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손가락질했다. ‘기생을 꿰차고 동경에 유학온 방탕아를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그의 집에는 몽둥이와 주먹질이 날아들었다. 꼬장꼬장한 백만장자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아도, 입에 풀칠조차 어려운 가난한 생활이 이어져도, 그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을 끊어가며 지키려 애쓰던 연정은 끝내 영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식자층에게 ‘연애지상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숱한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가 된 그들의 운명 같은 사랑.
강명화의 삶과 죽음을 다룬 ‘삼천리’ 1935년 8월호의 ‘사랑은 길고 인생은 짧다던 강명화’.(작은사진) 자살한 강명화의 사연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3년 6월16일자 기사.
인력거가 용산역에 도착하자, 먼저 나와 기다리던 장병천이 반갑게 강명화를 맞았다. 그날 아침 장병천은 창신동 본가에서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나왔다. 부처님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맺기로 맹세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부부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지내면서도 한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지난밤 장병천이 양사동 집에 들렀을 때, 강명화가 자기 어깨를 두드리며 청했다.
“나리, 어쩐 일인지 몸이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어요. 바람도 쐴 겸 온양온천에 다녀옵시다.”
“마침 아버님께서 집을 비우셨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내려갑시다. 한 며칠 푹 쉬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뿐해질 것이오.”
용산역에서 만난 부부는 장항선 첫차를 타고 온양온천으로 떠났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초여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지만, 강명화는 풍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차창에 기대 졸고 있는 장병천의 얼굴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크고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였다.
“세상 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건…”
녹음이 우거진 온양온천에서 두 사람은 온천욕도 하고 산보도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집안의 반대와 사회의 따가운 시선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6월10일, 온양온천에 온 지도 나흘이 지났다. 두 사람은 도시락을 싸 들고 언덕에 올라가 소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았다. 피부를 스치는 상쾌한 바람.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릴 때, 강명화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리, 어찌 된 셈인지 요즘 자꾸만 죽을 듯한 생각이 나요.”
“그런 불길한 말은 하지 말게.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게지. 그렇다고 죽기야 할까.”
“아니에요. 이상해요…. 제가 비록 모진 목숨 이어간들 무슨 영광을 보오리까. 나리의 앞길만 그르치게 되지요. 저는 사랑하는 나리를 위해 죽어도 좋아요. 제가 죽은 뒤에라도 나리는 행여 제 생각일랑 말고 아무쪼록 좋은 사업을 많이 하세요, 응? 나리 댁으로 말하자면 조선에서 내로라 하는 갑부지만 남의 원망을 많이 듣고 봉변까지 당하지 않았소. 나리는 아무쪼록 공부를 잘하시고 재산을 풀어서 공익사업에 힘쓰세요. 그러면 사회에서 신용도 회복되고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실 겁니다. 그리하시면 제가 비록 죽어 혼이 될지라도 구천에서 기뻐할 것이에요.”
1964년 향민사에서 펴낸 ‘강명화의 죽음’ 표지.
“제가 살아 있으면 나리 앞길에 장애가 될 것이니 죽어버리면 좋겠단 말이에요. 제가 죽으면 나리도 따라 죽는다는 말씀은 농담으로라도 다시 마세요. 나리는 남의 집 귀한 독자시고 또한 장래에 우리 동포를 위해 무궁한 사업을 하실 분인데 저 같은 계집을 따라서 죽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씀이오?”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은은한 달빛이 여관 마루를 비췄다. 강명화는 물끄러미 달빛을 바라보다가 노래를 불렀다.
슬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
풀끝에 맺혀 있는 이슬 같도다
무정 야속 저 바람이 건듯 불며는
이슬 흔적 순식간에 없으리로다
(……)
가정불화 사회책망 빗발치듯이
내외협공 짓쳐드니 침식 없으니
박명인생 나의 일신 관계없지만
우리 낭군 만리 전정(前程) 그르치겠네
차라리 일루잔명(一縷殘命) 내가 끊어서
천사만사 걱정근심 잊으리로다
강명화는 목이 메어 노래를 멈췄다. 처연한 곡조를 듣고 있던 장병천이 달려들어 강명화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 무슨 그런 불길한 노래를 하나….”
강명화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리, 저 달을 보니까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져요. 어쩐 일인지 별안간 어머니도 보고 싶고 아버지도 보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동경 가서 2년 동안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더니, 집 떠난 지 불과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그렇게 보고 싶단 말인가. 정 그럴 것 같으면 내일이라도 서울로 돌아가세.”
