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가문의 딸, 평양 금수저
‘만점짜리 신랑’과 ‘1등 신붓감’
소리 없이 사라진 특권층 아이들
“아버지는 날 이해하셨을 것”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어
공주님 된 김여정, 金씨 세습왕조
탈북 6년 차, 아직도 악몽 꿔
노예로 사는 북한 주민들 잊지 말길
오혜선 씨. [지호영 기자]
오혜선(56) 씨가 34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떠올린 남편(태영호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첫인상이다. 훗날 배신감을 얘기하지만 그날 여자는 첫눈에 반했다.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오혜선 씨가 회고록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들고 세상에 나왔다. 1월 31일 국회의원 태영호의 아내가 아닌 저자로서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을 방문한 오 씨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평양의 핵심 계층으로 살아온 유복한 성장기과 결혼 생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했지만 철저한 계급 사회인 북한의 이중성, 김정은이라는 새 독재자의 출현 이후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인민의 삶, 외화벌이와 체제 미화에 동원되는 북한 외교관들의 실상 등 그가 들려준 평양 이야기는 기괴하다 할 만큼 낯설었다. 그러나 자식의 미래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각오하겠다는 부모의 마음은 남과 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3~4년 됐어요. 2020년 남편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괜히 잘못 써서 오해를 일으킬까 봐 접었습니다. 남편이 국회의원이 된 지 어언 3년이 돼 오는데 그동안 응원해 주시는 분도 많았지만 부정적인 시선도 늘어난 것 같더라고요. 배신자, 변절자, 심지어 간첩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우리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하고 서운하기도 했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대부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잘 모르시고 갑자기 한국 사회에 ‘뚝’ 나타나서 국회의원까지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남편이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라고 해도 본인 말을 누가 듣겠어요. 아, 이것은 아내인 내 몫이구나 생각했죠.”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 말이 필요 없는 여자
평양외국어학원(한국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 시절부터 오혜선 씨의 단짝이던 명희가 자기 애인의 친구라며 소개해 준 신랑감이 태영호였다. 공화국 역사에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소년 유학생’ 출신에,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베이징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뒤 북한 외무성 유럽국에서 일하고 있는 엘리트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비록 간부 집안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북한에서 ‘만점짜리 신랑’이었다.‘항일 빨치산 가문의 딸’로 자라 당시 평양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반이던 오 씨도 ‘토대’를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1등 신붓감이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증조할아버지 오봉삼의 여섯 아들 가운데 둘째이던 할아버지(오도현)는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 작식대원(취사대원)이었던 신일과 결혼해 아들 기수를 얻었다. 하지만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본 토벌대와 전투를 치르다 희생됐다. 셋째 오백룡(본명 오수현)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참전했고 광복 후 북한 내무상 부상, 김일성 호위총국장, 조선노동당 중앙위 군사부장을 지냈다.
김일성 정권에서 아버지 오기수도 승승장구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정치부장을 거쳐 판문점 북측 수석 부대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정치부총장, 김일성정치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어머니 김상숙과 김일성 일가의 인연도 남달랐다. 어머니는 신의주의학대학 재학 중 김일성과 그 일가의 호위를 맡은 호위총국의 검식준의로 선발됐다. 검식준의는 김일성 일가의 식사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군관으로 모든 음식을 미리 먹어보고 검수하는 일을 했다. 김 씨는 제대 후 당시 호위총국장이던 오백룡의 소개로 그의 조카 오기수와 결혼했다.
오죽하면 선을 보기도 전에 남자 쪽에서 “처자의 가정환경이 너무 요란해서 내키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래서인지 첫선 자리에서 남자는 자신은 맏아들이니 평생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맏며느리도 괜찮다”고 했다. 사실 그를 보는 순간 여자는 ‘이 남자는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이 사람과 함께라면 마음고생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한 건 남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한국에 온 후 쓴 회고록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첫선에 대해 “몇 마디만 해봐도 알 수 있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썼다. 1989년 4월 어느 봄날이었다.
1989년 8월 8일 열린 제450차 군사정전위에서 북측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한 한국외대 임수경 양이 활동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고 있다. [동아DB]
축전이 끝나고 그해 10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남자가 근무하는 외무성과 여자가 근무하는 무역성은 김일성광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나란히 출근하고 함께 퇴근하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이듬해 첫째 아들 주혁이가 태어났다. 북한의 ‘만점짜리 신랑’과 ‘1등 신붓감’의 축복받은 삶은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다.
