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아니 하면 안 될 일이기에 목숨 걸고 싸웠다”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입력2008-01-08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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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리 공동묘지’는 우리 근현대사를 살다 간 다양한 인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역사 공간이자 현실 세계의 축소판이다. 수필가 김영식씨는 이곳의 비석들을 생생한 교재로 삼아 고인들의 행동과 생각을 읽는 작업에 매달려왔다.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영역인 ‘비명(碑銘)문학’ 연구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그의 작업 일부를 연재하기로 한다. 그 첫 회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과 삼학병의 사연으로 시작한다. 망우리공원 한켠 조봉암 선생의 묘소 비석에는 글이 없다. 공원의 안내문도 그가 왜 여기에 묻혀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아들만이 목 놓아 절규한다. 좌우의 갈등과 시대의 아픔을 말없이 증언하는 무덤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삼학병의 묘도 그곳에 있다.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1979년 망우리 공원묘지 풍경과 죽산 조봉암 선생의 글 없는 비석(왼쪽 위).

    서울과 지방의 사이

    죽어 말 없는 사람과

    살아 생각 없는 사람 사이

    어제와 오늘의 사이

    그와 나 사이의 능선을 걸어가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1동 산 57번지. 우리가 흔히 ‘망우리묘지’라고 부르는 공원묘지가 그곳에 있다. 1980년대 대학시절, 그 가까운 동네에 살 때 공원까지 산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본 묘지의 풍경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을 지배하며 편린으로 박혀 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도 너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

    어느 비석에는 일찍 죽은 아들을 기리는 글이, 그 옆에는 비석조차 세울 형편이 못 됐는지 ‘아버님 잠드신 곳’이라고 쓴 비목만이 검은 페인트를 덮어쓴 채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비껴선 그 너머 어느 무덤 앞, 소주병을 옆에 두고 ‘꺼이꺼이’ 울고 있던 청년에게는 또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 산 밑을 내려다보니 이곳 묘지는 이리 조용한데, 저 멀리 차 소리가 도시의 심장 소리처럼 시끄러웠다. 세상은 역시 산 사람들의 것. 죽은 이들은 말이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이후로 20여 년이 흘러 그 기억을 카메라에 담고 박인환 시인과 동료 선배 문인들의 묘도 보고 싶어 망우리묘지를 다시 찾았다. 망우리의 묘지는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망우리공원은 1991년 서울시설공단이 서울시로부터 묘지관리 업무를 인수받아 서울시설공단 장묘문화센터 ‘망우리묘지’라 칭했고, 1998년 공원화 작업을 마친 이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무덤이라고 어찌 무사했겠는가. 그동안 나무는 울창하게 자라 시야를 가렸고, 길도 넓혀지고 바뀐 듯 옛 기억 속의 무덤들이 어디쯤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새로운 기행에 나서야 했다. 기억 속의 비석은 이장을 했는지 찾지 못했지만, 그 대신 유명한 이들의 비석을 포함해 ‘글’이 있는 비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연보비가 설치된 유명인은 문일평, 박인환, 방정환, 서광조, 서동일, 서병호, 오긍선, 오세창, 오재영, 유상규, 장덕수, 조봉암, 지석영, 한용운으로 14명(가나다 순)이고, 최학송의 묘엔 우리문학기림회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중섭과 김정규는 연보비는 없지만 최근 새로 세워진 공원안내판에 표시되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학병, 박승빈, 박찬익, 박희도, 아사카와 다쿠미, 이인성, 차중락, 채동선, 함세덕의 묘소도 있다.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죽산 조봉암 선생 묘소(위 오른쪽)와 그 앞면의 연보비.

    필자는 이곳에서 비문을 읽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다. 죽음에서 오히려 삶을 발견했다면 과장일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이곳에서 삶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고인이 묘비에 남긴 글을 읽으면서 삶을 돌아보게 된다. 시인 조병화는 이렇게 노래했다.