“아니에요. 달빛이 고요하니까 마음이 울적해져서 공연한 소리를 했지 뭐예요.”
강명화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며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장병천은 그때서야 마음을 놓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강명화가 죽고 난 뒤 그의 연애사를 기록한 소설들이 종로 야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왼쪽은 1934년 회동서관에서 펴낸 ‘강명화 실기’, 오른쪽은 1925년 박문서관에서 펴낸 ‘강명화전’.
장병천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직 깊은 밤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이제 겨우 밤 11시였다. 강명화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새로 지은 옥양목 치마저고리까지 차려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보게, 왜 안 자고 이때까지 앉아 있어? 오밤중에 화장은 왜 하고 새 옷은 왜 갈아입었나?”
“저는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먼 나라로 가오니 마지막으로 나리 품에 안겨봅시다.”
“그게 무슨 말인가, 먼 나라로 가다니.”
“이왕에 부탁한 말씀대로, 나리는 저를 생각하지 마시고 부모께 효도하고 공익사업을 많이 하시어 사회의 신용을 회복하시면 제가 비록 죽은 혼이라도 지하에서 춤을 추겠나이다.”
“글쎄,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해도?”
“저는 벌써 독약을 먹었어요. 약을 타서 마신 그릇이 저기 있어요.”
강명화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핼쑥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장병천은 강명화를 부둥켜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몹쓸 사람아. 독약은 어디서 났고, 또 무슨 이유로 먹었단 말인가.”
“제가 죽을 결심을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기회가 없어서 여태껏 살아 있었던 거예요. 용산역으로 나오는 길에 약국에서 쥐약을 사서 감추어두었지요.”
장병천은 급히 의사를 부르고, 서울에 있는 장모에게 전보를 쳤다. 응급조치로 구토제를 먹이려 했으나 강명화는 이를 악물고 먹지 않았다. 새벽잠을 설치고 달려온 의사는 혀를 쯧쯧 차더니 “진작 조치를 취했다면 구할 도리가 있었지만 벌써 약이 온몸에 퍼져 돌이키기 어렵다”는 말만 남긴 채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튿날 오후 6시, 강명화는 20시간 남짓 고통에 몸을 뒤척이다 장병천의 무릎을 베고 정신을 놓았다.
“여보게 명화,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장병천이 강명화의 몸을 흔들며 오열하자, 강명화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사람 중에 가장 사랑하는 파건….”
강명화는 파건을 부르며 스물셋 짧은 생을 마감했다. 파건은 장병천의 별호였다.
일곱 살배기 어린 기생
강명화는 1901년 평양에서 20여 리 떨어진 남형제산 골짜기에서 강기덕의 맏딸로 태어났다. ‘명화’는 기명(妓名)이고 어려서 이름은 ‘확실’이었다. 두 살 어린 도선이까지 네 식구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도 가장 군색하게 살았다. 강기덕은 천성이 오활하고 방탕해 집안 살림은 조금도 돌보지 않았고, 돈푼이나 생기면 술집과 노름판을 기웃거렸다. 집안 살림은 어머니 윤씨가 혼자 꾸려갔다.
윤씨는 평양 부호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콜레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가까운 일가는 콜레라로 모두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의붓외조부와 윤씨뿐이었다. 의붓외조부는 윤씨를 양육한다며 재산을 가로채 탕진하고는, 결국엔 윤씨마저 푼돈을 받고 강기덕에게 팔아넘기듯 시집보냈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힌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강명화와 장병천을 꼽은 ‘동아일보’ 1936년 4월24일자 기사.
윤씨는 확실이라도 시집을 잘 보내 호강하며 살게 해주고 싶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심한 끝에 가난뱅이에게 시집보내 자기처럼 살게 하느니 차라리 기생을 만드는 게 낫겠다고 결심한 윤씨는 일곱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산호주라는 늙은 기생을 찾아갔다. 산호주는 확실이를 기안(妓案)에 입적시키고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확실이는 총명하고 영특해 다른 아이들이 열흘 배울 것을 2~3일이면 깨우쳤다.
1917년, 확실이가 기안에 이름을 올린 지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다. 확실이는 평양 일대에서 미모면 미모, 가무면 가무, 모든 면에서 최고의 기생으로 성장했다. 하루는 확실이가 모친에게 말했다.