1996년 4월 남편이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발령받았다. 오랫동안 신장증을 앓고 있는 첫째 주혁이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간절히 바라던 해외 파견이었다. 여섯 살이 되도록 업혀 다닐 정도로 허약했던 아들이 덴마크에 와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식이요법을 병행했더니 어느새 학교도 다니고 운동도 할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외교관의 아내,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큰아이가 어느 정도 회복되니 둘째를 낳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외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대사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대사는 상부에 보고하지 않겠으니 조용히 둘째를 낳으라고 승인했다. 둘째 아들 금혁이가 태어났다. 덴마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6개월이 될 때까지 집마다 찾아다니며 건강검진을 해주고 애로 사항을 해결해 주는 복지제도가 있다. 오 씨는 “땅 위에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그 무렵 덴마크 방송은 매일 북한의 끔찍한 아사와 기근에 대한 뉴스를 내보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감추고자 했던 북한 내부 실상을 공개할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사관 업무도 김 씨 일가의 위대함과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일 대신, 공화국의 어려움을 가능한 한 많이 보여줘서 국제사회로부터 더 많은 협조와 지원을 받아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황장엽 비서(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상비서 역임)가 남한으로 망명(1997)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4년 반 만에 돌아온 평양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졌고 장마당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럴수록 머지않아 실력만 있으면 잘사는 세상이 올 거라며 사람들은 자식 교육에 온힘을 쏟아부었다.
태영호 의원이 탈북 전 공사로 근무했던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뉴시스]
그러나 유럽의 복지제도를 체험하면서 평생 북한의 흑색선전에 속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북한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고기 한 근 사 먹을 수 없었다. 국민에게 제대로 된 인건비를 준 적이 없으니 세금을 걷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차라리 세금을 걷고 국민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자식들에게 노예의 삶을 물려줄 수 없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친형 김정철(왼쪽)이 에릭 클랩튼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에스코트하던 태영호 당시 주영 북한 공사. [동아DB]
평양의학대학에 다니던 주혁이가 런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오 씨는 북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평온하게 일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혁이의 대학 졸업과 함께 북한 송환날이 가까워지자 선택의 순간이 왔다.
오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행’을 망설였다.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받을 불이익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한국행을 택할 경우 더 가혹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평생 고위층 간부의 자녀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도 마음에 걸렸다. 남편도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나는 괜찮아. 부모님은 이미 떠나가셨고, 형제들은 평생 인생 막바지에 살았으니 고생을 견뎌낼 수 있겠지만 당신 형제들은 다르잖아”라며 재차 아내의 탈북 의지를 확인했다.
“어디로 갈까 결정이 안 됐을 때 영국 이민도 찾아보고 캐나다, 미국도 찾아봤죠. 저는 가능한 한 영국에 남고 싶었어요. 영국에는 유독 이주민이 많잖아요. 나는 이주민으로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반대했어요. ‘내가 반생을 사랑하고 지켰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데 나는 억울하다. 나는 북한 사람들과 통일을 위해서 살겠다. 그러려면 한국으로 가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북한이 아니라 평양, 그들만의 세상
북한 체제와 영원히 작별하는 순간 남편은 하염없이 울었다. 형제들과 친척들, 자기를 믿어준 지인들은 물론 인간으로서 지나온 모든 과거와의 작별이었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 노예의 삶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결심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2016년 7월 어느 날 늦은 아침 우리 가족은 조용히 대사관 정문을 나섰다. 한여름이었지만 런던 날씨는 선선했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긴장한 마음을 식혀주었다.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 조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에게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우리가 선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에서)
오 씨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염두에 둔 제목은 ‘고마운 대한민국’이었다.
“한국에 와서 우리 가족처럼 잘 적응한 집도 없잖아요. 대한민국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우리 가족이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늘 고맙고 죄송했죠. 대한민국이 고맙고, 국민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품고 살기 때문에 제목에서라도 그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죠. 그런데 원고를 교정하는 분이 ‘런던에서 온 북한 여자’가 어떻겠느냐고 해서, 기왕이면 런던과 대칭되게 평양으로 하자고 했죠.”