    “살아서 무덤을 도는 마음이 있다. 사랑하면 어두워지는 마음이 있다. 몽땅 다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이 있다. …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망우리묘지는 근현대사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인물들의 삶을 비명(碑銘)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금석학은 오래된 돌 등에 새겨진 내용을 연구하는 학문. 종이는 불에 타서 없어지지만 돌은 타지 않으니 오랜 세월 그 내용이 전해질 수 있다. 고인의 비석에서 우리는 그 시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별한 자’들이 잠든 국립묘지는 이렇다 할 향취가 없다. 그에 비해 이곳 망우 ‘공동(共同)’ 묘지는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다. 시대가 애국자로 지정한 자뿐 아니라 친일과 좌익의 멍에를 짊어진 억울한 죽음도 허다하다. 시인, 소설가, 화가, 작곡가, 가수, 의사, 학자, 정치가 등 다양한 삶이 있고, 부자와 빈자, 유명인과 무명인이 함께 있다.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렸거나 생활에 지친 도시인은 여기에서 고인의 삶을 되새기는 행위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학생들에겐 한국 근대 역사와 문화를 체험학습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망우리 고개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다. 묘지의 숲에서 시내를 보면 삶과 죽음의 사이에,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낀다.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필자는 비석을 통해 고인의 마음과 고인의 시대를 읽어 글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시인 함민복의 말처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묘지 여기저기에 지난 추석 때 놓인 꽃다발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말라가는 이 겨울, 나는 망우공원에 묻힌 고인에게 한잔의 술을 바치며 이 연재를 시작한다.

    글 없는 조봉암 비석

    비명문학 기행의 첫 번째 코스는 죽산 조봉암 선생 묘지의 ‘글 없는 비석’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1980년대, 대학생이던 필자는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를 산책하다 우연히 죽산의 묘를 발견했는데, 비석의 크기로 보아 꽤 유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교과서에서건 어느 책에서건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많은 월북인사처럼 죽산 조봉암은 대한민국에서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오로지 그 시대를 산 사람의 머릿속에서 존재하다 사라지는 기억의 하나였다. 태초에 말이 있었지만 죽산의 말은 사라졌다. 말은 입술의 침을 먹고 목숨을 이어가는 것인데, 아무도 말을 나누지 않아 말은 그 시대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필자 같은 후세 사람에게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수십년간 오로지 유족과 일부 지인의 머릿속에서만 그들 가슴의 고동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 크게 조명을 받는 월북작가 임화, 백석, 이태진의 말은 접할 수 없었다. 일본에선 아쿠타가와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6·25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기자로 죽은 김사량도 동대문 도서관 한구석에 꽂힌 일어판 일본문학 전집 안에서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난해 이곳 망우리공원에서 찾은 소설가 최학송과 극작가 함세덕의 말도 내겐 닿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50m쯤 올라가면 순환로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왼쪽 길로 1km 정도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길 좌우로 유명인 묘소 입구에 서 있는 연보비가 나타난다. 연보비는 고인의 연혁과 말을 새겨놓은 큰 돌을 말한다. 동락천 약수터를 지나 한용운 선생 묘 다음에 죽산의 묘가 있다. 입구에는 연보비가 서 있고 계단도 만들어져 있다.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1956년 조봉암 선생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2006년 봄 20여 년 만에 다시 죽산의 묘를 찾았을 때 큰 비석의 앞면에는 단지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岩先生之墓)’라고 새겨져 있을 뿐 비석 좌우 뒷면에는 아무런 글이 없었다. 보통 이 정도 유명한 사람, 혹은 이 정도 크기의 비석이라면 생몰년과 경력, 그리고 추모의 글이 가득한 게 상례다. 그때 내가 답사한 다른 유명인의 비석에는 글이 가득했다. 그래서 묘지 입구의 연보비를 찬찬히 훑어보기로 했다.

    ‘1898-경기도 강화군에서 출생, 1919-3.1 독립운동 가담 1년간 복역, 1925-‘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회의 참석, 1930-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 1946-조선공산당과 결별. 중도통합노선 제시, 1948-제헌국회의원. 초대농림부장관 역임, 1950-국회부의장 역임, 1952-제2, 3대 대통령 출마, 1956-‘진보당’ 창당 위원장 역임 및 평화통일 주창’

    그런데 이 연보비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언제 죽었는지는 단 한 자도 씌어 있지 않았다. 필자는 조봉암 비석 주위를 맴돌며 ‘왜 아무 글이 없을까’ 하고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때 옆을 지나던 어른이 “고인이 사형을 당해서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연보비의 제일 마지막에 들어갈 말은 이것이었다.