“어머니, 고기도 바다에서 놀아야 용이 되기가 쉽다고 사람도 큰 번화가에 가야 장래 희망도 있을 것이니 우리 서울로 올라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여봅시다.”
윤씨는 남편을 평양에 남겨둔 채 확실이와 도선이 남매를 데리고 짐을 꾸려 서울로 이주했다. 크게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지만, 아는 사람이라곤 평양에서 함께 기생 노릇을 하던 김옥련뿐이었다. 확실이 가족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종로청년회관 뒤편 김옥련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옥련은 친구를 반갑게 맞으며 아랫방을 내주었다. 확실이는 김옥련의 주선으로 다동 대정권번(券番·기생조합)에 들어가 ‘명화’란 기명을 얻었다. 강명화의 미모와 가무 실력은 대정권번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그 후 명화의 이름이 화류계에 널리 퍼져 어느 모꼬지든지 한곳 빠짐없이 불려 다녔고, 어느 놀음놀이든지 명화가 없으면 흥미가 없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강명화’ ‘강명화’ 하는 소리가 오입쟁이 사회에 점점 높아가며 놀음판에 강명화를 부르려면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어제는 요릿집에서 밤을 새우고, 오늘은 동대문 밖 정자에서 해를 보내다가,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와 눈을 조금 붙이려면 대문밖에서 “명화 있나” 소리가 들리기 일쑤였다. 명화 집 대문 밖에는 일류 가는 부랑자떼가 줄줄이 늘어섰다. (1935년 영창서관에서 펴낸 ‘절세미인 강명화전’ 중 에서) |
서울 화류계 최고 기생으로 몇 달을 보내자 은행통장에 수천원의 저금이 생겼다. 강명화는 전동에 깨끗한 집을 얻고, 평양에 남겨둔 아버지 강기덕도 서울로 불러 잡화상을 차려주었다. 서울에 올라올 때는 어린애 베개만한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메고 왔지만, 전동 집으로 이사할 때는 리어카로 십여 차례 실어 날라야 할 만큼 세간이 불어났다.
“얘 명화야, 돈벌이도 중요하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니 어미 보기에 뼈가 저리고 살이 아프다. 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윤씨가 측은한 마음에 쉬엄쉬엄 하라고 당부하면, 강명화가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게을러서야 어디 돈 벌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를 어여삐 여겨 마음먹고 부르는 손님을 한시라도 괄시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법. 제 몸이 아무리 괴롭다 하더라도 이런 때 돈을 벌어서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고 도선이 교육도 시켜놓아야 우리집 장래가 걱정 없지요.”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기생은 웃음을 파는 천한 직업이었다. 강명화는 영웅호걸까지는 안 바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반듯한 남편을 만나 기생 노릇을 그만두고 싶었다. 혹시 손님 중에 쓸 만한 남편감이 없나 눈여겨 살펴보았지만 기생을 찾는 손님들이란 죄다 부랑자 아니면 타락자였다. 돈 많은 한량들이 인연을 맺자고 졸라도 강명화는 차갑게 거절했다.
1919년 늦봄, 며칠 동안 비가 내리다 오랜만에 화창하게 날이 갠 일요일 오후였다. 강명화는 요릿집의 부름도 거절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한강으로 산보를 갔다. 서울생활 3년 동안 집안 형편은 몰라보게 나아졌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여자 나이 열아홉이면 남편 사랑받고 자식 재롱 보며 살 나이였다.
운명적 만남
한강 인도교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본 강물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 새파랬다. 청년들은 보트를 타고 경주를 했고, 연인들은 다정히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강명화는 아무 근심걱정 없이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날 한강 인도교를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강변 풍경이 아니라 강명화 자신이었다. 그렇게 강명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쥐색 양복 차림에 레인코트를 팔에 걸치고 둥근 뿔테안경을 쓰고 금시계 줄을 늘인 잘생긴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함께 놀러 나온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게 남 주사, 보았소? 참말 미인인데, 미인이야.”
“뭘 보고 그리 놀라나 했지. 저기 있는 여자를 보고 그러는구먼. 여태 저 여자를 몰랐소? 그 유명한 평양기생 강명화 아니오. 과연 미인이지. 현대 화류계에 그만한 기생이 없는 걸. 미상불 풍류남아는 한번 데리고 놀 만하지. 한번 불러 구경하고 싶소?”
남 주사가 짓궂게 농을 하자,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왜 아무 말 없소. 어려운 일도 아니오. 어디 영남 갑부 장병천이가 기생 하나 부르기 어려울까.”
