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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비극으로 끝난 광해군 父子의 운명 |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

폐세자 이지의 ‘쇼생크 탈출’ | 을묘왜변과 조정의 대응

  • 허윤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최두헌 |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비극으로 끝난 광해군 父子의 운명 |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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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폐세자 이지의 ‘쇼생크 탈출’ - 비극으로 끝난  광해군 父子의 운명


허윤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조선시대에 묘호(廟號)를 못 받고 군(君)으로만 불린 임금이 둘 있으니,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이들은 반정(反正)세력에 의해 쫓겨나 폐주(廢主) 신세가 돼 쓸쓸하게 여생을 마쳐야 했고, 죽어서도 왕자 시절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 역시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지는데, 일기는 제왕의 역사 기록이 아닌 모든 편년체 기록물에 두루 붙일 수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1623년에 일어난 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고 반정세력에 의해 추대된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인조(仁祖)다. 복위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과 부친 김제남이 모두 비참하게 죽었고 자신도 폐서인(廢庶人)이 된 처지라 ‘철천지원수’ 광해군 부자를 죽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형과 동생을 해치고 모후를 폐한 광해군의 패륜을 구실로 반정을 일으킨 서인(西人)들로서도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게다가 어차피 목숨만 겨우 부지했을 뿐, 폐주와 그 일가의 삶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 내외, 폐세자와 폐빈 내외는 강화도의 각기 다른 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위리안치는 유배지 내 죄인의 거처 주변을 가시나무로 빙 둘러 울타리를 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무거운 형벌이다.

반정으로 쫓겨나 하루아침에 고귀한 왕족에서 몹쓸 죄인으로 전락해버린 충격적인 현실을 광해군 일가가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한창 젊은 나이인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 부부는 절망의 늪에 빠져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으며, 결국 함께 목을 매었다가 여종이 구출해 겨우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폐세자 부부가 서울에서 보내온 어떤 물건을 받은 이후 한 달 동안은 별 소란 없이 조용했다.

그러다 강화도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폐세자 이지가 탈출한 것이다. 도대체 사방이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이고 경계가 삼엄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21m 땅굴 판 폐세자




약 한 달 전 폐세자 부부가 받은 물건은 가위와 인두였다. 이지는 이 물건들을 보자마자 불현듯 탈출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일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위와 인두로 무작정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지가 땅을 파면 폐빈 박씨가 파낸 흙을 자루에 옮겨 담는 일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그랬듯이, 꺾을 수 없는 탈출 열망에 사로잡힌 이지는 26일 만에 무려 70자(약 21m) 땅굴을 파서 울타리 너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듀프레인이 탈옥에 성공해 벅찬 기쁨을 맛본 것과 달리, 이지의 탈출 기도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낯선 땅 강화도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다 도와주기로 한 자들이 준비한 배를 찾지 못해 군졸들에게 붙잡혔고,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폐빈 박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비통한 생을 마감했다.

이지가 탈출하다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신하들은 일제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일단 신하들의 청을 물리쳤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인목대비가 나서서 채근하자 인조는 더 이상 그의 죽음을 막기 어려웠다. 몇몇 대간도 처음에는 이지를 죽이라고 청했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바꿔 오히려 성덕(聖德)을 그르칠 뻔했다고 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사관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저 개인적인 처신에만 골몰한 조정 신하들의 작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폐인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 한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끝까지 목숨을 보전해주려고 하여 말씀에 간절하고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으니 그 지극한 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하로서는 그 미덕을 받들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법대로 집행해야 한다는 구실로 분분하게 논쟁을 벌였다. 옥당(玉堂)의 신하들도 몇 번이나 말을 바꾸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데 급급했으니, 임금을 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겠다.

  -인조실록 1년 6월 25일


살아야 할 이유


꼼짝없이 죽음을 맞게 된 폐세자의 태도는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의금부 도사 이유형이 와서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을 전하자 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작 자결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태껏 구차히 살아 있었던 것은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조용히 자결하려고 해서였다. 지난번 땅굴을 파고 탈출한 것도 이 때문이었으니 어찌 다른 생각이 있었겠는가.”(인조실록 1년 6월 25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한 이지는 문득 손발톱이 긴 것을 보고 깎고자 했으나 의금부 도사는 매몰차게 청을 거절했다. 죽고 난 뒤에라도 손발톱을 깎아달라고 도사에게 청한 이지는 부왕의 배소(配所)가 있는 서쪽 방향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 이야기로 유언을 끝맺었다.

“문천상이 8년간 북경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책망했으니, 어찌 그의 마음을 안 자이겠는가. 그가 죽은 뒤에 후대의 사람이 시를 지어 ‘원나라가 문 승상을 죽이지 않아서 임금의 의리와 신하의 충성 둘 다 이루었네’라 하였지.”(인조실록 1년 6월 25일)