    ‘1959년-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 처형’

    죽산의 장남인 조규호씨는 “비석에 글을 새기고 싶어도 국가가 허락하지 않아 새기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역적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한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 비석 또한 아주 훗날에 세운 것이지, 매장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즉 조봉암 묘소에 자리 잡은 무언의 비석은 X자를 그린 마스크를 쓴 채 ‘침묵의 항변’을 한 게 아니라, 국가가 ‘불온한 무리’의 준동을 억제하려고 죽은 사람의 말문을 막은 결과물이었다. 도산 안창호가 죽어 망우묘지에 묻혔을 때 일본 순사가 묘를 지키고 불순분자의 방문을 막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다행히 2007년 9월2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1959년 사형당한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그 피해를 구제하며 명예를 회복시킬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조규호씨는 “현재 진행 중인 재심에 대해 공식적인 판결이 나오면 비로소 비석에 글을 새길 것”이라고 다짐한다.

    ‘거짓 운명’을 받아들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조봉암이 과거의 유명 정치가라는 사실만 알았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조봉암 묘지 비석에 글이 없는 사연을 알고자 나는 도서관에서 조봉암에 관한 당시의 신문기사와 책을 찾아 읽어보았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 정리한 조봉암의 삶은 이랬다.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 죽산은 극우와 극좌를 배척하는 중도의 길을 걸었다. 제2대 대통령선거 때는 불과 57만표를 얻었으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200만표를 넘게 얻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기에 당시 정권의 제거 대상이 됐다고 한다. 나라의 공식 선언이 없는 한 함부로 말할 처지는 아니나, 진보당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을 읽어볼 때 이는 다분히 이승만 정권의 과도한 정치행위로 보인다.

    재판 당시에도 언론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미국도 계속 이승만 정권에 경고를 보냈으나 자유당 강경파는 1959년 끝내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를 전환점으로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차기 정부 수립을 위한 전략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4·19 혁명 때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 물론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죽산의 죽음이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게 했다는 역설도 가능할 것이다.

    조봉암의 인물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광복 후 경찰청장으로 좌익 검거에 앞장서 국무총리까지 지낸 장택상은 자신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죽산의 사형이 집행되자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조봉암 선생의 장남 조규호(59)씨.

    “법은 법이라. 뭐라 자신은 판단하기 어려우나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법무장관을 만나 죽산의 형집행을 3·15 선거 후로 미루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는데…집행되었다. 법무장관의 배신이었고 식언이었다. 이 배신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서 받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서라도 받게 될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도 죽산의 죽음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을 연이어 보도했다. 1958년 5월28일자 동아일보는 “죽산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한 데 이어 1959년 7월31일에 집행된 교수형 상황에 대해선 “양명산은 처형 직전 조선인민만세의 발악 언사를 하였고, 그에 비해 죽산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전했다. 간첩으로 판명된 양명산과의 관계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진 ‘거짓 운명’을 죽산은 시대적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껏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북한이 혁명열사릉의 김규식, 조소앙 선생 묘 옆에 죽산의 허묘(虛墓)를 만들고 모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한 죽산은 당시 북쪽에서조차 ‘반역자’로 매도됐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세력을 다시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이미 출당시킨 죽산을 제멋대로 복권시켜 북쪽의 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죽산에게는 청하지도 않은 불리한 증인이 수십년 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셈이다.

    죽음을 초월한 인간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이들은 조봉암을 대표적인 ‘국보법 희생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보수파에 의해 좌파 인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죽산의 사형이 위법이라는 진실화해위의 발표에 대해 민주노동당과 조선일보가 함께 찬동의 의사를 나타낸 것은 죽산이야말로 좌우로부터 동시에 존경받는 한국 정치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죽산은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 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승만) 박사는 한 사람이 잘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

    죽산은 죽음의 순간에도 ‘내 억울하게 죽으니 후세가 내 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 인물됨은 현세에 국한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도량은 시대를 초월할 만큼 컸다. 죽음을 앞에 두고 죽산이 남긴 이 말은 인간과 세상을 꿰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입 밖에 낼 수 없는 명언이었다.