장병천과 남 주사는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면서 강명화 곁을 지나갔다. 장병천은 백만장자 장길상의 외아들이었다. 장길상은 대지주이자 경일은행 두취(대표이사)였다. 장길상, 장직상, 장택상 삼형제는 영남지방 제일의 부호였는데, 그 가운데 막내 장택상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외무부 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장길상은 소작인에게 가혹한 소작료를 물리다 인심을 잃어 터전인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해 살았다. 장병천은 백만장자의 외아들로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가 재산을 엄격하게 관리해서 허투루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한강 인도교에서 강명화를 만난 후 장병천은 자나깨나 강명화 생각뿐이었다. 며칠 동안 주저하다가 요릿집으로 강명화를 불렀다. 하지만 요릿집으로 여러 번 부르고 집까지 찾아가도, 강명화는 몸도 마음도 허락하지 않았다.
강명화가 그 청년을 보건대, 옷차림을 보건 행동거지를 보건 어울리는 친구를 보건 시골 부호의 자제가 분명하지만 그가 기생을 데리고 놀 때나 놀음놀이에서 하는 거동을 보면 실로 구역질이 났다. 그는 장구도 일등 선수로 치고, 소리도 창부 이상 잘하고, 어깻짓, 고갯짓이 참으로 면목가증이었다. 강명화는 장병천을 볼 때마다 ‘저런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면 내 명예까지 타락하고 말걸’ 하는 생각이 들어 일체 거절하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절세미인 강명화전’ 중 에서) |
강명화를 향한 장병천의 사랑은 집요했다. 아무리 박대하고 쌀쌀맞게 굴어도 장병천은 줄기차게 강명화에게 구애했다. 결국 강명화는 장병천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한번 마음을 열자 강명화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미친 듯 사랑했다. 요릿집에 불려가 딴 사내에게 웃음을 팔 때도 오로지 장병천만 생각했다. 하루는 두 사람이 탑골승방(보문사)으로 산보를 갔다. 강명화가 장병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리. 저는 나리를 잠시라도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나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우리 두 사람이 불전에 나가서 백년해로를 맹세하고 그 맹세를 굳게 지켜 죽는 날까지 변하지 맙시다.”
장병천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나도 벌써 그런 생각이 있었으나 명화의 뜻을 알 수 없어서 말을 먼저 못 꺼냈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니 두말할 것 없이 법당에 올라가서 불전에 맹세하세.”
두 사람은 부처님 앞에서 나란히 꿇어앉아 공손히 분향하고 소원을 빌었다. 장병천이 먼저 축원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이시여. 장병천과 강명화 두 사람은 보살님 앞에서 비나이다. 두 사람의 인연이 깊사와 백년가약을 맺었사오니 이 마음 변치 말고 평생 고락을 같이 하게 하옵소서.”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 비옵니다. 상전이 벽해가 될지라도 강명화의 결심은 깨어지지 아니하여 살아서는 내외가 되고 죽어서는 연리지가 되어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영원히 변치 않게 해 주옵소서.” 강명화의 축원이 끝나자 두 사람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산간에 인적이 없는데 멀리서 뻐꾹새 소리만 그윽하게 들릴 뿐이다. (1962년 향민사에서 펴낸 ‘강명화의 죽음’ 중 일부) |
부처님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맺기로 맹세한 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장병천은 하루바삐 강명화와 새살림을 차리고 싶었고, 강명화는 기생 노릇을 그만두고 장씨 집안 사람이 돼 여염집 살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병천에겐 본처가 있었다. 엄하고 인색한 장길상이 이제 고작 열여덟 살 난 아들이 기생첩 들이는 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1921년 봄, 장병천과 부부의 연을 맺기로 맹세한 지 햇수로 3년이 지났지만 강명화는 여전히 기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장병천은 돈 한 푼, 옷 한 벌 해준 것이 없었지만 강명화의 집에 갈 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용돈까지 얻어 썼다. 하루는 강명화가 하소연했다.
“나리, 저는 정말이지 기생 노릇 하기가 지긋지긋해요. 언제나 이 노릇을 면하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볼까요?”
장병천은 부끄럽고 답답해 멀뚱멀뚱 강명화를 쳐다보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힘없이 말했다.
“염려 말게. 설마 평생 떨어져 살겠나. 자네가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민망하지만, 공연히 섣부른 짓을 하다가 소문이라도 나서 아버님 귀에 들어가면 청천벽력이 내릴 테니까 어찌할 수 없어 여태껏 참아온 것일세.”
