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층·85개 동·1만2032가구 매머드 단지
이익 나눠야 하는 사이… 조합·시공사 갈등史
20년 동안 정부 방침따라 냉온탕 오가
“유난히 우여곡절 많은 곳”
1월 3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단지(올림픽파크 포레온) 건축 현장. [뉴스1]
정부는 ‘시장 연착륙 대책’이라고 강조했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1·3 대책이 사실상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단지 올림픽파크 포레온(이하 둔촌주공)을 살리기 위한 대책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사업
지난해 10월 정부는 ‘비상경제민생회의’를 통해 분양 중도금 대출 보증 기준 상한을 기존 9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높였다. 당시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는 일반분양가 심사를 받고 있었다. 국민 평형인 84㎡는 물론 59㎡도 분양가가 9억 원을 넘을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기존 제도에서는 중도금 대출이 나오지 않는 분양가지만 정부의 규제 완화로 둔촌주공에서도 중도금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는 평가가 나왔다.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둔촌주공 전용 84㎡의 분양가가 12억 원을 넘어서면서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된 것. 이에 대해 지난해 11월 21일 원희룡 장관은 취재진에게 “둔촌주공 전용 84㎡가 12억 원이 넘는다는 이유로 (중도금 대출 보증 기준을) 또 올리게 된다면 정책의 기준을 어디로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문제에 부딪힌다”며 “이 부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는 결국 1·3 대책을 통해 중도금 대출 보증 분양가 상한 기준을 없애버렸다. 여기에 더해 분양 아파트 전매 제한 기간을 대폭 줄이고 실거주 규제를 폐지하는 방안도 함께 내놨다. 특히 일부 방안의 경우 이미 분양한 단지에도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
분양을 진행하고 있던 둔촌주공이 최대 수혜지로 꼽혔다. 1월 3일은 둔촌주공 정당계약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해 계약을 고민하던 84㎡ 평형 당첨자는 순식간에 숨통이 트였다. 정부가 노골적으로 둔촌주공 살리기에 나선 까닭은 이곳이 향후 국내 주택 분양 시장의 흐름을 결정하는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데 있다. 둔촌주공마저 분양 성적이 좋지 않으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침체 흐름이 더 빨라져 주택 시장 전반이 경착륙할 수 있으리라는 우려가 컸다.
둔촌주공이 정부가 나서야 할 정도로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규모에 있다. 둔촌주공은 지하 3층~지상 35층, 85개 동, 1만2032가구 규모로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사업’으로 불리는 매머드 단지다. 이 가운데 일반분양 규모도 4786가구에 달하는 만큼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평가된다.
예비 재건축 단지 운명 가늠쇠
2001년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 단지 전경. [동아DB]
재건축사업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건축조합과 시공사(건설사)가 긴 시간 동안 손발을 맞춰가며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 사업 주체는 화합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며 극단의 갈등을 겪기도 한다. 둘은 같은 사업을 함께 추진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같지만 수익금을 나눠야 한다는 점에선 갈등이 불가피한 관계다.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에서도 이런 특징이 여실히 나타났다.
둔촌주공 조합은 시공 주관사 현대건설을 비롯해 HDC현대산업개발, 롯데건설, 대우건설로 구성된 사업단과 손을 잡고 있다. 사업단이 확정된 것은 2010년이다. 2003년 추진위 설립 이후 안전진단을 최종적으로 통과한 때가 2007년, 조합 설립을 인가받은 때가 2009년이다.
양측은 손을 잡기 전부터 기 싸움을 벌였다. 2008년 말 당시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때였다. 미분양 주택 수가 16만 가구로 역대 최대치를 찍는 등 분양 시장 침체로 건설사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와중에 사업비만 4조 원에 달하는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건설사들은 너도나도 뛰어들 채비를 했다. 현대건설은 물론 삼성물산과 대우건설, GS건설 등 상위 10대 건설사가 모두 참전할 기세였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둔촌주공 조합이 ‘무상지분율 최소 160% 보장’을 입찰 조건으로 내건 것. 이에 2010년 6월 시공사 입찰에 지원한 건설사가 단 한 곳도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무상지분율이란 재건축 아파트 단지 조합원이 재건축 후 추가 비용 없이 넓혀갈 수 있는 아파트 면적 비율을 의미한다. 예컨대 무상지분율이 150%이고 조합원이 보유한 대지 지분이 50㎡이면 재건축 후 75㎡ 아파트를 비용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다.
