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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할 수 없는 누군가와 공존하는 법

  • 정재민 | 전 판사·소설가

소통할 수 없는 누군가와 공존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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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형사O단독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법대 앞에 앉으면 마이크에 대고 처음 하는 말이다. 개정 선언이라 한다. 영화감독의 큐 사인같이 이 말에 판사, 검사, 변호인, 참여관, 경위, 교도관이 각자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경위가 사건번호를 부르면 해당 피고인이 법대 앞으로 나온다. 변호인이 있으면 함께 나온다. 재판장이 보기에 피고인석은 왼쪽에, 검사석은 오른쪽에 있다. 피고인석과 검사석은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변호인석은 피고인석 오른쪽 옆에 나란히 붙어 있다. 피고인, 변호인, 검사가 모두 자리에 반듯하게 앉으면 재판장은 그들의 옆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재판장과 피고인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았다. 피고인석이 지금 증인석이 있는 법정 한가운데 있었다. 이러한 법정 구조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비판이 제기돼왔다. 검사와 피고인은 모두 재판 당사자로서 대등한 기회와 권한이 주어져야 하는 만큼 자리도 대등하게 배치돼야 한다는 것이다. 피고인 입장에서 보면 정면에는 재판장, 왼쪽에는 검사, 오른쪽에는 변호인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위압감을 느낀다거나 변호인이 바로 옆에 없어 상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었다. 현재의 법정구조가 피고인으로서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재판장인 나로서는 재판 내내 피고인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하고 비스듬히 쳐다봐야 하는 게 아쉽다.

피고인이 피고인석으로 나올 때 불구속피고인은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나오지만 구속피고인은 구금실에 있다가 나온다. 구금실은 판사가 보기에 법정 오른쪽에 있다. 피고인의 이름이 불리면 구금실 안에서 교도관이 포승줄과 수갑을 풀어준다.

구금실 문을 통해서 수의 입은 피고인이 법정 안에 등장하면 방청석에 앉아 기다리던 가족은 대개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법정에서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되므로 어떤 가족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음소리를 삼키려 애쓴다.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기도 한다.



법대생 시절 법정 방청을 하면서 구속피고인을 처음 실제로 본 때가 잊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피고인들을 굴비처럼 서로 엮어놓은 흰 포승줄. 죄를 빌듯이 가슴팍에 모은 두 손목에 채워진 수갑. 고개를 푹 숙인 피고인의 굽은 등짝. 그 모든 것이 비인간적이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남인데도 그런 감정이 드는데 가족이라면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프겠는가.



첫 만남-진술거부권 고지

물론 지금은 구속피고인을 보아도 별 느낌이 없다. 심지어 부검 중인 시체를 보아도 무덤덤하다. 피투성이 환자를 수술하는 의사처럼 숙련됐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비정해졌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질문을 받더라도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판사가 피고인을 처음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건네는 말이다. 헌법 제12조는 모든 국민은 형사상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진술거부권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사유 하나만으로도 몇 년 동안 진행한 재판 전체가 파기될 수 있고, 경찰이나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도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학교에서 진술거부권을 처음 배울 때에는 의문이 있었다. 범죄자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맞혀보라고 하면 국가기관이 나서서 모든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점점 내 자신의 죄가 많아지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서 진술거부권의 취지를 공감하게 됐다.(가령 아내가 “이번 달에 잘못한 거 다 이야기해봐”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라.)



인정신문 때 보고 듣는 것

인정신문(認定訊問)은 피고인에게 이름, 나이, 직업, 주소, 등록기준지를 묻는 절차다. 피고인의 경우 경찰, 검찰, 법원에서 똑같은 인정신문의 질문들을 반복해서 받아야 하므로 왜 같은 질문을 거듭하는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인정신문을 하는 이유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잘 설명해준다.

“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이 내게 다정스럽게까지 생각되는 어조로, 본인이 확실한지를 알아보는 인정신문을 다시 해서 짜증났으나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엉뚱하게 다른 사람을 재판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실수이기 때문이다.”

피고인들 못지않게 판사도 인정신문이 번거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진술거부권 고지에 이어서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해야 한다.

인정신문의 내용은 피고인 고유의 특성이나 내면과는 관련이 없다. 공산품의 일련번호처럼 사회가 개인을 구별하기 위한 표지일 뿐이다. 그러나 시선, 말투, 자세 등 답변 태도에서 피고인의 성격이 짐짓 드러난다. 껌을 씹는 피고인도 있었다. 입에 뭐가 들어 있느냐고 물어보니 변호사가 “거 봐요, 진작 껌 뱉으라고 했잖아요”라고 피고인을 나무랐다. 직업을 물어보면 종종 기상천외의 답변이 나온다. 동료 판사의 법정에서 한 여성 피고인이 직업을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놀리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고 한다. 그렇다고 직업란에 ‘대통령’이라고 쓸 수는 없다. 헌법상 현직 대통령은 기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료 판사는 할 수 없이 ‘미상’이라 적었다고 한다.