그 후 장병천은 ‘사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면목이 없어 강명화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자괴감도 사랑을 이기진 못했다. 장병천은 몇 번을 머뭇거린 끝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명화의 집으로 들어갔다. 장병천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강명화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
“나리 기다리다가 눈이 빠질 뻔했소. 어찌 그러시오, 무정하게….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긴한 사정이 있어서 못 왔을 뿐이네.”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어찌하여 못 오셨나요? 옳지, 내가 냄새가 나서 정을 끊으려고 안 오신 것이지요?”
“자네 내 마음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나. 하늘을 두고 맹세컨대 내 마음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 아마 자네 마음이 변해서 생트집을 하나보이. 내게 뒤집어씌우고 새서방을 맞을 작정인 게로군.”
장병천이 껄껄 웃으며 쳐다보자 강명화도 따라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다.
“나리가 아직도 제 마음을 모르셔서 의심을 품으십니다. 나리를 향한 저의 마음을 직접 보십시오.”
강명화는 가위를 집어 들어 머리채를 삭둑 잘랐다. 기생이 머리채를 자르는 것은 기생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람아! 이게 웬일인가. 머리털을 자르다니….”
“이제는 저를 의심치 않으시겠지요. 머리 깎은 년은 기생질도 할 수 없을 것이요, 다른 남자에게 곱게 보여 새서방을 맞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다시는 그런 억울한 말씀을 말아 주세요. 이제는 제가 살아도 장씨 집안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 집안 귀신이니 저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나리 처분대로 하십시오.”
강명화가 머리채를 자른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병천이 기생첩을 두었다는 소문이 장길상의 귀에 들어갔다. 장길상은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용돈마저 끊었다. 장병천은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았다. 장마가 시작되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져 이촌동과 마포 일대에 큰 홍수가 났다. 장병천은 물 구경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강명화의 집을 찾았다.
몇 달 만에 찾은 강명화의 집은 눈에 띄게 쇠잔했다. 강명화가 기생을 그만두자 집안의 수입이 끊겨 밥 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곤궁해졌다. 장병천은 마음이 착잡해져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안 되겠네. 이 모양으로 있다간 고통만 커질 뿐 희망이 없네. 고생은 좀 되더라도 동경으로 건너가 집 한 채를 얻어 손수 살림을 해가며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자네는 여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해보세. 공부를 마친 후 돌아와서 좋은 사업을 하면 우리에게도 행복이 찾아올 게 아닌가.”
“저 역시 공부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입니다. 오늘이라도 떠납시다. 다만 장래 학비는 고사하고 우선 여비는 어찌하려오?”
“글쎄 나 역시 그것이 걱정이야. 여비만 변통되면 지체 없이 떠날 터인데….”
“좋은 수가 있습니다. 저의 패물을 팝시다. 다시 기생 노릇 아니 할 것인데 패물은 두었다 뭐합니까. 모두 팔면 기백원은 될 것이니 여비 걱정 없습니다.”
“일찍이 자네에게 패물 한 가지 해준 것도 없는데, 아끼고 아끼던 패물을 팔면 오죽 섭섭하겠는가. 조금 더디더라도 여비는 내가 변통해봄세.”
“별말씀 다 하십니다. 내외간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나리가 장만해주셨건 내가 장만했건 매한가지지요. 훗날 그 갑절이라도 장만해주시면 그만이지요.”
두 사람은 패물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서 도쿄로 떠났다.
손가락 잘라 맹세한 사랑
두 사람은 도쿄 아사쿠사구에 셋집을 얻어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며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장병천은 대학 예비과에 등록하고 강명화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백만장자 외아들, 조선 최고 명기(名妓)의 유학생활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궁핍했지만, 부부의 연을 맺기로 맹세한 지 3년 만에 시작한 ‘신혼생활’은 꿀처럼 달콤했다.
