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한국, ‘정치적 균형자’ 집착 버리고 ‘경제통합 촉매’로 나서야

한·중·일 ‘政經 변주곡’과 동북아 균형자론

  • 글: 최영종 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oldchoi@catholic.ac.kr

    입력2005-05-23 14: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한·일 경제공동체를 달성한 후 이러한 개방적 공동체가 동아시아 전반에 확산될 때만 이 지역도 서유럽과 같은 ‘평화지대’로 정착할 수 있다.
    • 그 과정에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한국, ‘정치적 균형자’ 집착 버리고 ‘경제통합 촉매’로 나서야

    동북아 경제통합 과정에서 한국은 중국 편에서 개도국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고, 일본 편에서 자유화를 적극 지지할 수도 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지역경제의 통합 움직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자유화의 필요성은 커지고 있지만, 148개의 회원국이 합의를 통해 자유화를 이뤄내야 하는 세계무역기구(WTO)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해묵은 갈등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선진국들마저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맞는 소수의 국가들이 자유무역협정(FTA)의 형태로 경제통합에 나서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독 동아시아만큼은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오랫동안 동떨어져 있었다. 미약하나마 경제통합의 움직임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으로 대표되는 일부 국가에만 국한돼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경제규모나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경제통합의 주도권은 아세안(ASEAN)에, 금융이나 투자의 중심 역할은 싱가포르와 홍콩에 넘겨준 채 아시아의 변방에 머물러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동북아가 최근 들어 용틀임을 하고 있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이 오랜 침묵을 깨고 경제통합을 비롯한 포괄적 협력에 나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동아시아의 통합을 촉진하고, 나아가 동북아가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동북아 경제협력의 필요성은 1997년의 경제위기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깊이 인식됐다. 특히 이 무렵에 아세안 10개 회원국과 한·중·일 3국이 함께 출범시킨 ‘아세안+3’ 역시 한·중·일 3국이 제각각 아세안과 협력 채널을 가동하는, 이른바 ‘아세안+1’의 병렬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북아 3국간 협력이나 공동보조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용틀임

    그후 3국간 정책협력이나 입장 조율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1999년 11월 마닐라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동에서 동북아 3국간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부터다.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동북아 경제협력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다. 세계무역 각각 2, 6, 11위를 차지하는 일본, 중국, 한국이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한다는 것은 경제적 효율성 제고나 국제무대에서 교섭력 증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엄청난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한·중·일 3국은 자원, 기술, 자본, 시장 등 경제활동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상호 보완성과 경쟁력을 갖춰 독자적인 지역경제권과 경제협의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의 첨단기술과 자본, 한국의 생산기술과 개발경험, 중국의 풍부한 노동력과 천연자원은 3국간 경제협력이 어떠한 형태로든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중·일 FTA로 무역흑자 노려

    특히 한·일 FTA가 한국의 무역역조를 심화시킬 우려가 있는 데 반해, 한·중·일 FTA는 중국에 대한 무역흑자를 증대하는 효과가 있어 우리나라가 무역수지 면에서 균형을 이루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중·일 3국은 제도나 정치의 통합이 없이도 경제교류가 급속히 확대·심화되어 이미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2004년 기준으로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등장했고, 일본은 미국에 이어 3위의 교역 상대국이다. 일본에는 중국이 미국에 이어 2위, 그리고 한국은 3위의 교역 상대국이다. 중국에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2위, 한국은 홍콩에 이어 4위의 무역 상대국에 올라 있다.

    이와 같이 긴밀한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는 경제통합의 필요성과 기대이익을 증대시키고 있다.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국가나 경제도 서로 가까워질수록 좋은 점이 많지만, 이에 따른 갈등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현재 한·중·일 3국간 무역마찰이 급증하는 것도 경제관계의 심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쟁해결과 국가마다 상이한 법과 제도의 조화나 통일은 앞으로 경제통합의 핵심적 요소가 될 것이다. 유럽통합의 경험은 이와 같은 법적·제도적 협력이 경제통합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 정치통합으로 가는 교량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제통합은 구성원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고, 이를 구심점으로 주변에 평화를 확산시키는 효과도 가져온다. 우리 정부도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는 물론, 한반도 평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동북아 경제통합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경제통합과 안보 공동체는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유럽통합 역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안보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NATO는 서유럽에서 경제통합이 원활히 진행됐기에 실효성 있게 운영될 수 있었다.