    죽산의 연보비 앞면에 새겨진 글 또한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많은 연보비를 보았지만 필자는 이 글만큼 감동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 -어록-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당신이 하고자 하는 그 무엇으로 바꾸어 읽어보라.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비록 아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진리와 순수함을 찾아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불굴의 의지가 담긴 문구다. 이런 사람에겐 굳이 종교가 없더라도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죽산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글이다.

    정치 지도자로서 죽산의 생애를 따라가다 문득 비명에 쓰이지 못한 죽산의 가족사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죽산의 장남인 조규호(59)씨를 만나 ‘아버지 조봉암’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죽산이 죽고 난 후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물었다.

    슬픈 亡父歌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삼학병 묘소의 비석 뒷면.

    “저는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간 어머니나 누님(조호정·80)이 언론에 나왔기 때문에 저와 여동생들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책상에 앉아 몇 시간이고 글을 쓰시던 뒷모습입니다. 제가 방에 들어가면 ‘규호 왔느냐’ 하시고 한번 안아준 뒤 다시 책상으로 돌아앉아 글을 쓰셨습니다. 나이 들어 정치인에 대해 갖게 된 인상은 낮에는 입만 놀리고 밤에는 술 마시는 이미지였는데, 아버지의 모습은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쓰신 글은 요즘 많은 학자가 연구하는 ‘평화통일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산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열 살이었다.

    “어린 제게 충격을 줄까 봐 아버지는 면회 때도 저를 못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친척 어른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 주변엔 새끼줄이 둘러쳐지고 형사가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집 드나들기가 쉽지 않았죠. 끼닛거리가 없어 하루 한 끼 먹는 날도 많았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네 대학생 형 집에 가서 역기를 들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상한 게, 잘 먹지도 못했는데 몸은 단단해지기만 했다는 거예요. 동네에서 싸움으로 저를 이길 아이가 없었지요. 젊을 때는 누구와 팔씨름을 해서 진 적이 없습니다. 장충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에는 마음이 없어 밖으로만 돌아다녔죠. 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를 한 적도 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죠. 후에 조직폭력배 두목이 된 아무개를 두들겨 팬 적도 있습니다. 그때 자칫하면 길을 잘못 들었을 거예요. 제 의식 속 어딘가에 계신 아버지가 항상 저를 지켜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무식하게’ 파고들어 1등을 했다. 학생회장도 했다. 약대에 진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한 뒤 공수특전단에 입대했다. 그런데 1년 후 갑자기 공병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특수임무 부적격자’라는 통지가 온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미국에 가려고 비자 신청을 하자 계속 거부당했다. 군 장성 출신의 회사 사장에게 연유를 물어보니 그가 ‘요시찰 인물’이기 때문일 거라 했다. 그는 지금껏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저는 이 세상에 저를 드러내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주위의 도움도 있어 사업으로 돈을 좀 번 때도 있죠. 그때는 아버지 기념사업을 한다고 돈을 뜯어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형편도 되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가족이 기댈 곳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기댈 곳은 오로지 종교뿐이었죠. 가족 전체가 가톨릭에 귀의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 둘째아들은 일반 대학을 나온 후 신부가 되기 위해 다시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한국 정치사에 남긴 큰 족적은 김대중과 김영삼도 이루지 못한 (신익희와의) 야당 후보 단일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평화통일론은 앞으로도 크게 조명을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치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수십명인 것으로 압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때도 큰 기대를 걸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 신청을 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오히려 그전의 노태우 대통령 때는 ‘재심이 필요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줄 수 없으니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라도 들었죠. 섭섭했지만 희망은 보였거든요. 지금 정부에 와서 명예회복의 길을 텄으니 개인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모든 사람, 저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그러하실 겁니다. 재심 결과가 잘 나와 만약 국가로부터 아버지에게 훈장이 내려지는 날이 온다면, 그날 저는 그 자리에서 나라에 큰절을 올릴 겁니다.”

    삼학병 무덤의 기구한 사연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1946년 거행된 삼학병의 장례식.

    죽산처럼 유명한 정치인은 아니지만 망우리묘지에는 좌우의 갈등 속에 희생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무덤도 있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 순환로(좌측)를 따라 10여 분 가다 보면 경기도 구리시에서 세운 자연보호 안내판이 보이고 이를 지나 다시 500여m를 가면 왼쪽 아래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철책이 나타난다. 철책 안으로 소담한 사철나무 세 그루를 앞에 둔 무덤 셋이 나란히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삼학병(三學兵 ·~1946)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나란히 선 세 무덤 앞에는 양옆으로 망주석이 서 있다.