도쿄에 도착한 직후 장병천은 아버지에게 학비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물 구경 간다고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장길상은, 편지를 받아 들고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다. 신학문 자체도 못마땅하게 여긴 데다 부모의 허락도 얻지 않고 도쿄로 떠난 것이 마뜩지 않았다. 장길상은 우선 30원을 보내주고는, 도쿄로 정탐을 보내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도쿄에서 돌아온 정탐은 장병천이 유학을 한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기생첩과 새살림을 차렸다고 보고했다. 장길상은 아들에게 어서 돌아오라는 편지를 쓰고 학비를 끊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장병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만리타향에서 학비는커녕 밥 한 공기조차 얻어먹을 길이 없어지자 강명화에게 “신문배달이라도 하겠다”고 말했다. 강명화는 “신문배달을 하더라도 입에 풀칠하기 어렵거니와, 안 해본 노동을 하다 보면 공연히 몸만 상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그러고는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님 전 상서 불초 여식 명화는 어머님 슬하를 떠난 지 어언 몇 달이 지났사오나 그 동안 문안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저희를 생각하시어 밤낮으로 고민하시는 것이 항상 눈앞에 아른거려 잠시도 은혜를 잊을 수 없나이다. 저희는 좋은 학문을 많이 배워 금의환향하기를 기대하며 어떠한 고초를 겪을지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자 굳게 결심하였사오나 조물의 시기인지 마귀의 저주인지 산천이 생소한 곳에 와서 여비가 벌써 떨어져 속절없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편지를 보시는 대로 즉시 집을 팔아서 그 돈은 은행에 맡겨두고 매달 얼마씩 학비를 보내주시고 어머님은 평양 집으로 돌아가셔서 몇 해만 고생하시며 저희가 고생하고 귀국하기를 기다려주시옵소서. (‘절세미인 강명화전’ 중 에서) |
윤씨는 사위가 원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혼자 편안히 살자고 사랑하는 딸 내외를 굶겨 죽일 수도 없어 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장병천과 강명화는 윤씨가 보내준 돈으로 가난하지만 행복한 유학생활을 꾸려나갔다.
어느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아사쿠사 공원에 산보를 가려다 그만두고는 장병천은 누워서 잡지를 보고 강명화는 빨래를 했다. 그때 문 밖에서 “이 집이다, 이 집이야” 하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병천 군 있소?” 하며 10여 명의 학생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장병천! 너는 조선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이 기생첩을 데리고 유학을 하느냐.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 유학생들까지 욕을 먹는다.”
장병천을 비난한 학생들은 연이어 강명화를 향해 외쳤다.
“이 요망하고 방자한 것아! 아무리 남의 등골을 뽑아먹기로 유명한 평양기생이기로소니, 전도유망한 청년의 장래를 망치고 여학생인 체 가장하고 이곳에 발을 디뎠느냐. 너와 같은 요물을 세상에 두었다가는 이러한 폐단이 얼마나 더 생길지 모른다.”
혈기왕성한 도쿄 유학생들이 풍기문란 죄목으로 장병천과 강명화를 처단하러 온 것이었다. ‘때려라’ ‘밟아라’ ‘죽여라’ 하는 소리가 빗발치고 난투극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강명화가 차분한 목소리로 사정했다.
“여러분, 잠깐만 분노를 진정하시고 천박한 여자의 말이나 한마디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남편 장병천은 우리 민족을 위해 기여할 전도유망한 청년이올시다. 다만 나 같은 천첩을 상종한 것이 흠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그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 여러분은 우리의 곡진한 사정부터 살펴주십시오. 본인의 의사와 다른 결혼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우리 조선의 폐단입니다. 우리 남편 장병천은 그 폐단에 저항하고자 저와 같은 천첩을 가까이 한 것이올시다. 또 이 몸으로 말하면 비록 매창매소하던 천기였으나 지금은 굳은 결심으로 일부종사하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한즉 이 사람의 목이….”
강명화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부엌에서 식도를 가져와 왼손 중지를 힘껏 찍었다. 잘려 나간 손가락이 마루 위에서 팔딱팔딱 튀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을 향해 강명화가 말을 이었다.
“목이 이 손가락같이 잘려 나갈지라도 남편을 떠나지 못하겠으니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십시오.”
학생들은 강명화의 굳은 결의에 감복해 다음 같은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누님, 우리가 오해했소. 우리는 불량자와 매음녀를 철저히 배척해 유학생계를 정화하려 했을 뿐이오. 지금 누님의 말을 듣고 보니 사정이 그럴듯하므로, 아무쪼록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오.”
1922년 가을 어느 일요일, 장병천과 강명화는 손을 꼭 잡고 우에노 공원으로 산보를 나갔다. 강명화가 손가락을 자른 지도 몇 달이 흘렀다. 두 사람은 벤치에 다정히 앉아 단풍이 곱게 든 가을 풍경을 완상하며 이야기했다.