어머니의 인터뷰에 동반한 장남 주혁 씨가 책 제목에서 ‘평양’을 강조하게 된 이유를 부연 설명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젊은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들이 알고 있는 북한은 대부분 지방에 대한 것이었어요.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말투까지 지방 것이 전부인 줄 알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같은 북한이라도 평양과 지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 평양의 핵심 계층으로 살아온 만큼 독재국가 북한과 계급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권세 누리다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아이들
오 씨는 함경북도 나진시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일군’이던 아버지 덕분에 줄곧 평양에서 자랐다. 북한에서는 인민군대 안에 당 위원회를 만들고 그 책임자를 당 위원회에서 파견했는데 인사권과 처벌권을 갖고 있는 이들을 ‘정치일군’이라고 했다. 오 씨가 탁아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노래가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였다. 김일성은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찾아준, 우리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준 은인이며, 그에 대한 충성심은 의리이자 의무이고 도덕이라고 배웠다.김일성의 고향 만경대에 위치한 인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조선소년단에 입단했다. ‘원수님의 길을 따라 힘차게 나가자’는 조선소년단 행진가를 부르며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불타오르는 10대 시절을 보냈다. 조직의 결정은 무조건 옳고 오직 복종만이 훌륭한 혁명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믿는 ‘어린 전사’로 키워졌다.
인민학교 졸업 후 오 씨는 평양외국어학원 영어과에 진학했다. 북한 사람들은 ‘대외 부문 일군’이 되어 외국에 한번 나가보는 게 소원이었다. 대외 부문 일군이 되려면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국제관계대학, 평양외국어대학 중 한 곳을 나와야 했다. 이 대학들에 입학하려면 외국어학원을 졸업해야 하니 당연히 학원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 실력뿐 아니라 가정환경, 재력도 좋아야 입학할 수 있었다. 학원에는 간부집 자녀들이 워낙 많다 보니 명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최고 권력자의 하사품을 자랑했고, 그때 선물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오백룡 가족이야? 오백룡 일가야?’라고 부를 때마다 정말 내가 특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학원에 다닐 때 권력을 누리다가 부모님들의 죄 아닌 죄로 없어지는 애들을 보면서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권력이 무섭더라고요. 학원이 6년 과정인데 졸업할 무렵 1학년 입학 때 만났던 아이들 가운데 평범한 집 애들은 대부분 남아 있지만 간부집 자녀들은 거의 다 없어졌어요. 딱 한 명 남았더라고요. 김 씨 패밀리. 김일성 오촌 조카만 있더라고요.”
주혁 씨에게 독자로서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무엇인지 물었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부분이요. 그들이 왜 없어져야 했는지, 북한 사회가 어떻게 이런 구조가 됐는지, 이 책을 통해 한국인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혁 씨는 평양으로 돌아가 학교를 다닐 때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외국 생활을 경험했던 친구들이 해외에서 있었던 얘기나 그때 배운 노래를 하면 조직, 군부에서 나와 어디론가 데리고 가더라고요. 한두 명씩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하면 큰일 나겠다 싶었죠. 그런 사건이 많다 보니 어떤 말은 하고 어떤 말은 안 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돼 가급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친구들끼리도 ‘진솔적’ 얘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진솔한 대화는커녕 북한에서는 아무도 그 친구가 왜 사라졌는지 묻지 않았고, 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혜선 씨는 책을 쓰면서 비로소 사라진 친구들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러줄 수 있었다.
“학원 2학년 때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부주석을 지내던 김동규의 막내 늦둥이 딸 김영숙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그 애는 먹는 것을 남달리 좋아해 손에 간식을 늘 달고 다니던 통통하고 쾌활한 소녀였다. 일본에서 귀국했던 중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의 딸들인 김영순, 김유리, 김서경 자매도 비밀스러운 권세를 누리던 공부 잘하고 착한 형제였지만 하룻밤 사이 온 가족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해군 사령관을 거쳐 육해운상을 지냈던 방희순도 대학 입학을 앞둔 8월의 방학 어느 날 온 가족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에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친구들의 불행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모님은 국가와 당에 해를 끼친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아버지가 그런 과오를 범해 어느 날 갑자기 삼수갑산(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오지)으로 쫓겨가는 일은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북한에는 ‘태양의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권력의 무서움은 뼛속에 새겨졌다.
