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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커피를 사랑한 사람들 한국편

  • 박영순|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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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커피 역사

일본의 커피 역사를 종합할 때 커피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황제에 오른 1863년 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커피 역사는 그 깊이가 얼마나 될까. 우선, 문헌에 근거한 내용만 살펴봐도 커피를 처음으로 마신 한국인은 고종황제가 아니다. 아관파천보다 10년 앞선 1886년, 관료이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커피집)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라고 적었다.

고종 20년(1883)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는 커피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인데, 1884년 3월 27일자에 “이탈리아 정부는 시험 삼아 차와 가배(커피)를 시칠리아 섬에 심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초대 주한 영국영사를 지낸 윌리엄 칼스는 1884년 5월 부임하면서 겪은 일을 훗날(1888) 저서 ‘Life in Corea(조선 풍물지)’에 담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커피를 조선 땅에서 마셨다고 증언했다. 칼스는 “서울에 부임하면서 숙박시설이 없어 조선 세관의 책임자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묵었는데, 뜨거운 커피가 제공돼 고마웠다”고 썼다.

이보다 조금 앞서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5년 펴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1884년 1월 한강변에서 커피를 접대받은 사연을 기록했다. 로웰은 1883년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11명으로 구성된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다녀온 공로로 그해 12월 왕실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왔다가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이 책 180쪽에서 커피를 마신 당일의 상세한 내용을 적었는데, 다음은 그 일부다.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언덕에 있는 ‘슬리핑 웨이브’라는 별장에 가서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

이 기록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을 겪은 것보다 12년이나 앞서 항간에 이미 커피가 후식으로 제공됐음을 보여준다. 로웰의 안내를 받아 미국을 다녀온 유길준도 1895년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사용 저서로 유명한 ‘서유견문’에서 미국의 상황을 전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우리네 숭늉 마시듯 한다”고 기록했다. 유길준의 이런 서술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을 미국과 비교한 것으로, 당시 한국에서도 흔치는 않더라도 커피가 음용됐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이다.





경복궁에서 커피 대접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1902년 세워진 손탁호텔. [사진제공 ·왈츠와닥터만커피박물관]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기록된 호러스 알렌은 1884년 경복궁에서 커피가 제공되고 있었다는 소중한 물증을 남겼다. 그는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어의(御醫)가 됐고 정2품 벼슬도 받았다. 알렌은 3년간 어의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1908년 ‘한국의 풍물(Things Korean)’이란 책을 썼는데, 어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궁중에서 대기하는 동안 시중들은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잎담배와 샴페인, 사탕, 과자를 끝까지 후하게 권했다. (…) 후에 그들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 품목에 홍차와 커피를 추가했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뒤에야 커피를 만났다는 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888년 장로교 선교위원회의 요청으로 조선에 와서 명성황후의 시의(侍醫)가 된 릴리아스 호튼은 1904년 펴낸 ‘상투잡이와 함께 보낸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서 커피를 언급했다. 그녀는 1889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황해도와 평안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현감과 지역 사람들에게 커피를 대접한 사연을 적었다. 서울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관북지방의 관리와 주민이 적어도 경복궁의 고종황제보다 7년 앞서 커피를 맛본 셈이다.

커피를 상업적으로 파는 다방이나 전문점의 역사를 두고도 일본이 우리보다 40여 년 앞섰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1909년 남대문역에 그들이 만든 깃사텐(다방의 일본식 표기, 喫茶店)을 한국 다방의 효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 역시 틀렸다.



윤용주의 다과점

일본은 개방 이후 해외 유학길에 오른 세대들이 귀국하면서 서구화한 문화를 퍼뜨리는 주체가 된다. 미국 예일대에서 수학하다가 심장병으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초나가요시는 1888년 4월 도쿄에 일본 최초의 커피하우스로 기록된 ‘가히차칸’을 열었다. 커피뿐 아니라 쿠바 시가와 보르도 와인, 버터와 빵을 팔고 바둑이나 트럼프 놀이를 할 수 있는 방을 별도로 뒀는데, 5년 만에 적자를 못 견디고 문을 닫았다.

조선에선 일본의 영향력과는 무관하게 상업적인 커피 판매가 1890년대부터 이뤄지고 있었음이 곳곳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독립신문’ 1897년 3월 20일자에 서울 정동의 ‘골스찰키(Gorschalki)’에서 자바커피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게재됐다. 골스찰키는 1884년 입국해 제물포에 상점을 차린 독일 상인이다. 당시 서울에서 신문광고에 날 만큼 커피가 대중화했음을 보여준다.

독립신문 1899년 8월 31일자엔 “윤용주가 홍릉 전차정거장 앞에서 다과점(Refreshments)을 개업하고 커피와 차, 코코아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 문구만으론 시설과 규모를 알 수 없지만 ‘윤용주의 다과점’은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할  만하다.

1899년은 제물포와 서대문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번성했던 항구의 서구 문화가 빠르게 서울로 옮겨진 해로 기록된다. 앞서 1885년 4월 제물포엔 대불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미국 군함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일본인이 세운 것이다. 이와 함께 1890년 이전까지 제물포엔 중국인 이태가 세운 스튜어드 호텔과 헝가리 사람이 소유한 호텔 드 꼬레 등 3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유럽인이 자주 출입한 만큼 커피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그러나 기록이나 물증은 없다.

서울에서도 독립신문 1897년 4월 24일자에 이탈리아인 삐이노가 “공사관 거리 16번 지역에 관청의 승인을 받아 호텔을 오픈하고, 14번 지역에는 와인과 시가 등을 파는 상점을 열었다”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이듬해 1월 4일자 광고를 보면, 이 호텔은 프랑스풍이며 명칭이 ‘서울호텔’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조선엔 커피가 수입돼 러시아 공사관과 외국인 접객시설 등에 조달되고 있었던 만큼 서울호텔에 있는 프랑스식 레스토랑에선 후식으로 커피를 제공했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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