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총병력 69만, 자산가치 2500억달러의 미군 증원전력을 보낸다’는 기존의 전시증원 규모와 절차를 재조정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007년 7월, 미군 군사변혁의 심장으로 불리는 미 합동전력사령부가 이를 재조정하겠다는 계획서를 펜타곤에 제출했음이 한미 양국군 관계자들을 통해 확인됐다. 이러한 재조정은 “전작권 전환 이후에도 전시증원에는 변화가 없다”고 못 박아온 한국 정부의 그간 설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더욱이 청와대나 한국 국방부는 워싱턴의 재조정 작업 돌입을 정식으로 통보받지도 못했다.
2007년 3월말 한미 연합전시증원(RSOI)연습에 참가한 미 해군의 4만t급 대형 상륙함이 부산항에 정박해 있다. 헬기 등을 탑재한 이 상륙함은 임무를 끝낸 미군들의 휴식을 위해 부산항에 입항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한반도에서 위기가 조성되어 데프콘Ⅲ가 발령되면, 미국은 150개 항목으로 구성된 신속억제방안(FDO·Flexible Deterrence Option)을 시행해 정치·경제·외교·군사적 조치를 취한다. 이 가운데 군사적인 조치로는 해·공군 감시전력 증파가 있다. 이러한 조치로도 전쟁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개전 초기에 긴요한 항공기와 항모전투단 등 주요 전투부대 및 지원부대를 증원하는 전투력 증강(FMP·Force Module Package) 조치가 시행된다. 그럼에도 긴장상황이 종료되지 않아 끝내 전쟁이 발발하면 예정된 모든 증원전력을 실어 보내는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Time Phased Forces Deployment Data)이 가동된다.
이러한 3단계 증원은 한미연합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지시를 내려 전개되며, 일본과 괌, 미국 본토 등에서 온 각급 부대는 한반도에서 통합과정을 거쳐 전장에 투입된다는 것이 그간 공개된 전시증원의 기본 콘셉트다. 한국군과 미군은 유사시 미 증원전력의 원활한 전개를 준비하기 위해 1994년부터 연합전시증원(RSOI) 연습을 매년 실시하며 절차 등을 점검해왔다.
한국 정부는 ‘국방백서’ 등을 통해 3단계에 걸친 미군의 전시증원전력 규모가 육·해·공군 및 해병대를 포함해 총 69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지상전력 2개 군단과 5개 항모전투단, 공중전력 32개 대대와 오키나와 및 미 본토의 2개 해병기동군으로 구성된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전체 미 해군의 40% 이상, 공군의 50% 이상, 미 해병대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라는 것이다. 국방부 산하 한국국방연구원은 2005년 12월 ‘한미동맹의 경제적 역할 평가 및 정책방향’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유사시 증파되는 미군의 전력가치가 2500억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2006년 한미 간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전시증원의 보장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현재의 한미연합사가 해체되고 양국군이 ‘병렬형 지휘관계’를 구축하게 되면, 연합사 체계를 통해 자동으로 진행되도록 설정돼 있는 현재의 전시증원도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였다. 특히 이러한 견해가 전작권 전환 추진을 비판하는 데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면서 향후 전시증원의 구체적인 변화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전시증원에는 변함이 없다”고 여러 차례 못 박은 바 있다. 2006년 8월 청와대가 배포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의 이해’ 자료집은 “증원전력 지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증원전력은 그대로 유지되며, 이는 향후 TOR(관련약정)이나 전략지시 등에 명시적으로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국정브리핑’은 같은 해 10월 국방부 견해를 인용해 “전시증원전력 보장에 대해 지난 9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약으로 확인한 바 있고, 올해 한미연례안보협의(SCM)에서 합의한 전작권 전환 로드맵에도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확언은 최근 복수의 한미 양국 당국자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과는 다르다. 미국이 2007년 중반 들어 전시증원 재검토에 본격적으로 돌입했으며, 그 구체적인 결과가 1년 이내에 나올 것이라고 관련 당국자들과 전문기관 관계자들이 전하고 있기 때문. 그 세부적인 내역을 들여다보자.
전시증원의 새 심장부, 합동전력사
미 합동전력사령관을 맡고 있는 랜스 스미스 공군대장. 2001년부터 2년간 주한미군 부사령관 겸 7공군 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다.
