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이후 드러난 무담보 채권자 취약한 권리
암호화폐, ‘거래소’ 아닌 ‘개인 지갑’에 보관하라
美 의회 사상 최초로 하원 ‘디지털자산소위’ 구성
[Gettyimage]
파산보호 신청을 하는 순간 암호화폐 업체는 파산관재인이 이끌게 된다. 파산법원의 승인을 받아 채권자에게 빚을 갚기 위해 회사에 남아 있는 자산을 최대한 끌어모아 처분하고 채권자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한다. 동시에 확률은 낮지만 회생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 등장한 게 고객이 파산신청을 한 암호화폐 업체 계좌에 둔 암호화폐 소유권 문제다. 디지털 자산시장이 커지고 암호화폐 업체가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제껏 법원에서 다뤄진 적 없던 사안이 불거진 것이다.
‘이자지갑’과 ‘보관지갑’의 차이
지난해 5월 이후 미국에서 셀시우스(Celsius), 블록파이(BlockFi), 보이저(Voyager) 같은 암호화폐 대출업체가 줄줄이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셀시우스, 블록파이, 보이저]
미국 파산신청 기업의 자료를 제공하는 크롤(Kroll)에 공개된 셀시우스 문서를 보면, 셀시우스 회사 측이 고객 소유권을 인정한 계좌는 순수하게 보관만 하는 암호화폐 계좌, 이른바 ‘보관지갑’이었다. 암호화폐를 예치하면 이자를 주는 계좌, 즉 ‘이자지갑’에 들어 있는 암호화폐 소유권은 회사 측에 있는 반면 보관만 하는 계좌에 들어 있는 암호화폐 소유권은 고객한테 있다고 회사 측이 인정한 것이다. 이자지갑을 거친 적 없이 오직 보관지갑에만 들어 있던 암호화폐에 대해서만 고객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약관에 포함돼 있었다.
“보관지갑(Custody Wallet)에 들어 있는 디지털 자산의 소유권은 언제나 당신(고객)에게 있으며 셀시우스 회사 측에 넘어가지 않는다.”
“암호화폐 예치 이자 상품(Earn Service)을 선택하면, 당신(고객)은 디지털 자산을 셀시우스에 대여하게 된다. 이자 상품을 이용하는 기간 모든 권리와 소유권은 셀시우스에 있다.”
졸지에 무담보 채권자 된 제미니와 고팍스
미국 암호화폐 대부업체 제네시스글로벌의 파산으로 한국의 암호화폐거래소 고팍스 고객 암호화폐 약 700억 원이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네시스 글로벌 캐피탈, 고팍스]
미국에서 파산 관련 채권자는 크게 담보 채권자(secured creditors)와 무담보 채권자 둘로 나뉜다. 파산 신청 뒤 회사 측이 남은 자산을 처분해 나눠주는 경우, 담보 채권자부터 우선 지급하고 남는 자산이 있으면 무담보 채권자에게 채권 비율에 따라 지급한다. 즉 무담보 채권자는 지급 순위에서 맨 뒤로 밀리는 후순위 채권자라고 할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제품을 수출하는 업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미 서부지역 산업정보’에도 이 같은 내용이 소개돼 있다.
1월 19일 세계 최대 규모 암호화폐 대부업체 제네시스글로벌(이하 제네시스)이 파산보호 신청을 하면서 무담보 채권자 상위 50위 명단이 공개됐다. 1위는 미국 암호화폐거래소 제미니였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가 하버드대 재학 시절, 자신들의 페이스북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소송해서 6500만 달러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윙클보스 형제가 만든 거래소다. 두 업체는 암호화폐 예치 이자 상품으로 긴밀하게 엮여 있다.
제네시스는 암호화폐 이자 상품의 핵심 축을 담당해 온 업체다. 제미니가 판매했던 ‘Gemini Earn(제미니 언)’ 상품이 대표적이다. 이자 지급 구조는 이렇다. 이자를 받으려는 고객이 제미니에 암호화폐를 맡긴다. 제미니는 해당 암호화폐를 제네시스에 빌려준다. 제네시스는 그렇게 빌린 암호화폐를 다른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 그렇게 받은 이자에서 자기 몫을 떼고 제미니에 준다. 제미니는 자기 몫을 떼고 고객에게 나머지를 지급한다. 이 상품으로 제미니는 최고 8% 수준의 이자를 고객에게 지급했다. 그러나 누이 좋고 매부 좋던 모두가 돈을 벌던 시절은 계속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FTX 사태 직후 제네시스가 고객들의 대출 상환을 중단하면서 9억 달러 규모의 제미니 고객 암호화폐도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졸지에 제미니 이자 상품에 암호화폐를 예치한 고객들은 제네시스 파산으로 무담보 채권자가 됐다.
