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부모님은 맥심, 나는 카누… 동서식품의 대를 잇는 유혹

[기업언박싱] ‘라떼는 말이야’ 카누 라떼 마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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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11-17 1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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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韓기업 100년 혁신상품’ 8위 커피믹스

    • 입맛 변화·커피전문점 인기에 돌파구 모색

    • 코로나로 재택근무 늘자 사무실 수요↓

    • 정작 ㈜동서 주가는 두 달 새 87.8% 급등

    • 홈카페 문화 확산, 한때 카누 점유율 90.6%

    • 최근 카누 라떼 8종 내놔, 겨울 시장 공습

    동서식품은 11월 2일 ‘카누 돌체라떼’ ‘카누 민트초코라떼’를 출시했다. 이로써 카누의 라떼 제품은 8종이 됐다. [동서식품 제공]

    동서식품은 11월 2일 ‘카누 돌체라떼’ ‘카누 민트초코라떼’를 출시했다. 이로써 카누의 라떼 제품은 8종이 됐다. [동서식품 제공]

    길쭉하게 잘빠진 노란 스틱형 포장지에 원두와 설탕, 프리마가 담겼다. 초록색 띠를 뜯고 종이컵에 뜨거운 물과 함께 부으면 마법이 나타난다. 달짝지근한 첫맛과 식도를 타고 흐를 때의 걸쭉함을 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목수였던 아버지는 예순이 지나고도 마법에서 좀체 빠져나오질 못한다. 먼지 풀풀 날리는 현장에서 후후 불며 마시던 커피믹스는 고단한 노동의 윤활유였다. 사무직이 출근도장 찍고 마시던 커피믹스는 일과가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맛의 밑바닥에는 추억이 앉았다. 산업화 시대를 풍미한 한국인의 입맛이다. 


    e메일보다 세상 많이 바꾼 커피믹스

    ‘카누’의 광고 모델인 공유. [동서식품 제공]

    ‘카누’의 광고 모델인 공유. [동서식품 제공]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했다. 가전제품이 발명돼 가사노동에 투여하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자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 여성에 대한 교육 투자도 크게 늘었다. 휴대성, 간편함, 저렴함을 갖춘 커피믹스도 한국 사회를 바꿨다. 고가의 커피를 즐길 여유가 없던 서민들이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손쉽게 커피믹스를 집어 들었다. 사무실 여직원이 커피를 타주던 인습(因習)을 깨뜨리는 데도 한몫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12월 9일부터 올해 5월 29일까지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이라는 특별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이 중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선정한 ‘주요 혁신상품’ 순위에서 동서식품이 1976년 개발한 일회용 커피믹스가 8위에 올랐다. 이름은 ‘맥스웰 하우스 커피믹스.’ 식품 중에는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1956년·6위)과 최초의 국산 라면 ‘삼양라면’(1963년·4위)에 이은 3위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내놨던 무료 전자메일 ‘한메일 서비스’(1997년·10위)보다 앞선 순위다. 한국 기업사(史)에 한정 짓자면 ‘e메일보다 라면·조미료·커피믹스가 세상을 더 많이 바꾼’ 셈이다. 

    1987년은 민주화의 해로 기억되지만, 식품업에도 전환의 해였다. 같은 해 동서식품이 스틱형 포장지에 넣은 ‘맥심 커피믹스’를 선보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맥심 모카골드’가 탄생했다. 동서식품은 지난해 맥심 모카골드 출시 30주년을 맞아 대대적 홍보자료를 내놨는데 2018년 기준 연간 판매량이 61억 잔이라고 강조했다. 자부심이 한껏 느껴지는 대목이다. 출시 후 왕좌를 놓치기는커녕, 도전의 위협에조차 노출된 적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동서식품의 시장 지배력은 견고하다. POS(판매시점정보관리 시스템) 데이터 기준으로 올 상반기 조제커피(커피믹스) 시장에서 동서식품의 점유율은 87.6%다. 2위 남양유업(8.0%)을 10배 이상 압도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86.0%)보다 점유율이 1.6%포인트 올랐다. 두세 개 업체가 엎치락뒤치락하거나, 다크호스라도 떠올라야 ‘기사 쓰는 맛’이 있을 텐데, 아무래도 난감하다. 