말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간 이지는 허리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줄이 끊어져버리자 이번에는 질긴 명주실 끈으로 다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아들 내외의 비참한 죽음이 전해지자 폐비 유씨는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하루아침에 임금 자리와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다 잃어버렸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처참한 처지에도 신세를 지나치게 비관하지 않고 모진 삶을 꿋꿋이 이어갔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망해 이내 세상을 떠난 연산군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후 그는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나라에 변란이 계속되자 왕위 보전에 신경이 곤두선 인조에 의해 저 멀리 제주도까지 내쳐지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폐위되고 18년이 지난 인조 19년(1641)에 머나먼 남쪽 섬에서 임종을 지키는 이도 하나 없는 가운데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반정이라는 크나큰 정치적 사건 이후 폐출된 한 왕가의 삶은 이토록 처절하고 비극적이었다. 스스로를 문천상에 빗대며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남기고도 죽음의 구렁텅이로 기꺼이 뛰어든 폐세자 이지, 그리고 숱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간 폐주 광해군. 같은 고난에 처한 두 부자의 선택이 다소 엇갈리는 듯 보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 뒀는지를 두고 굳이 시비곡직을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오늘날 광해군은 학계와 대중으로부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것으로 한 많은 폐주 일가의 원혼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을묘왜변과 조정의 대응 -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

최두헌 |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한반도는 오랜 옛날부터 외적의 침입에 시달려왔다. 가장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는 왜구였다. 왜구는 일본 서부나 대마도를 거점으로 삼아 우리 남해안뿐 아니라 멀리 중국 동남부 지방까지 진출해 노략질을 하던 해적 집단이다. 고려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해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다. 조선 초기에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경책과 삼포(三浦) 개항 등의 유화책을 함께 써서 왜구의 침입은 줄었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늘 왜구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명종 10년(1555) 5월 16일 기사를 보자.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긴급하게 장계를 올려 보고하기를, ‘5월 11일에 왜선 70여 척이 와서 달량포 바깥쪽에 정박해 있다가 이진포와 달량포에서부터 동서로 나누어 상륙해 성 주변의 민가를 불태워버리고 결국 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왜선 11척이 바다의 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상륙해 일부는 뿔피리를 불며 불을 질렀고, 일부는 창을 휘두르거나 칼을 뽑아 들고 공격해 왔다. 가리포 첨사 이세린이 즉각 병마절도사 원적에게 보고하자 원적이 장흥 부사 한온, 영암 군수 이덕견과 함께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됐다.”(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왜적 향하는 칼끝마다 패배’




5월 11일, 왜구가 영암 달량포로 침입해 민가를 약탈하고 성을 포위하면서 이른바 ‘을묘왜변’이 시작된다. 얼마 뒤에 성이 함락돼 원적과 한온은 전사하고 이덕견은 왜구에게 사로잡혔다.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부대가 붕괴됐고, 왜구는 거칠 것 없이 영암의 어란포, 완도, 장흥, 강진, 진도 등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조정에서는 이준경, 김경석, 남치근 등을 장수로 삼아 전장으로 파견했고, 결국 5월 25일 영암에서 왜구를 격파해 난을 진압했다. 다행히 그달을 넘기지 않고 사태가 마무리됐지만, 전라도 남해안 지방이 초토화하고 병마절도사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앞의 기사를 기록한 사관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국가가 오래도록 태평하자 임시방편으로 하는 정사가 많았고, 기강이 문란해져 공공의 도리가 없어졌다. 조정의 각 관사와 지방의 관원들은 쓸데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오직 권세가에게 들러붙어 좋은 벼슬에 오르고, 뇌물을 바쳐 좋은 명성을 얻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길 뿐, 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남의 나라의 일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수나 재상들은 편안히 놀고 즐기며 항상 은혜와 원한을 갚는 데만 신경 쓰다가, 변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정은 방비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변방은 전투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왜적의 칼끝이 향하는 곳마다 패배했다. 왜적이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오듯 쳐들어왔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0년 5월 16일



당시 조선이 온전히 태평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대규모의 정규전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쟁의 위협은 늘 존재했다. 북방의 이민족은 물론이고 왜인만 해도 중종 5년(1510)에 삼포왜란을 일으켰고, 을묘왜변이 있기 불과 10년 전에도 사량진 왜변을 일으켰다.

왜구는 해적인지라 언제든 침입해 올 수 있었고 전투에 익숙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의 병사들은 흉년으로 인해 굶주렸고, 훈련 수준도 엉망이라 적을 맞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빈약한 병력마저 부족했다.


대마도주 “왜적 방비해야”



왜변이 있기 두 달여 전인 3월 20일, 대마도주는 조선으로 보낸 서계(書契)에서 이미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해 올 조짐이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국의 서융은 작년 10월부터 올봄까지 명나라를 침략할 목적으로 수만 척의 배를 앞다투어 바다 건너로 보냈다고 합니다. 서융들이 모의한 내용을 들어 보니 ‘조선의 바다를 통해 명나라로 가면 바닷길이 매우 가까우니, 조선의 바다를 먼저 확보해야 명나라를 침략할 수 있다’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좁은 바다를 지나간다면 모조리 무찔러 우리의 충성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해안 지역을 굳게 방어해 전투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명종실록 10년 3월 20일)

서융은 원래 중국 서부 지역의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일본 규슈 서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대규모로 조선의 근해를 지나 명나라에 침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두 달 가까이 지난 5월 12일에야 대비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왜구가 최초로 침입한 것이 5월 11일이니 조정은 적이 침입한 다음 날에야 그 사실도 모른 채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구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5월 16일이다. 관리 부실로 봉수(烽燧)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5일이 지난 후에야 침입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조정은 우왕좌왕하며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을묘왜변은 왜구가 일으켰지만, 피해를 키운 것은 불안정한 평화를 태평한 세월로 착각한 조정의 준비 부족과 군대의 기강 해이였다. 을묘왜변 이후 각성한 조선은 나름의 준비를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망국 직전까지 몰렸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분단국가인 우리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불안정한 평화 속에 있다. 평화를 위한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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