“나리, 이제 우리 친정도 파산이 되었고 시아버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니, 우리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동경 귀신이 되려나 보오.”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일세. 나는 돈 한 푼 변통치 못하고 가난한 자네 집만 거지로 만들었으니 나는 살아도 죽은 사람일세. 이제는 별도리 없이 노동이라도 할 생각일세. 우리 손으로 벌어서 공부하고 잘살면 훗날 옛이야기해가며 행복을 누릴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장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장병천의 친구가 벤치 앞을 지나갔다. 장병천이 반갑게 인사하자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자네, 예서 뭐하는 겐가. 이 길로 어서 대피하게. 나를 만난 건 하늘이 도운 것일세.”
“여보게, 왜 그러나, 무슨 큰일이 났단 말인가.”
“자네 일전에 유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 지금은 그보다 몇 갑절 되는 화가 다가오네. 공원 입구를 지나오는데, 수십명의 유학생이 모여서 자네 이야기를 하는데 자네가 기생첩을 데리고 유학 왔다며 그런 놈은 없애버려야 한다고 떠드는 것일세. 마침 내가 그 말을 듣고 이곳에서 자네를 만난 게 천만다행일세.”
“다 내 잘못이네. 내일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내일이 무엇인가. 오늘 밤 11시에 거사를 한다네. 일전에는 못생긴 자식들이 간사한 계집의 요망한 행동에 속아 누님이니 무엇이니 하고 쓸개 빠진 짓을 했다고 서슬이 퍼렇다네. 이번에는 욕을 단단히 볼 뿐 아니라 잘못하면 생명까지도 위태로울지 모르니 집으로 가려거든 오늘 저녁차로 떠나게.”
장병천과 강명화는 그날 저녁 짐을 꾸려 도쿄를 떠났다. 1년 반 남짓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유학생활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향후 대책을 상의하고 이튿날 첫차로 부산을 떠났다. 경성역에서 강명화만 내리고 장병천은 평양 처가로 갔다. 강명화는 시아버지 장길상과 담판을 벌일 생각으로 창신동 시댁을 찾아갔다. 장병천의 본가는 소문대로 수십명의 비복이 바글거리는 고대광실이었다. 강명화가 마루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늙은 여종을 향해 물었다.
“마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늙은 여종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안방으로 안내했다. 강명화는 안방으로 들어가 아랫목에 앉아 있는 시어머니를 향해 넙죽 큰절을 했다.
“처음 보는 분인데 뉘신가요?”
시어머니가 묻자, 강명화는 머뭇거리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제가 공부하러 동경에 갔던 아이올시다.”
“응, 그러면 네가 명화로구나.”
시어머니는 뜻밖에도 강명화를 따뜻하게 맞았다. 이 지경까지 된 마당에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것이었다. 아들 내외의 도쿄 생활을 한참 묻고 있는데, 누군가 안방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장길상이었다.
“누가 왔다는 말이냐. 이런 방자하고 대담한 것, 여기가 어디라고 내 허락 없이 발을 들여! 나는 그런 꼴을 아니 볼 테니 어서 내쫓아라!”
장길상이 고래고래 호통을 치자 하인들이 달려들어 강명화를 내쫓았다. 강명화는 대문 앞에서 석고대죄했지만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며칠 동안의 석고대죄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강명화는 장병천이 기다리는 평양 친정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밤을 새워 울었다.
사랑은 길고 인생은 짧다
장병천은 아버지가 평양으로 삼촌 장택상을 보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 몇백원을 변통해 숭이동에 월셋 방을 구해 놓고 강명화를 불렀다. 두 사람이 벌이도 없이 쓰기만 하자 돈은 금방 떨어졌다. 월세 독촉에 시달리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참담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자 아버지에게 기별이 왔다. 장길상은 비록 행실은 괘씸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칠 수도 없어 사람을 놓아 아들의 행적을 쫓았다. 장길상은 아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양사동에 전셋집을 얻어두었으니 강명화는 양사동 집에서 살고 너는 본집에 들어오도록 해라. 네가 지난 일을 반성하면 양사동에 식량도 보내주겠다.”
장병천은 아버지가 자신과 강명화의 관계를 인정하는 줄 알고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장길상은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자 집 밖 출입을 막고 강명화에게 식량도 보내주지 않았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고 양사동으로 어머니 윤씨까지 모셔온 강명화는 뒤늦게 시아버지에게 속은 것을 알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1923년 봄, 장길상은 동대문 밖 홍수동에 정자를 새로 짓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장병천은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강명화를 찾아가 위로했다. 그러는 동안 장병천이 기생첩에 홀려 신세를 망쳤다는 소문이 호사가들 사이에 퍼졌다. 강명화는 처지를 비관해 결심을 굳혔다.