제네시스 무담보 채권자 상위 50위 명단에서 14위로 기재된 업체는 한국의 암호화폐거래소 고팍스를 운영하는 기업 스트리미(Streami Inc.)였다. 무담보 채권 규모는 5676만 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700억 원에 이르는 금액의 고팍스 고객 암호화폐가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네시스에 고객의 암호화폐를 빌려주는 이자 상품을 판매한 제미니와 고팍스. 두 업체의 약관을 확인해 봤다. 제미니는 이자 상품 ‘제미니 언’ 프로그램을 중단하면서 관련 정보를 삭제했기 때문에 삭제하기 전 자료를 찾아서 확인했다. 제미니 이자 상품 약관은 상품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구로 시작했다.
“(이자 상품에 예치하는) 당신의 디지털 자산은 우리 소관을 벗어나게 됩니다. 대출거래와 관련해서 당신은 해당 자산을 전부 잃을 수도 있는 리스크를 받아들입니다.”
고객의 암호화폐를 빌려가는 기관이 제네시스라는 사실과 더불어, 제미니는 고객과 제네시스 사이에서 대출 중개를 하는 에이전트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고팍스의 경우 이자 상품 고파이(GOFi)의 위험성을 경고한 내용은 약관과 상품 설명 페이지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제23조 손해배상 조항에 “회사의 제휴사에 의해 발생한 피해는 제휴사의 약관에 준하며, 제휴사와 회원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고팍스 측은 이에 대해 “고파이 상품은 가입 시 상품 안내문 및 잠재 리스크를 팝업(화면에 별도로 나타나는 창) 안내를 통해 읽고 확인해야 가입이 진행된다. 또 상품안내서에는 부족한 부분은 있지만 주의사항에 위험성이 안내돼 있다”고 밝혔다.
제네시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하면서 제네시스와 고팍스 두 업체 모두 고객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약관과 상관없이 법적 다툼과 함께 피해 구제를 위한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최종 책임을 법적으로 누가 지게 되느냐는 결국 약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2023년 3월 현재 고팍스는 고객이 고파이 상품에 예치한 자산을 이자 포함 100% 상환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고팍스 측은 “약관이나 법률적으로는 거래소가 중개 운용에 대해 고지한 안내문을 여러 차례 확인해야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팍스 측이 아닌) 운용사 문제로 지급이 어려울 경우, 운용사와 고객 간에 해결해야 되는 이슈는 맞다. 하지만 고팍스 경영진 및 임직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외부 차입 투자를 통해 (고객의) 투자금을 상환하는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암호화폐거래소가 파산하면 거래소 지갑에 자산을 예치해 둔 고객의 암호화폐 소유권이 넘어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 건 지난해 5월이었다. 상장기업인 미국 암호화폐거래소 코인베이스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3월 31일자로 제출한 2022년 1분기 보고서가 공개되면서였다. 코인베이스의 보고서는 회사의 위험 요인을 언급하며 파산 시 고객 암호화폐 소유권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거래소 지갑에 보관된 암호자산(crypto assets)은 파산 시 파산자산(bankruptcy estate)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고객을 대신해 보관하고 있는 암호자산은 파산자산 처분 대상이 될 수 있고, 고객은 통상의 무담보 채권자로 간주될 수 있다.”
나스닥에 상장된 미국 최대 암호화폐거래소가 분기별 보고서에서 ‘파산할 경우 거래소 지갑에 둔 고객의 암호화폐의 소유권은 회사 측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밝힌 건 SEC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SEC가 투자자 보호의무 차원에서 고객의 암호화폐 소유권과 관련된 사항을 명확히 밝히도록 코인베이스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불명확한 디지털자산 관련법
새로운 연방의회 임기가 시작된 1월 중순 미국 하원에 의회 사상 최초로 디지털자산소위원회가 구성됐다. [동아DB]
셀시우스 측은 거래소 지갑에 보관만 하고 있던 고객의 소유권을 인정했지만, 코인베이스가 만약 파산한다면 고객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방의회 차원에서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도록 디지털 자산과 관련된 법을 제정하고 정비할 때까지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암호화폐 관련 자문을 하는 일부 변호사들이 쓴 글을 보면, 법적으로 불투명한 상황에선 거래소 지갑이 아니라 개인 지갑에 암호화폐를 보관하는 게 최선이라는 정도의 조언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후 새로운 연방의회 임기가 시작된 1월 중순, 연방하원에 의회 사상 최초로 디지털자산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정확한 명칭은 디지털자산 금융기술 포용 소위원회(Subcommittee on Digital Assets, Financial Technology and Inclusion)다. 현재 의회 상원과 하원에서 검토 중인 암호화폐 관련 법안과 앞으로 제출될 법안들은 모두 이 소위원회에서 다듬어지게 된다. 거래소 파산 시 암호화폐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규정하는 법안도 이곳을 거쳐야 한다. 디지털자산소위원회를 거쳐 명확한 법이 나올 때까지 파산한 거래소 지갑의 고객 자산 소유권을 둘러싼 다툼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