다른 법정에서는 직업을 ‘지구방위군총사령관’이라고 답한 피고인도 있었다. 담당판사가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피고인은 “60억 인류와 헌법 중에서 뭐가 더 중하냐”고 되물었다. 판사가 어려운 질문이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피고인은 “그것도 모르느냐. 너 초등학교는 나왔냐. 나 이제 너랑 말 안 해” 하면서 팔짱을 끼고 토라졌다고 한다.


눈빛과 목소리의 중요성

내게 인정신문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피고인과 처음 시선을 맞추고 목소리를 섞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영혼이 눈빛과 목소리와 체온을 통해서 육체 밖으로 삐져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서로 눈빛과 목소리의 진동과 체온을 나누는 것이다.

나는 재판의 핵심이 만남에 있다고 생각한다. 판사가 사무실에서 기록을 읽고 분석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법정에서 판사와 피고인이 대면하는 시간의 가치를 능가할 수는 없다. 법정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가 수없이 맞부딪히고 뒤엉킬 때만큼 판사가 판사가 되고 피고인이 피고인이 되는 순간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을 만나는 시간보다 사무실에서 기록을 보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법정에서도 판사가 피고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기록에만 코를 박은 채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도 그런 적이 많다.

사실 기록만 보고도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판결문을 써낼 수 있다. 그게 더 쉽다. 그러나 그러한 재판을 재판이라 할 수는 없다. 만남은 인간관계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피고인을 만난다고 해서 내가 그의 영혼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염라대왕처럼 피고인이 정직한 사람인지, 선한 사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척 보면 감이 온다는 판사도 더러 있지만 나도 많은 판사가 토로하는 바와 같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헷갈린다. ‘감’이라는 것이 안 와서가 아니다. 그런 ‘감’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투명한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처럼 외부 세계의 진실이 그대로 내면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대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콤플렉스, 트라우마, 죄의식, 가족관계, 뿌리 깊은 기억 등이 외부인에게 투사돼 일으키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복잡하게 나쁜 우리들

사람이란 존재는 타인이 단번에 척척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여러 모순된 측면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므로 한 측면이 있다고 해서 반대의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따뜻한 날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얄밉도록 춥기도 한 것처럼.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우리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기만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 믿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재판을 하면서 절감한 말이다. 내가 만난 재판 당사자 수만 명은 대부분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 혼자 예외일 수 있겠는가. 피차 복잡하고 나쁜 사람인 만큼 판단하고 단정하는데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복잡하고도 나쁜 사람들을 오래 대하고 있으면 묘한 인간미에 빨려든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강력한 매력을 뿜어내는 주인공은 지독하게 복잡하고 나쁜 사람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도 무고한 아랍인을 총으로 여러 차례 쏘아 죽인 사람이고,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도 노파와 무고한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사람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들의 사연을 읽어가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언론에 단면이 비친 흉악범의 이야기를 읽으면 세상에 어떻게 저런 악마가 있나 싶어도, 그들의 눈빛을 대하고 오랜 시간 재판을 하면서 수백, 수천 페이지 수사기록에 있는 그들 삶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판사도 그들을 오로지 미워할 수만은 없다. 그런 판사가 내린 판결의 형량은 흉악범의 인생 최악의 사건을 소개한 언론기사만 본 사람들이 가늠하는 형량과 괴리가 클 수밖에 없다.

내가 법정에서의 ‘만남’을 중시한다고 해서 ‘소통’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도 법원에서 정책적으로 가장 강조해온 것이 ‘소통’이었다.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국 법원이 경쟁적으로 소통 행사를 벌인 적도 있었다.



공존의 출발점

그러나 나는 소통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칼자루를 쥔 판사가 칼날 앞에서 묶여 있는 피고인과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소통은커녕 피고인에게 내가 지옥(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 했다)이라도 안 되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냉소는 아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 정상이고 기본값이라 생각한다. 서로 살아온 역사와 환경과 그로 인해 구축된 성격이 다른데 소통이 되는 것이 정상인가. 공감, 이해 따위의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며 소통하자고 덤벼드는 사람과 소통이 잘된 적이 없다.

물론 어떤 사람과는 수월하게 소통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서로 유사한 마음과 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유사할 뿐이다. 그런데도 서로 온전히 통했다 섣불리 믿고 달려들면 낙심 끝에 상처만 남기고 관계가 끝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인간관계를 추운 날 내버려진 고슴도치들의 곤경에 비유했다. 그대로 있으면 춥고 껴안으면 서로의 가시에 찔리고.

법정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 더 유용한 것은 소통보다 불통인 상황에서 공존 아닐까. 공존의 출발점은 섣불리 소통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함부로 남의 감정을 넘겨짚지 않고 상대의 말부터 듣는 것이다. 내가 감히 당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하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꺼이 들어주겠다, 듣되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당신의 불행을 내 행복의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내 가슴의 서랍에 고스란히 담아두다가 당신이 민망할 때가 되면 깨끗이 잊어주겠노라는 마음으로. 정작 나는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런 공존에 대한 기대를 단념하고 싶지 않아서 해보는 말이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舊유고유엔국제형사 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제10회 세계문학상,  제1회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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