    동북아 경제통합은 한·중·일 사이의 안보협력은 물론이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 보유 시도, 정치적 폐쇄성과 불안정, 그리고 낙후된 인프라 등이 동북아의 경제협력 확대와 궁극적인 통합에 커다란 장애물로 존재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한·중·일 3국간 협력 증진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고 지원할 인센티브로 작용할 것이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 경제통합,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 그리고 한반도 평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 현실은 서로 유익하다고 해서 항상 협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경제 자유화나 통합과 같이 서로 이익이 되는 방안이 정치논리에 의해 무산된 예는 무수히 많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국내 정치적으로 이득을 보는 집단과 손해를 보는 집단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국제적으로도 더 많은 이득을 챙기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경제통합은 불가피하게 국가의 정책 자율성과 주권에 대한 침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통합 시도

    지역통합에 대한 이론을 보면 국력의 격차가 크지 않은, 발전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통합이 이뤄지기 쉽다고 분석하고 그 이유로 통합이 초래할 국가간, 집단간 갈등이 크지 않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이러한 잣대를 동북아시아의 현실에 대보면 한·중·일 3국을 하나로 묶을 만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공통분모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고도로 발달한 선진 공업국이며, 한국은 경제발전 수준으로 볼 때 중상위층에 속하는 국가이고, 중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 시스템, 관습, 법·제도·인프라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부조화를 표출, 경제통합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크다. 더구나 최근 불거진 3국간 역사 및 영토 문제를 둘러싼 분쟁, 민족주의의 전면화 등은 동북아 경제통합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 경제통합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동북아 경제통합에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보다 중국 문제로 모아진다. 경제적으로 개도국 지위에 있는 정치적 강대국인 중국의 존재는 경제통합의 역사상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경제통합은 선진국 사이에서 주로 발견되고, 개도국과 개도국의 통합은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 최근 들어 미국과 멕시코를 포함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EU의 동유럽 확대에서 보듯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통합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통합은 경제발전 수준이나 사회보장 수준의 격차 때문에 구성원에게 큰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어렵다. 선진국-개도국 경제통합이 성공한 경우는 개도국이 선진국과의 통합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거나 민주화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같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진국이 주문하는 자유화나 사회보장 수준, 혹은 환경기준의 강화 같은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타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멕시코가 역사적으로 앙금이 남은 미국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보하면서 NAFTA를 체결했으며, 구 동구권 국가들도 EU 국가들이 내세우는 엄격한 정치적, 경제적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비로소 EU에 가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북아 경제통합은 개도국인 중국을 포함하는 선진국-개도국 통합 사례의 하나로 관심을 모을 뿐 아니라 개도국인 중국이 정치적 강대국이란 점에서도 독특하다. 중국은 군사력, 인구, 영토, 경제 규모를 종합해 볼 때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중국시장 의존도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중국과 이들 나라 사이의 경제관계가 단절될 경우 한국이나 일본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더구나 국민이 느끼는 고통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가 훨씬 더 클 것이므로,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에 대해서 경제관계 단절을 무기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중국과 마늘 분쟁을 벌이면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비록 지금은 개도국의 지위에 있지만 경제적으로 급상승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커진 중국이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설 만한 이유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설령 나선다고 해도 선진국의 압력에 굴복할 가능성도 크지 않기 때문에 동북아 경제통합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적 균형자’ 집착 버리고 ‘경제통합 촉매’로 나서야

    최근 동북아에서 불거진 역사 및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경제통합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중국의 관세율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높다. 따라서 동북아 3국간 경제통합을 위해서 중국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양보해야 할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WTO를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상황이다. 중국은 주로 일본을 견제한다는 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아세안과 FTA 체결에 합의했고 동북아 FTA에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전자는 일·싱가포르 FTA에 대한 대응이라는, 그리고 후자는 자신이 배제된 한·일 FTA에 대한 견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만큼 중국에 있어 FTA를 통한 실질적인 자유화 추진이나 FTA의 실현 가능성은 둘째 문제인 것이다.