낡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은 이복 언니
오 씨 일가의 뼛속에 새겨진 두려움의 진원지는 어쩌면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오기수는 만경대혁명학원(1947년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 희생된 전우들의 유자녀를 위해 자신의 고향에 설립한 기숙학교) 2기로 6·25전쟁 중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고려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귀국했다. 외무성에 배치돼 근무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 조직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다.당시는 김일성이 남로당계, 소련계, 연안계, 갑산계를 제거하고 유일적 영도 체계를 수립하던 시기였다. 모스크바에서 온 고려인 아내를 둔 아버지는 소련파로 의심받았고 소련 관련 회의에서 배제됐다. 가족을 지킬 것인가, 김일성에게 충성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아버지는 후자를 택했다. 아내와 딸을 잠시 소련으로 돌려보낸 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낡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아 있던 이복 언니 ‘오미옥’의 존재는 혜선 씨의 첫사랑과 함께 오 씨네 가족사에 다시 등장했다. 대학 2학년 때 만난 러시아어과 남학생이 ‘귀국자’ 집안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오 씨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교포들을 ‘귀국자’라고 했다. 북한에서 귀국자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간첩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제한적이어서 당 간부나 외교관이 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귀국자 집안 출신 남자와의 결혼은 형제들 앞날까지 막는 ‘집안 망하게 할 짓’이었다.
혜선 씨는 온 가족의 반대에 직면해 결국 첫사랑과 결별했다. 그리고 비로소 어린 딸을 소련으로 보낸 아버지가 평생 짊어진 죄책감과 그리움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쓰면서 시작을 ‘언니를 찾습니다’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평생 그리워했던 이복 언니를 꼭 찾아서 그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어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죠. 제 책을 본 분들을 통해 저 집에 저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고 입소문이 나면 혹시라도 언니를 찾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요.”
오 씨는 해외 생활을 하면서 김정은의 생모가 귀국자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김 씨 일가의 이중성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일성에게 충성하기 위해 가족마저 버린 아버지(2008년 작고)였지만 만약 살아서 딸의 탈북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서울에서 듣게 된 북한 찬양
“한국에 도착한 지 몇 달 지난 2016년 겨울, 어머니가 북한 방송에 나온 부분을 중국 봉황TV를 통해 본 적이 있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어요. ‘너는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남조선에 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렇게 미련한 결심을 했느냐.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너를 총으로 쏴 죽였을 거다.’ 북한에 남아 있는 자식들도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가슴은 또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셨을까 싶었죠. 한편으로 아버지가 정말 나를 쏴 죽였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평생 충성을 바친 북한은 지금 어떤가요. 인권이 없고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가난한 북한이 정말 우리 아버지가 꿈꿨던 세상일까. 아버지가 (딸의 탈북 결심을) 아셨다면 ‘빨리 가라. 너희들이라도 가서 자식들에게 꿈을 주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그리운 아버지, 안타까운 어머니를 떠올리며 오 씨는 끝내 울었다.
한국에 온 지 2년 만인 2018년 8월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노동자 통일 축구대회’가 열렸다. TV를 통해 형부가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남한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 미선 씨는 빨치산 출신 주도일의 둘째 아들 주영길과 결혼했고, 2018년 당시 형부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자 조선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오 씨는 한달음에 달려가 가족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괜히 소문이 나서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더 큰 피해가 갈까 봐 포기했다. 대신 두 아들을 데리고 먼발치에서라도 형부의 얼굴을 보고자 축구경기장으로 향했다.
세습 인정한 사회주의 국가의 모순
“우리가 여기(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 텐데 김정은이 어떤 심정으로 아저씨(북한에서는 형부를 아저씨라고 부른다)를 한국으로 파견했을까. ‘너희는 가만 있으라’는 협박일까. 대표단이 판문점을 통과한 뒤 기자들과 인터뷰하던 아저씨 얼굴은 격정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았어요. 멀리서라도 아저씨의 얼굴을 봐야 평생 후회를 안 할 것 같아서 아들들을 데리고 경기장으로 갔죠. 가능한 한 남의 시선에 띄지 않게 망원경으로 아저씨 얼굴을 봤어요. 나는 아저씨에게 밥 한 끼 챙겨줄 수 없는데 한국인들이 아저씨 주변에서 열심히 먹을 것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고맙기도 했죠. 그런데 행사가 김정은과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어요. 북한에 있을 때에는 김정은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한국에 와서 자유를 얻은 몸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까, 아 저게 내 모습이었지 싶어서 부끄럽더라고요.”해외 생활을 통해 북한 사회의 불의와 김 씨 일가의 죄행을 알게 된 뒤 충성과 복종의 삶에 회의를 느낀 오 씨는 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의 어머니가 TV 속 김여정을 보며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호도하지만 김 씨 일가는 창시자고, 북한의 태양이고, 북한의 신으로 영원하다는 이중성인 거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세습을 버젓이 강조해요. (김여정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이미 북한 사람들은 세습을 인정하고 있어요. 공공연하게 버젓이 내려왔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미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나만 놀란 거죠. 북한에서는 사람들에게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을 체질화하라고 배우거든요. 모든 교육과 모든 활동과 개별적인 생활조차도 충실성에 근거해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세뇌가 돼요. 한국에 와서 보면 참 어리석구나, 온전한 정신으로 어떻게 저런 데서 살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 세상에서 살면 그렇게 되는 거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동아DB]
“무조건 참아라, 무조건 견뎌라”
그럼에도 북한의 독재정권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데 김정일이 현지 지도를 나가서 손을 흔들 때면 손금을 봤어요. 명금(명줄)이라고 하죠. 저 사람의 명금이 긴가 짧은가. 이 정권이 과연 오래갈까. 외국 생활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갈 때마다 정말 간절히 김 씨 정권이 끝나기를 기대했어요. 그러나 김정은이 등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죠.”
