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향민사에서 펴낸 ‘강명화의 죽음’ 표지.
“제가 살아 있으면 나리 앞길에 장애가 될 것이니 죽어버리면 좋겠단 말이에요. 제가 죽으면 나리도 따라 죽는다는 말씀은 농담으로라도 다시 마세요. 나리는 남의 집 귀한 독자시고 또한 장래에 우리 동포를 위해 무궁한 사업을 하실 분인데 저 같은 계집을 따라서 죽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씀이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은은한 달빛이 여관 마루를 비췄다. 강명화는 물끄러미 달빛을 바라보다가 노래를 불렀다.
슬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
풀끝에 맺혀 있는 이슬 같도다
무정 야속 저 바람이 건듯 불며는
이슬 흔적 순식간에 없으리로다
(……)
가정불화 사회책망 빗발치듯이
내외협공 짓쳐드니 침식 없으니
박명인생 나의 일신 관계없지만
우리 낭군 만리 전정(前程) 그르치겠네
차라리 일루잔명(一縷殘命) 내가 끊어서
천사만사 걱정근심 잊으리로다
강명화는 목이 메어 노래를 멈췄다. 처연한 곡조를 듣고 있던 장병천이 달려들어 강명화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 무슨 그런 불길한 노래를 하나….”
강명화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리, 저 달을 보니까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져요. 어쩐 일인지 별안간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아버지도 보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동경 가서 2년 동안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더니, 집 떠난 지 불과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그렇게 보고 싶단 말인가. 정 그럴 것 같으면 내일이라도 서울로 돌아가세.”
“아니에요. 달빛이 고요하니까 마음이 울적해져서 공연한 소리를 했지 뭐예요.”
강명화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며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장병천은 그때서야 마음을 놓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금세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