    중국에 이어 동북아 경제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바로 일본 문제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개도국 중국과 대면하고 있는 경제 대국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미숙아에 불과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없는’ 동남아시아 경영에 나름대로 성공했으나 중국이 동아시아 무대에 복귀한 이후에는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나 동아시아 안보, 경제협력 등에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의 그늘에 안주해왔기 때문에 정당성, 신뢰, 리더십의 측면에서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감정싸움

    더구나 일본경제는 역내 리더가 되기에는 너무나 폐쇄적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량으로 산출한 무역의존도가 20% 미만으로 중국보다도 낮은 바닥권에 있으며, 국내 고정자본 형성에서 차지하는 해외 직접투자(FDI)의 비중도 가장 폐쇄적인 미얀마 수준에 버금가는 1%에 불과하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일본시장이 역내 교역이나 투자의 중심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농업분야의 자유화에 대한 반대가 심하다. 이런 사실은 동북아 통합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일본이 중국에 대해 채찍을 휘두를 형편도, 당근을 제공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강대국 미국이 인구가 자국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멕시코와 FTA를 맺으면서 멕시코의 낮은 임금이 자국 노동시장에 미칠 부정적 영향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치적 영향력이 별로 없는 일본이 자국보다 인구가 10배나 많은 저임금 국가인 중국과 원만하게 통합에 합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 경제통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제통합이란 고도의 정치과정으로 협상이나 실제 통합과정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간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에 따르는 의무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채찍과 당근을 제공할 수 있는 적절한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북아의 리더로 가장 강력한 후보인 일본은 보호주의, 과거사 문제, 신뢰구축 노력의 불충분, 미국의 그늘에서 안주하려는 경향 등으로 인해 지도력을 발휘할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또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아직도 신뢰받는 역내 리더와는 거리가 멀다. 자국의 지속적 성장을 유지하는 데 전력투구할 뿐 지역에 대한 기여는 뒷전이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경제 역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을 완료한 상태가 아니다. 게다가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못하고, 법치주의 전통도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대외정책을 책임있게 추진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또한 중국의 경제발전은 주변국 경제의 공동화(hollowing out) 현상을 심화할 우려를 낳고 있으며, 핵까지 보유하고, 급속히 현대화하고 있는 거대한 군대는 주변국가를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어느 한 나라의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동북아나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통합을 이루려면 일본과 중국의 긴밀한 협조관계가 필수적이다. EU도 통합 과정에서 오랫동안 앙숙이던 독일과 프랑스가 협력해 리더십을 창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과 중국은 서로 불신이 깊으며 전략적으로도 경쟁 관계에 있다. 중국은 아직도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 가능성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으며, 일본도 중국의 급부상과 자국의 후배지(後背地)인 동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아세안을 둘러싸고 전개된 일·중간 FTA 대결은 최근 양국간 직접적 충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조어도(釣魚島) 영토분쟁 등으로 종종 감정적으로 대립해온 양국은 이제 민족 자존심의 충돌이 경제협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까지 경험하고 있다. 최근 상하이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일 시위와 이로 인한 양국 사이의 감정적 대립이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양국간 대립의 골이 깊어지는 원인은 지역체제의 측면에서 국력이 급신장한 중국이 동아시아의 역내 정치에서 적극적 역할을 모색하고, 이에 대응해서 일본도 군사력 강화와 동시에 군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세력배분이 변하는 와중에 새로운 체제가 정립되지 못했고, 역외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불완전한 패권질서가 지속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해 전략적 동반자 겸 잠재적 위협세력이라는 애매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은 지역 리더가 되는 데 필요한 기회나 책임은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비용이나 역할 분담을 강화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정체성이 불분명한 일본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역내 불안만 고조시키는 형국이다.

    근래에는 미국이 중국에 우호적으로 변하면 일본이 불안해하고, 미국이 일본에 가까이 있으면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중·일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략적 균형자다. 현재 중국과 일본은 미국과 관계가 소원해질수록 동아시아가 더욱 소중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양국간 영향력 확대 경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추세다. 이는 3국에서 신세대 리더십이 정치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이 지닌 과거로부터의 자율성, 자신감, 그리고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인 동시에 국내 정치세력이 정치적 계산에서 의도적으로 부추긴 측면도 강하다.

