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 클럽 내장객께서는 반드시 재킷을 착용해 주십시오.” 아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민주, 평등, 개명천지에 아직도 골프만 귀족 스포츠 타령이야? 개나 소나 골프채 휘두르는 요즘 세상에…라는 생각이 들거들랑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시라.
백동 필자는 “명문 오거스타내셔널골프장은 구성(球聖) 보비 존스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거스타내셔널골프장이 민주화, 평등화한 오늘날까지 가장 권위적, 폐쇄적이면서도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보비 존스의 친구인 로버츠 클리퍼드의 노력 덕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더라”고 말하면서 오거스타와 로버츠 클리퍼드에 얽힌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여긴 브로드웨이가 아니오”
클럽 규칙에서만큼은 로버츠 클리퍼드가 보비 존스조차 압도했다. 어느 해 마스터스 첫날, 존스와 친한 기자 몇몇이 존스를 만나러 들렀다. 친구들이 온 김에 존스는 그들을 파3 코스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들이 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는데 클리퍼드가 나타났다. 사정을 알게 된 존스가 이견을 내놓았다.
“밥, 우리의 게스트 플레이 규칙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게스트는 멤버와 함께 플레이해야만 하네.”
존스는 “내가 지금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만큼 한 번만 편의를 봐주면 안 되겠나”라고 물었다. 하지만 클리퍼드는 예외를 허용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오거스타 규칙과 관련된 것이라면. 존스의 친구들이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수술에서 회복 중인 존스가 함께 라운드하는 것이었다. 존스는 힘겹게 6홀을 돌고난 뒤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물론 기자들은 회원을 동반하지 않고 나머지 홀 라운드를 마쳤다.
마스터스가 열리던 어느 해, 클리퍼드는 갤러리 중 누군가가 시끄럽게 떠들어 선수들을 방해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클리퍼드는 즉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필드로 나갔다. 소란을 피우는 이들은 몇몇 코미디언과 텔레비전 스타 재키 글리슨,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었다. 클리퍼드는 경비들을 시켜 그들을 코스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러고는 글리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오거스타입니다. 브로드웨이가 아니죠.”
1977년 프랭크 비어드는 투어 선수로서 플레이를 했지만 동시에 CBS에서 골프 해설을 했으며 ‘골프 다이제스트’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칼럼에서 오거스타와 마스터스에 대해 살짝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클리퍼드에겐 오거스타에 대해 살짝 비난한다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CBS 골프 프로그램 담당자를 불러다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거스타에 프랭크 비어드가 오는 걸 원치 않고, CBS에서도 그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프랭크 비어드는 결국 다시는 오거스타에서 일하지 못했고 CB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잭 휘태커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오거스타의 많은 갤러리를 ‘폭도’에 비유해 클리퍼드를 화나게 만들었다.
“마스터스에 폭도는 없으며 또한 잭 휘태커도 앞으로 없을 것이다.”
휘태커는 마스터스 중계에서 물러나 ABC로 옮겨야 했다.
“뭐가 문제라는 거요?”
오거스타는 세계에서 가장 배타적인 골프클럽이기도 하다. 멤버십은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만 얻을 수 있다. 클럽은 수년 동안 멤버들의 명단을 쥐고 있던 독재적인 회장 로버츠 클리퍼드가 운영해왔다. 클리퍼드가 누군가를 멤버로서 부적격하다고 한번 판단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누가 편지를 보내도 통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멤버가 클럽에 전화를 걸어 클럽 통나무집을 예약하려고 했다. 담당자는 그가 더 이상 클럽 멤버가 아니라고 통보하고 전화를 클리퍼드에게 연결했다.
“아니, 클리퍼드씨 도대체 내가 왜 멤버가 아닌 거죠?”
“회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난 회비를 지급하라는 통지를 받은 적이 없어요.”
“바로 그겁니다.”
몇 해 전까지 오거스타는 몇 명의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는지 깃발로 표시하곤 했다. 검은색 깃발은 1명의 게스트만 초대 가능하다는 뜻이고, 빨간 깃발은 3명의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어느 날 한 멤버가 3명의 게스트와 함께 클럽에 도착했다. 그는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면서 검은색 깃발이 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게스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클리퍼드를 보러 갔다.
“클리퍼드, 문제가 있네. 내가 게스트 3명과 와서 벌써 티오프 준비를 다 했네.”
클리퍼드가 대꾸했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클럽하우스에 한 멤버가 친구들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는 아주 괜찮은 클럽이야. 하지만 코스는 보통인 것 같아. 내가 다니는, 북쪽에 있는 코스가 여기보다 나은 것 같아.”
몇 주 뒤 그 멤버의 라커에 있던 물건은 북쪽에 있는 클럽으로 보내졌다.