‘나 같은 계집이야 어떤 비난을 듣건 어떠한 고생을 하건 상관없다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남편의 장래가 말이 아니다. 미상불 나 때문에 타락하여 가정과 사회로부터 신용을 잃고…. 차라리 남편을 위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끊는 것이 옳다.’
강명화는 장병천에게 만난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부탁했다.
“나리, 아무리 어려워도 옥양목 두 통하고 흰 구두 한 켤레만 사다주시겠소. 입을 것, 신을 것이 없어서 그러오.”
6월11일 오후 6시, 강명화는 장병천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인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장병천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강명화의 시체는 6월14일 하오 경성 양사동 집으로 운구했다가 15일 오전 10시 다정다한한 애사를 남긴 옛집을 떠나 7대의 자동차에 가득한 조문객과 애인을 뒤에 세우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눈물 많고 말썽 많던 박행한 미인의 꿈같은 역사의 페이지는 영원히 덮이고 만 것이다. 강명화가 죽기 전까지는 별별 수단으로 배척하려 애쓰던 장병천의 부친도 죽은 이에겐 미안했던지 지난 14일 밤 제물과 제문을 지어 가지고 친히 빈소에 이르러 간곡한 제례를 베풀었다 한다. (‘꽃 같은 몸이 생명을 끊기까지’, ‘동아일보’ 1923년 6월16일자) |
“강명화와 합장해달라”
“다시는 기생집에 가지 않는다.”
장병천은 애인의 장례를 치른 후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몇 주 동안 석왕사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다녀온 후로도 꿈속에서는 강명화가 나타났고, 강명화의 꿈을 꾸고 나면 며칠씩 앓았다.
그러나 장병천의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명화는 애인의 출세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손가락을 자르고, 패물과 집을 팔고, 목숨까지 버렸지만, 장병천은 한낱 부랑자였다.
장병천은 백만장자의 외아들인 동시에 적수공권의 무산자였다. 집안의 신임은 의연히 받을 희망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 역시도 애인 강명화의 고운 살이 썩기도 전에 청진동 어떤 기생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 기생은 강명화의 친한 친구였으며 얼굴 모습도 강명화와 비슷했고, 살짝 걷어 올린 머리 빗는 법까지 강명화와 똑같았다. 장병천은 죽은 애인을 사모하여서 그와 비슷한 모습이라도 바라보는 것이 위로가 되었을는지 알 수 없으나 집안에서나 세상에서 보기는 여전한 부랑자로밖에 안 보였으며,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밖에 알지 못하는 그의 부친 장길상이 여전히 돈 한 푼 아니 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상을 비관하던 장병천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으면 이태원 공동묘지에 강명화와 합장해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 결국 장병천은 지난 10월29일 귀축축한 새벽 쥐약을 4알이나 먹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자 했다. 이를 발견한 집안사람은 곧 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한 후 즉시 총독부병원 6호실에 입원시켰다. 병실은 그의 부친 덕분에 일등실에 들어갔으나 그는 입원한 지 10여 시간 만인 오후 2시에 한마디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호의 독자 장병천의 자살’, ‘동아일보’ 1923년 10월30일자) |
강명화와 장병천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두 사람의 정사(情死)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명화 실기’(1924), ‘강명화전’(1925), ‘강명화의 설움’(1925), ‘절세미인 강명화전’(1935), ‘강명화의 죽음’(1964) 등 딱지본 소설이 만들어져 경성 시내를 달궜고,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린 연극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일본인 감독 하야카와는 기생 문명옥을 강명화 역으로 발탁해 ‘비련의 곡(曲)’(1924)이란 영화를 연출했고, 1967년에는 윤정희·신성일 주연의 영화 ‘강명화’가 개봉돼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인 10만여 관객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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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화의 죽음을 다룬 소설은 종로 야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강명화를 따라간다”며 정사한 연인들이 줄을 이었다. 신채호는 이런 현상을 두고 “자살귀 강명화가 열녀가 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강명화와 장병천의 사랑은 건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신문·잡지·소설을 통해 윤색을 거듭하면서 1920~30년대 ‘연애지상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애인을 위해 모든 걸 바친 강명화는 ‘현대의 춘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