무상지분율이 높으면 건설사엔 부담이다. 결국 분양 가격을 높게 책정해야 하는데, 당시 시장엔 미분양 문제가 여전히 심각했다. 분양이 잘 안되면 건설사가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건설사들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수주를 포기하려 한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갈등
그래도 ‘대마불사(大馬不死)’라 했던가. 둔촌주공은 워낙 규모가 크고 입지 조건이 좋아 결국 시공단을 선정할 수 있었다. 시공사를 정할 때만큼은 조합과 건설사가 한마음 한뜻을 이뤘다. 2010년 8월 28일 둔촌주공 재건축 시공사 선정 총회 투표 결과 현대건설 사업단이 3840표 가운데 94%인 3605표를 얻어 선정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현대건설 사업단은 조합에 무상지분율 164%를 조건으로 제시했는데, 이것이 갈등의 불씨가 된다. 2015년 사업단이 건축비 인상 등을 이유로 무상지분율을 132~158%로 제시하면서다. 양측은 격한 마찰 끝에 무상지분율 150%로 합의했다.2017년 재건축 계획이 확정되고, 7월부터 6개월간 대규모 이주가 시작됐다. 2019년 철거 작업이 끝났다. 잠잠하던 조합과 사업단 간 갈등은 이듬해 다시 터졌다. 2020년 6월 사업단은 조합과 공사비 증액 계약을 체결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을 반영해 공사 비용을 2조6000억 원에서 3조2000억 원으로 증액하기로 했다.
지난해 4월 15일 둔촌주공 시공사업단은 재건축조합과 공사비로 갈등을 겪은 끝에 공사 중단을 선언했다. 사진은 같은 해 4월 11일 재건축 현장에 공사 중단 예고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 [뉴스1]
갈등은 분양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사업단은 조합 측에 공사 중단으로 인한 손실 보상금액이 약 1조1400억 원이라고 통보했다. 둔촌주공 공사비는 2020년 증액된 3조2000억 원에서 4조3400억 원으로 늘게 된다. 이에 앞서 조합과 사업단은 손실 보상금액에 대해 한국부동산원의 검증을 받고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조합은 사업단이 내놓은 금액에 공사 중단에 따른 비용뿐 아니라 공사 중단과 관련 없는 추가 공사 기간 연장, 자재비 인상 등이 포함됐다며 맞서고 있다. 둔촌주공 입주 예정일은 2025년 1월이다. 그때까지는 갈등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닐’ 듯한 양상이다.
재건축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갈등은 비단 둔촌주공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최근 서울에서만 서초구 방배센트레빌프리제와 래미안 원베일리, 마포구 공덕1구역 재건축사업 등에서 공사비를 두고 양측의 줄다리기가 벌어진 바 있다. 통상 이 과정에서 건설사가 교체되기도 하고 새 방안에 합의하기도 한다. 재건축사업의 운명과도 같은 과정이다.
2022년에 드리운 2008년 금융위기 그림자
2019년 12월 7일 서울 강동구 한 교회에서 분양가 책정안을 의결하기 위해 둔촌주공 재건축조합원 총회가 열렸다. 당시 분양가 상한제 등 정부 규제와 맞물려 조합원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사진은 일부 조합원들이 총회장 주변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동아DB]
이후 철거가 이뤄지고 공사가 진척된 시기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정부가 규제를 강화했다. 지금은 정부가 둔촌주공 살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2020년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분양가를 비롯해 집값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고분양가 심사제가 수단이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분양가를 통제했다. 2019년 당시 둔촌주공 재건축조합은 3.3㎡당 3550만 원의 일반분양가를 책정했지만 2020년 HUG는 분양가가 지나치게 높다며 조합 측에 3.3㎡당 2900만 원대 분양가를 고수하며 압박했다. 당시 주변 아파트 시세는 3.3㎡당 4000만 원을 넘었다. 또 HUG의 방안대로 일반분양을 할 경우 1인당 조합원 분담금이 1억3000만 원씩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왔다. 조합원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조합 내 자중지란도 생겼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HUG의 분양가라도 받아야 한다는 기존의 조합과 다시 분양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합원 모임의 입장으로 나뉘었다. 조합원 모임은 조합장 퇴진과 총회 무산을 추진했고 결국 성공했다.
지난해엔 반대로 경기가 침체되며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10월 7000억 원 규모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만기를 앞두고 차환 실패 위기에 몰렸던 것.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가파르게 인상된 데다가 강원 레고랜드발(發) 부동산 PF 시장 경색으로 자금줄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만기 하루 전 가까스로 차환 발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둔촌주공 같은 우량 사업장마저 자금난을 겪으면서 시장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건설사들이 줄도산한 악몽을 떠올렸다. 둔촌주공은 한숨 돌렸지만 부동산 PF 부실화 우려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 말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이 6만8000가구에 달하는 등 위험수위를 넘어서면서 건설업계의 위기감은 여전하다.
최종 경쟁률 5.5대 1… 흥행엔 실패
1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연두 업무보고(국토교통부)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부동산 수요 규제를 과감하고 속도감 있게 풀어야 한다”고 했다. [뉴스1]
이처럼 둔촌주공 재건축은 오랜 기간 사업을 끌어오면서 때로는 규제와 경기 흐름에 따라 덕을 보기도 했고 때로는 고충을 겪기도 했다. 시공사와의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는가 하면 부동산 PF 시장 경색으로 사업단이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다. 부동산 경기 활황기에는 기대를 듬뿍 받았지만 결국 급격한 경기침체기에 분양에 나서게 됐다. 그야말로 냉온탕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둔촌주공은 워낙 대단지여서 조합원이 많아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또 여러 갈등을 겪으면서 사업이 지연되는 등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은 사업지가 됐다”며 “재건축사업을 하면서 겪을 만한 것은 다 겪은, 그야말로 재건축사업의 역사를 써왔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