    중국에서도 새로운 리더십이 자리잡으면서, 적실성을 상실한 공산주의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주의의 유용성이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당내 기반이 취약한데도 개혁을 모토로 일본 총리의 자리에 오른 고이즈미에게도 민족주의의 고양이 자신의 입지 강화에 결코 해로울 리 없을 것이다.

    한국은 동북아 민족주의의 피해자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국내 문제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지도자가 정치적 목적에서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민족주의란 내적인 일체감을 고양한다는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일단 분출되면 통제하기 어려운 데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유사한 대응을 불러일으키는 등 문제점도 적지 않다.

    최근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나 동북아 지역 협력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다툼은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소극적 의미의 경쟁일 뿐,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서 경제협력이나 통합을 촉진하겠다는 의지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감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민족주의의 발호는 중국과 일본이 협력해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경제적 취약성에 노출된 우리나라는 동북아 협력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최대의 수혜자가 되겠지만, 동북아가 감정적 민족주의의 경연장으로 변질되면 최대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자리잡은 우리에게는 현재 양국간 협력을 촉진하고, 스스로 감정적 민족주의 분출을 자제하며, 아울러 성실한 자세로 동북아 통합에 매진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가 부여되어 있는 셈이다.

    동북아 경제통합과 관련해서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에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을 국정목표로 제시한 바 있고, 최근에는 중·일 사이의 전략적 균형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통합된 동북아 시장의 중심이 되고,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와 같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북아의 정치 현실은 경제통합이 단기간에 이뤄질 전망이 매우 어둡다는 점과 중·일 사이의 균형자 역할은 미국이나 담당할 수 있다는 현실론을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경제중심’ 구상은 동북아에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시장을 구축해서 세계경제의 성장축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우리가 경제 중심지, 비즈니스 중심지의 위상을 확립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참여정부는 통합이 가져올 경제적 이득의 향유는 물론이고 대립과 불신으로 점철된 동북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구상을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의 가장 큰 문제는 내용 자체가 아니라 애당초 단기적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은 오랜 세월 동안 해답을 찾지 못한 난제였고, 동북아 국가간 경제통합의 여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동북아에서 중국이나 일본을 제치고 우리나라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했다.

    5년 단임의 정권이 이 같은 원대한 목표를, 그것도 임기 중에 달성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구상은 보통 거창한 슬로건으로만 남거나 아니면 정치적 고려에서 졸속으로 추진될 위험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런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이라는 의욕적인 목표를 위해서 출범한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로드맵만 그리다가 일년 남짓 만에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이했다.

    사실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과 같은 원대한 국가목표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합리적 틀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가 정치권에 폭넓게 형성되고, 대통령은 신념과 의지를 갖고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추진하며, 여기에 뛰어난 행정력과 예산의 뒷받침, 그리고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대외적 환경도 동북아의 경제협력과 정치적 안정에 유리하게 조성돼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국내외적 여건이 전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만이 외롭게 이 과제를 담당해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머지않아 동북아 중심 추진은 우선 순위면에서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국내적 목표에 밀려났고, 에너지나 철도같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검증된 동북아 경제협력 사업은 북한의 비협조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한 동북아 중심이라는 개념부터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동북아 주요 국가들을 고려하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것이었기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로 인해 실현 가능성마저 크게 떨어진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동북아 경제중심 추진이 여러 가지 이유로 좌초했다고 해서 동북아경제협력이나 공동체 형성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동북아시대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지금까지의 정치논리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북아 경제협력 가능성이나 실현 방안에 대해서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간판을 새롭게 달고, 평화와 번영의 동시 추구라는 새로운 접근법을 채택했다고 해서 무조건 동북아시대위원회가 획기적인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화와 번영의 추진은 양자의 상호 연관성을 고려할 때 한편으로는 타당성이 있지만,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함으로써 양자 어디서도 별다른 결실을 챙기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이런 우려는 최근 우리 정부가 동북아 경제통합,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동북아 다자간 안보체제 수립 같은 21세기의 난제들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동북아 FTA나 경제통합이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질서에서 아직까지는 한·중·일 어느 한 나라의 힘이 다른 두 나라의 합을 압도할 만큼 크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세력 균형이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적절한 균형자 역할을 한다면, 급속히 부상하는 중국의 힘이나 막강한 일본의 경제력을 견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경제적 ‘균형자’