필자는 오거스타와 클리퍼드에 관련된 이런 몇 가지 얘기를 들먹인 후 남부CC 관계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기에서 차(車)는 가고 싶은 대로 몇 칸을 움직일 수 있지요. 포(包)는 언제나 하나를 넘어서만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졸(卒)은 앞이나 좌우로 한 칸씩만 움직일 수 있을 뿐 뒤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장기를 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규칙을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규칙들도 애당초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훗날 사람들이 이를 바꿀 수도 있다 할 것인데, 후세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바꾸려들지 않습니다. 남부CC 내장객에게 골프 치러 올 때 재킷을 착용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진정 명문 골프장이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시지요. 1년쯤 지나면 골퍼들은 남부CC에 갈 때는 재킷을 입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클리퍼드씨, 배지를 제시하시죠”
로버츠 클리퍼드의 친구들조차 그에 대해 말할 때는 그가 독재적이고 깐깐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가 오거스타를 진심으로 아끼고 오거스타와 대회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따라붙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마스터스 대회 기간 중 클리퍼드가 클럽하우스 정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 보안요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실례합니다만, 배지가 있습니까?”
“나 클리퍼드요.”
“네 클리퍼드씨, 배지를 갖고 계시냐고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저는 로버츠 클리퍼드입니다.”
“네, 로버츠씨 이해합니다. 배지가 있습니까? 배지를 제시하면 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클리퍼드는 그의 집무실로 가서 배지를 챙겨서 다시 왔다. 그러고는 보안요원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보안요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는 자네가 원할 때까지 자네의 자리일세.”
남부CC 관계자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준 후 10여 년이 지난 어느 해, 필자는 어떤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이 이야기를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분에게 구차하게 장기 이야기나 로버츠 클리퍼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깃 있는 셔츠 착용은 의무
1920년 10월3일. 전미오픈 무대로 알려져 있던 매사추세츠 주 프레아반컨트리클럽에서는 클레멘스컵 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다. 낮은 핸디캡의 아마추어들이 경쟁하여 1~3위 입상자에게는 전미오픈 출장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대회였다. 경기 시작 직전에 클럽 이사장 마이크 도브넨은 1번홀 티잉그라운드로 빨리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달려가 보니 아무래도 골퍼로는 보이지 않는 중년남성 3명이 경기위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단번에 눈에 띄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철도 회사인 ‘유니온트레일’의 작업복이었다.
“무슨 일이요?”
“사전에 엔트리 신청을 마친 정규 출전선수들인데, 보시는 바와 같이 복장이 골프에 합당하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고들 하시는데, 세탁은 한 것 같습니다. 진 소재 작업복을 입은 사람에게 스타트를 허가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작업복을 입은 한 사람이 말했다.
“진이 어디가 나쁜가요? 골프는 만인에게 사랑받는 옥외 스포츠인데, 그렇다면 복장도 자유로워야 하지요. 이러쿵저러쿵 따질 까닭이 없어요.”
19세 때 스코틀랜드를 떠나와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6년간 공부했던 마이크는 당시 미국 골프계에서 몇 안 되는 인텔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골프에 대한 얄팍한 미국적 사고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의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스타트를 허락해서는 안 되네. 즉시 퇴장시키게!”
“이유를 설명해보시오.”
“그렇게 하겠소.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실로 안타깝소. 골프는 역사와 전통에 의하여 지탱돼온 경기요. 세상 물정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오.”
이렇게 되자 1번 티잉그라운드 주변에는 선수와 경기위원, 갤러리까지 몰려들어 소란스러워졌다. 커다란 키의 그는 모두를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를 꿰뚫어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요. 14세기부터 골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를 중심으로 발전돼온 경기요. 당연한 것이지만 규칙의 모형도 왕가의 가훈에서 온 것이오. 복장에 관해 가훈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소. ‘복장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다.’
만약 자신만을 위한 삶이라면 와이셔츠, 넥타이, 재킷은 무겁고 괴로운 것에 지나지 않소. 따라서 누구든지 가벼운 옷차림으로 인생을 보낼 것이오. 그러나 아시다시피 클럽은 신사들의 사교장이오.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요. 예의바른 태도는 골퍼에게 요구되는 자질의 하나요. 말쑥한 옷차림이 내키지 않는다면 골프와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해주시오. 이 게임은 제 마음대로인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오. 진은 어디를 가더라도 작업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소. 그래서 사교장에는 어울리지 않소. 왕가의 가훈에 따르면, 백보를 양보해도 옷깃(襟)이 있는 셔츠가 골프의 절대조건이었소. 역사적으로 옷깃은 상대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소.”
1920년 10월3일이야말로 고집쟁이 마이크에 의해 처음으로 미국에 골프 복장의 기본이 전달된,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신문과 잡지에 보도됐다. 그래서 그때까지 애매했던 복장 규정이 이를 계기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전미골프협회에서는 규칙서에 ‘플레이할 때에는 깃이 있는 셔츠 착용이 의무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