    학병 3인의 무덤은 왼쪽부터 ‘학병(學兵) 김명근(金命根), 박진동(朴晋東), 김성익(金星翼) 의사지묘(義士之墓)’라고 쓰인 비석과 함께 상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세 비석의 뒷면에는 ‘1946년 1월19일 祖國을 爲하여 죽다’라고 똑같이 씌어 있다. 출생년도나 본관도 씌어 있지 않은 비석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때 학병으로 나갔다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고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 전쟁과 무관한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19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6년 1월19일은 ‘학병동맹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학병동맹은 1944년 일제의 학병제도 시행 후 전쟁에 나갔다가 광복 후 돌아온 학생들의 모임. 당시 학병에 징집됐다 돌아온 학생들은 일제의 희생자로 간주됐다. 더구나 이들 대다수는 혈기왕성한 젊은 지식인층이었기에 광복 후 그들의 정치적 입김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절 지식인 중에 좌파가 많았던 것처럼 학병동맹도 좌파 정치세력의 하나로 치부됐다. 그 탓에 학병동맹은 결국 우리에겐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발표하자 남한 사회는 반탁의 우파와 찬탁의 좌파로 갈려 격렬한 대립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 얼마 후인 1946년 1월18일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반탁전국학생연맹(위원장 이철승)과 찬탁파인 좌익 학병동맹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양쪽에서 4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학병동맹이 총기를 소지했다는 정보에 경찰은 이튿날인 19일 새벽 서울 삼청동의 학병동맹본부를 포위했고, 학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 경찰의 총격으로 학병동맹원 3명이 피살됐다. 그 세 희생자가 바로 이곳 망우리에 묻힌 삼학병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사라진 학병동맹사건은 그 피해자의 본명조차 잘못 알려져 있다. ‘광복기 시의 현실인식과 논리’(박용찬, 2004)는 사회과학대사전에 의거해 삼학병의 이름을 박진동, 김성익, 이달(李達)이라고 써 놓았지만, 실제 무덤 비석에는 이달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대신 김명근이 씌어 있다. 어느 것이 맞을까. 1946년 1월29일자 조선일보는 그에 대한 해답을 던져준다. 이달의 본명이 김명근이었다.

    ‘좌우익은 회개하라!’

    삼학병 중 김성익은 학병동맹의 부위원장이었고, 박진동은 진주고보 11회 졸업생으로 학병동맹의 군사부장이었다. LG그룹 일가를 취재한 2005년 5월16일자 서울신문은 ‘박진동은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의 아들로 LG그룹 창립자인 구인회 회장의 장녀 양세(당시 15세)와 결혼하였으나, 광복 후 좌우익 투쟁 중 학병동맹본부 피습 사건으로 사망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 동기 백석주는 후일 증언을 통해 박진동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19일 아침 7시 학병동맹회관에 이르니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경찰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고 박진동은 마루에 쓰러져 있었는데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 눈을 감겨주었다.”

    ‘조봉암과 삼학병’ 글 없는 비석이 전하는 침묵의 소리
    김영식

    1962년 부산 출생

    중앙대 일문과 졸업

    한국미쓰비시상사 근무

    現 지원상사 대표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수필), 2003년 문예진흥원 선정 우수문학사이트(일본문학취미)

    역서 :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


    좌우파가 대립하던 혼돈 정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우파가 좌파를 진압하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대상황의 희생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후에 우파 정권은 미군정과 함께 학병동맹을 해산시켰고, 이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학병동맹사건에 대해 기억할 단서를 놓쳐버렸다. 다만 망우리공원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선 비석만이 이들이 ‘조국을 위해 죽은’ 학병임을 알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서도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됐다. 좌이건 우이건 민주정부를 추구한 것은 다를 바가 없는데, 이념이 달라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 명은 죽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세 학병의 장례식은 1946년 1월31일 거행됐다. 그해 조선일보 2월1일자는 ‘천일(天日)조차 무색(無色)하다. 3학병 연합장의 성대’라는 제목으로 장례식을 상세히 보도하며 애도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오른쪽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좌우익은 회개하라. 난국에 비분. 비정치인사 궐연(蹶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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