오 씨는 김일성이 정치적 적수를 제거하기 위해 곳곳에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었다면, 김정일과 김정은은 나라를 인간 생지옥, 하나의 커다란 교도소로 만들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대대로 자식들을 살게 하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2008년 오 씨 가족이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자유로운 유럽에서 자란 두 아들에게 체제의 모순을 설명해 줄 방법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조건 참아라, 무조건 견뎌라”였다.
“자유와 민주주의 맛을 보지 않았다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겠죠. 인생은 자유를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로 딱 갈라지거든요.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아이들이 자유를 몰랐으면 했지만 애들은 이미 어떤 말은 부모에게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알았던 거죠. 북한에서 애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니 기괴하더라고요. 큰애가 평양의학대학에 입학한 뒤 날마다 돈을 달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선생님들이 교재니 시험이니 하면서 아이에게 매일 돈을 요구해요. 제대군인 학생들은 매점에 외상을 하고 주혁이 앞으로 외상을 달아놓았어요. 해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편입생들이 약탈의 표적이 되는 거죠. 애는 엄마에게 이런 사정은 말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돈 돈’ 했어요. 직장 동료들에게 학교의 실상을 얘기했더니 아무도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오 동무, 그럼 그 교원은 어떻게 먹고살겠소? 월급도 없고 배급도 안 주지, 그 선생도 가족이 있으니 먹고살아야 할 게 아니오’라고 두둔하더군요. 둘째 금혁이는 평양외국어학원에 다녔는데 간부급 자녀들이 선망하는 학교라 학생들의 배경도 대단하고 경쟁도 치열했어요. 어느 날은 패싸움을 벌여 머리를 맞고 들어오기도 하고 칼로 허벅지를 찔려서 피를 흘리며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애들을 끌고 평양으로 돌아온 게 잘못됐음을 깨달았죠.”
한국에 온 후 첫째 주혁 씨는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 금혁 씨는 서울소재 대학에 재학하고 있다. 친구들을 원 없이 사귀며 한국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는 두 아들을 보면서 오 씨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거리를 지나가다 과일 장사가 큰 소리로 ‘사과 사세요’ 하고 외치는 걸 봤어요. 남편한테 ‘저렇게 하루 종일 외치려면 얼마나 힘들까’라고 했더니 남편은 ‘그래도 저분은 정착해서 사과라도 팔고 있지 않나’ 하더군요. 정신적 자유도 중요하고 신체적 자유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자유도 중요하죠. 나도 내 몫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이화여대 대학원 북한학과에 지원해 공부를 했습니다.”
과일 장수의 자유로부터 얻은 깨달음
오 씨는 여전히 북한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았으면서 어떻게 감히 북한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북한에는 김 씨 일가를 제외한 ‘특권’의 향유자는 없어요.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어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건너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탈북자를 향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6·25전쟁 시기 김 씨 일가를 등진 사람은 실향민이고, 현시대 김 씨 일가를 등진 사람은 탈북민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북한에 남겨진 실향민의 가족도 현재의 탈북민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배신자’로 낙인찍혀 몇 대째 차별을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탈고하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인간은 망각의 생명체라고 합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오늘도 북한에서 체험했던 불행과 고통의 순간들이 가끔 꿈속의 현실로, 악몽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민족 비극의 역사가 절대로 되풀이돼서는 안 됩니다. 북한과 같은 악마의 나라, 지구상에서 가장 반인륜적인 악의 위협이 한반도 북쪽 아주 가까운 곳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 아직도 김 씨 일가의 폭정하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수천만 북한 주민들은 불과 반세기 전에는 대한민국 국민과 한 밥상을 나누던 그대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동아 3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