    현 단계에서 중국은 아세안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며, 일본은 싱가포르나 한국과의 FTA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아세안과의 경제협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동북아 FTA를 출범시킬 수 있다면, 경제적으로나 안보 면에서 큰 이득이 생겨날 것은 자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균형자 역할은 안보영역보다 경제영역에서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구체적인 경제협력이나 자유화 협상에서 현재 중국과 일본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역 자유화 분야에서 중국은 국내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지만, 일본은 국내 정치의 포로가 된 채 오히려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나 서비스, 지적재산권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일본이 적극적인 공세를 펴는 반면, 중국은 수세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중국과 일본이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우리나라가 사소한 문제까지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 한편이 됨으로써 개도국 처지를 대변할 수도 있고, 일본의 편에 서서 심도 있는 자유화와 통합을 적극 추진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간에서 이쪽저쪽의 양보를 받아냄으로써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일본과 손잡고 중국에 자유화를 강요할 수도 없고, 중국과 손잡고 일본에 양보를 요구한다고 해서 성공할 여지는 별로 크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국익이 자유화와 통합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소신 없이 줄타기를 하다가 양쪽에서 모두 배척당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중일 양국의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더 적다. 이러한 역할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완전히 발을 뺀 상태에서 우리의 역량이 훨씬 더 커져야 가능할 것인데, 이들 두 조건을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력은 균형추가 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이 동북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한, 중국이나 일본의 군사대국화나 양국간 무력충돌을 막아줄 균형자 역할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귀속될 것이다. 균형자 역할에 대한 논의는 가능성이 아니라 범위, 비용, 이익, 시기 등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만약 먼 장래에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별다른 실익도 없이, 극도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난리법석이 벌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설령 가능하더라도 신중하게 재고해야 할 것이다.

    한·일 FTA에 적극 나서라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동북아 자유무역지대나 경제통합을 원한다면 위험부담이 있는 균형자 역할을 자임하기보다 자유화에 대한 더욱 확고한 입장을 전제로 일본과의 FTA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뒤 동북아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근접성이란 조건 외에도, 안정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공유, 높은 경제발전 수준과 큰 국내시장, 긴밀한 인적 교류, 국가간 협력의 오랜 전통 등 지역통합에 바람직한 모든 조건을 거의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조건을 갖춘 일본과의 협력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현격한 수준 차이를 보이는 인구 대국 중국과의 표면적 협력을 위해 애쓰는 것보다 훨씬 더 실익이 클 뿐 아니라, 실현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판단한다.

    한·일 FTA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성공적 지역통합이 모두 소수의 핵심 국가 사이에서 먼저 이뤄진 후 점차 주변으로 확대되는 경로를 밟아왔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럽통합은 처음에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하는 6개국에서 시작되어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국가들로 단계적, 선별적으로 확대됐다. 물론 최근에는 유럽 전체를 망라하는 대규모의 연합체로 성장했다.

    미주 대륙의 통합도 미국과 캐나다가 FTA를 맺은 데서 출발해, 멕시코를 포함하는 NAFTA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이를 더욱 확대해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출범시키려는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공동체

    이와 유사하게 한·일 FTA도 동북아 지역통합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 통합의 출발점이 되는 중핵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바로 동북아나 동아시아의 미래라고 한다면, 동아시아의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경제통합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한·일 경제공동체가 개방적인 형태로 점차 동아시아의 여타 국가에까지 확산될 때 이 지역에도 서유럽과 같은 평화지대(Zone of Peace)가 정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FTA가 이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단순히 무역장벽을 제거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심도 있는 통합을 이뤄냄으로써 지역 전체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참여하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인 시장을 창출해서, 지역 전체가 경쟁적으로 자유화와 통합에 나서도록 유도하고 후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일 FTA는 중국이나 여타 국가를 배제하는 형태로 추진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가 FTA를 추진하는 이유가 단순히 교역을 확대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도려내는 구조조정을 촉진해서 경제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다면, 일본과의 FTA 역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FTA란 일본처럼 우리보다 발전된 국가와 체결해야 학습효과가 크고, 소득수준의 상향 평준화 효과로 인한 이득을 향유할 수 있다.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한일 양국은 감정적인 민족주의를 거칠게 분출하고 있다. 이러한 한·일 관계는 우려스러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나라에게 모두 미래지향적인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