기존에는 특정지역에 분쟁이 발생해 미군이 개입하려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령부로부터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받은 각각의 부대와 무기체계가 개별적으로 해당지역을 향해 출발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모인 부대의 편성과 상호운용을 전장 사령부가 직접 수행하다 보니 효율적인 작업이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 해안 상륙을 맡을 해병대 병력은 도착했지만 지원작전을 수행할 헬기 부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려야 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능이 강화된 합동전력사가 언제, 어떤 부대를, 어떻게 꾸려 보낼 것인지 결정하고 수행하는 임무를 맡는다. 육군 중심이던 기존 편성방식에서 벗어나 해·공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도록 ‘합동(Joint)’이라는 단어를 명칭에 포함하게 된 것. 이에 따라 앞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그 전시증원 부대를 조직하고 보내는 실무는 합동전력사가 담당한다. 당연히 평시에 그에 대비한 계획과 증원규모를 결정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것 역시 합동전력사의 임무다. 한마디로 합동전력사가 한반도 전시증원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한국측 처지에서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부분은, 이 합동전력사의 랜스 스미스 사령관(공군 대장)이 2007년 7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마이클 멀린 합참의장에게 “한반도 전시증원의 규모를 합동성·합리성 강화 차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사실. 이같은 재검토 작업 추진은 9월 들어 주한미군사령부에 통보됐고, 최근 한국 국방부와 합참도 관련 정보를 확인해 각급 전략 및 기획담당 부서로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양국의 안보 당국자들은 “합동전력사의 이러한 움직임은 2001년 가을부터 2년간 주한미군 부사령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스미스 사령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합동전력사에 힘이 실린 최근의 워싱턴 분위기로 볼 때 재조정 작업은 조만간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증원 조정의 핵심은 절차와 규모로 나뉜다. 앞서 현재의 전시증원 절차로는 미 본토 등에서 온 각급 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한 뒤 통합돼 전장에 투입된다고 밝힌 바 있다. 합동전력사는 이러한 절차 자체를 바꾼다. 미 본토 등에서 부대 편성을 마친 후에 한반도에 투입되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규모의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대규모 지상군 투입 시나리오가 해·공군에 초점을 맞추는 효율성 중심의 체계로 변한다. 당연히 전시증원병력의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합동전력사가 말하는 ‘합동성 강화’는 곧 해·공군의 작전 비중을 높이겠다는 것과 다름없고, ‘합리성 강화’는 기존 전시증원계획 속의 거품을 제거하겠다는 표현이라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앞서 밝힌 대로 합동전력사의 전시증원 재검토 돌입은 9월 들어 주한미군사에 통보됐고, 관련 의견도 수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한국 국방부나 합참은 2007년 11월 열린 SCM이나 한미 군사위원회(MCM) 등의 협의체를 비롯해 어떤 경로로도 미국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최근 들어 연합사 기획참모부(C5) 등을 대상으로 이를 자체적으로 확인하고 그 내역을 파악해 각군에 전파하는 작업으로 부산하다는 것. 한 연합사 관계자는 “한미관계가 이전에 비해 ‘대등해졌다’면 굳이 미국측이 먼저 나서서 이를 공식적으로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는 펜타곤 당국자들의 인식이 깔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병력규모 10만~30만 될 듯
군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전시증원 규모의 축소 혹은 재조정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온 일이라고 말한다. 당장 정부가 밝혔던 ‘69만’이라는 숫자부터 수사(修辭)에 가깝다는 것. 이는 ‘미군 69만명이 한번에 전선에 투입된다’는 것이 아니라 누적인원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 임무교대 등을 통해 교체되는 인원 등 한반도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의 수를 합산한 것이다.
미국의 전쟁권한법(Warpower Act)은 의회의 참전 결의가 없어도 60일 범위 내에서 해외파병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으며, 일단 파병하고 나면 기한을 30일 연장할 수 있다. 물론 동맹국인 한국이 침략을 당하는 경우 의회의 전쟁결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워싱턴에서 정치적 논쟁이 길어질 경우에도 백악관의 의지만으로 90일 내에는 한반도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전시증원 관련 논의는 90일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69만이라는 숫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가운데 9만가량을 교체투입의 부담이 별로 없는 해·공군이 차지한다고 보고, 90일 내에 30만 규모의 지상군 병력이 한번 임무교대를 한다고 보면 연인원이 60만이 된다. 이를 모두 합한 게 69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 전쟁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미군 병력의 최대규모는 ‘현재 기준’으로도 40만을 넘기 어렵다.
그나마 이 정도 숫자도 미군 17~18개 사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미 본토와 전세계에 배치된 140만 미군 가운데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단순 합계한 것에 가깝다. 한마디로 ‘온다’라기보다는 ‘올 수 있다’다. 이러한 사실은 전시증원의 완성 단계인 TPFDD가 한반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TPFDD는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이 나든’ 미군이 투입할 수 있는 군사자산의 총계를 정리한 내역이다. TPFDD의 마지막 글자가 ‘Data’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라크전 등으로 인해 최근 미군이 가용 군사자산의 대부분을 소진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한미군의 숫자를 줄여가며 전장에 내보내는 형편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미군은 기존의 사단체계 대신 기동성을 강화한 스트라이커 여단 위주의 체계로 지상군을 재편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실제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동원 가능한 전시증원의 규모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정설이다.
합동전력사가 추진하고 있는 전시증원 재조정 작업은 이러한 현실과 그간의 변화를 반영해 ‘합리적인 계획안’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비생산적인 부대 투입 시스템을 개선해 육·해·공군의 합동성을 강화하고, ‘립서비스’로 제시돼 있는 TPFDD의 거품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게 군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미 국방부 내에서 이미 1990년대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돼왔다는 것.
특히 합동전력사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이 합동성과 효율성을 강조해 지상군 투입 대신 해·공군 위주의 전쟁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감안하면 전시증원의 규모는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는 10만 안팎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 합동전력사의 재조정 작업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므로 정확한 숫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대략 10만~30만을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 구체적인 숫자는 전작권 전환일정에 따라 기존의 작계 5027, 5026 등을 대체하는 새로운 작계가 얼개를 갖추는 2008년 하반기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무지했거나 정직하지 않았거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근 수년간 미국측이 “69만 전시증원을 보장한다”고 말한 바 없다는 사실이다. 양측의 공식 합의문서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은 확고하다”는 정도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정부 혼자서 이미 기정사실이 된 변화의 흐름을 무시한 채 ‘69만’이라는 숫자를 강조해왔을 뿐이라는 것. 다음은 한 전문 연구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물론 전시증원 규모의 조정이 전작권 전환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전작권 전환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예견된 변화를 무시했거나 혹은 논란이 커지는 것을 의식해 감춰왔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한미동맹의 변화에 워싱턴의 의지가 실려 있고, 그 핵심에 ‘가급적 한반도 전쟁에서 개입 정도를 줄여나간다’는 목적이 깔려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몰랐다면 한국 정부는 무지했던 것이고, 알고도 정치적 논쟁을 염려해 말하지 않았다면 정직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