 정신병원에 숨어 지내는 보겔이 현지 기자와 인터뷰할 예정임을 레이첼에게 알려준다. 만약 죽음을 앞둔 보겔이 세상에 모든 것을 폭로하면 전남편 스티븐은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으로 마무리되겠지만 딸 사라의 인생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된다. 결자해지를 위해 레이첼은 우크라이나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번에는 기필코 불구대천지 원수 보겔을 처단해야만 한다. 레이첼은 도둑고양이처럼 우크라이나의 신문사에 잠입해 보겔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낸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직 요원에게 이런 일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능숙하게 병원에 들어가 병실로 들어간다. 그런데 기자와 약속을 잡은 인터뷰이는 보겔이 아니었다. 그는 다년간 반복해 들은 말을 녹음기처럼 줄줄 읊어댈 뿐이었다. 그 순간, 오래전 사라진 보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레이첼은 그를 쫓아 이번엔 기어이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다. 레이첼은 기자에게 모든 진실이 담긴 편지를 남긴다. 비로소 레이첼은 조국과 딸에게 남은 부채(The Debt)를 청산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도 하늘이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기에.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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