    실은 동서식품에도 속사정이 있다. 상반기만 놓고 보면 전체 커피믹스 시장 규모는 2017년 5312억 원에서 2020년 4306억 원으로 18.9% 줄었다. 같은 기간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매출액도 4470억 원에서 3773억 원으로 15.6% 감소했다. 범위를 2017~2019년 하반기로 돌려도 시장규모는 13.0%,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매출액은 10.7% 뒷걸음질했다.

    입맛이란 경제가 발전할수록 고급화·다양화하기 마련이다. 2000년대 이후 원두커피의 인기가 높아졌다. 골목길마다 커피전문점이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캡슐·에스프레소 등 커피머신 보급이 확산하면서 소비자의 선택지도 넓어졌다. 프리마나 설탕의 과다 섭취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점도 커피믹스 시장에는 악재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변수가 됐다. 규모가 큰 대기업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회사 탕비실용 커피믹스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고공 행진하는 주가, ‘홈카페’ 수혜주

    1976년 나온 동서식품의 ‘맥스웰 하우스
커피믹스’.

    1976년 나온 동서식품의 ‘맥스웰 하우스 커피믹스’.

    회사를 둘러싼 상황이 녹록지 않은데 주가는 되레 상승 곡선을 탔다. 동서식품의 지분 50%를 보유한 지주사 동서는 11월 12일 2만96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올 1월부터 7월 중순까지 동서 주가는 1만5000원~1만7000원 사이를 횡보했다. 그러다 7월 27일 2만 원을 돌파하더니 9월 25일에는 3만50원까지 뛰었다. 두 달 새 주가가 87.8%나 올랐다. 

    커피업계는 ‘홈카페’라는 낱말에 주목한다. 언택트 소비가 일상화하면서 외출을 꺼리는 대신 집에서 커피 한잔을 즐기는 수요가 늘었다. 수년 전부터 카누에 ‘내 손안의 작은 카페’라는 슬로건을 달아온 동서식품에는 호재다. 최경태 동서식품 홍보팀장은 “재택근무 확산으로 사무실에서의 커피믹스 수요는 줄었지만, 반대로 카누 매출이 늘었다”고 말했다. 

    카누는 2011년 10월 출시됐다. 최 팀장은 “카누가 처음 개발되는 과정에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소비자에게는 스틱형 포장지에 든 원두커피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동서식품은 원두커피의 맛과 향을 유지하면서도 커피믹스의 휴대성과 간편함을 가미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개발에 공을 들였다. 카누는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뽑은 커피를 냉동 건조한 후 커피 파우더에 미세하게 분쇄한 볶은 커피를 코팅한 제품이다. 

    카누는 지난해까지 누적 64억 잔이 팔렸다. 동서식품 총매출에서 10% 안팎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이 성장세라 전망은 밝은 편이다. 2015년까지만 해도 7억 잔이던 판매량이 지난해 12억 잔으로 늘었다. 맥심 모카골드와는 정반대로 해마다 성장하는 추세다. 코로나 호재를 본 올해도 호성적이 예상된다. 동서식품에 따르면 올해 1~10월까지 카누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7% 늘었다. 시장 지배력은 더 커질 여력이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시장조사기관 AC닐슨 통계를 보면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에서 카누의 점유율은 2018년 86.1%, 2019년 87.7%에서 올해 9월 89.3%로 뛰었다. 8월 한때는 점유율이 90.6%를 기록하기도 했다. 


    ‘라떼 공습’

    겨울이 오면 라떼가 뜬다. 동서식품은 11월 2일 ‘카누 돌체라떼’ ‘카누 민트초코라떼’를 출시했다. 10월 7일에는 ‘카누 디카페인 라떼’ ‘카누 티라미수 라떼’ ‘카누 바닐라 라떼’가 나왔다. 두 달 새 라떼 신제품 5종이 쏟아졌다. 이로써 카누의 라떼 제품은 8종이 됐다. 커피업계에서는 20~30대 여성들이 라떼를 선호한다고 본다. 티라미수와 민트초코는 20~30대 여성 사이에서 각광받는 디저트 메뉴다. 시나브로 동서식품의 타깃 고객층이 베이비부머(1955~1974년생)에서 밀레니얼(1980년대 이후 출생)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최경태 팀장은 “신제품 1종이 나오려면 기획과 시장조사, 연구개발, 시제품 제작, 소비자 조사 등 각종 단계를 거쳐야 해 최소 1년이 걸린다”면서 “카누는 아메리카노가 ‘메인스트림’이지만, 소비자의 기호가 워낙 다양해져 디저트 형식의 라떼 등 신제품을 많이 내고 있다”고 말했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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