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작가 최홍의 역사 추적

  • 최 홍 작가 doksuri-ch@hanmail.net

    입력2008-01-09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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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불천탑’의 성지로 불리는 화순 운주사는 해상왕 장보고를 기리는 추모 유적지이고, 경내에 장보고의 유골과 유물이 묻힌 능묘가 있다.” ‘천년의 비밀 운주사’의 저자인 최홍씨는 이렇게 주장하며 관련단체·기관들에 공개적인 탐사, 발굴을 제안했다.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해상왕 장보고 초상(왼쪽)과 그의 능묘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전남 화순 운주사.

    필자는 1년여 전에 ‘천년의 비밀 운주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한국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전남 화순의 운주사(雲住寺)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천불천탑(千佛千塔)의 불교 유적지가 아니라, 해상영웅 장보고(張保皐·?~846)를 추모하기 위한 유적지라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광주방송(KBC)에서는 책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영했다. 지난 10월에는 사단법인 장보고연구회가 주관하고 완도군청이 후원해 완도군의 중·고교생, 교사, 일반인 등 60여 명이 장보고 유적지 답사의 일환으로 운주사를 찾기도 했다. 또한 이전에 운주사가 몽골군에 의해 축조됐다는 설이나, 운주사 탑들이 천문도(天文圖)와 일치한다는 설(탑들의 배치가 밤하늘의 1등성과 일치한다는 설) 등이 제기됐을 때와는 달리 학계의 반박이 전무한 것도 일단 긍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국내 어딘가에 장보고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종종 한 영웅을 말살시키지만 민중은 영웅을 말살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은 영웅을 제대로 평가하고 후세에 기리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한다. 그것은 상징적인 유적일 수도 있고, 무속신(巫俗神)으로의 부활일 수도 있으며, 은유적인 설화일 수도 있다. 무당들이 몸주신으로 흔히 모시는 최영이나 임경업 장군 신(神), 조선 중기에 대대적인 피바람을 몰고온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인공 정여립 장군의 말 무덤(전북 김제시 쌍룡리 소재), 우리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아기)장수와 용마 설화 등이 그러한 예다.

    장보고는 대륙의 광개토대왕에 비견되는 탁월한 행적에도, 정권에 의해 내쳐진 희생양이라는, 비극적 영웅으로 평가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또한 그를 제왕처럼 받들던 추종세력이 있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그를 후세에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운주사의 불가사의에 대해 연구하다 뜻밖에도 그의 자취를 발견한 것이다.

    운주사의 비밀



    운주사는 흔히 ‘천불천탑의 성지’로 불리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불교 유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탑과 불상이라 불리는 석상들의 모양새나 배치 상태가 다른 불교 유적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단순한 불교 유적이라면 이처럼 불가사의로 남겨둘 이유가 없다. 그 내막을 소상히 밝히고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경배하도록 하는 게 불교 유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운주사가 불가사의로 남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권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왕조의 비밀을 담고 있거나, 왕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계의 불가사의 대부분이 왕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에 불교식으로 유적들을 조성한 것은 그 내막이 불교와 관련되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장보고는 왕권에 도전한 대역죄인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그에 관한 유적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다, 우리 불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에 불교식으로 추모 유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최홍씨가 장보고의 유골과 유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운주사 대웅전 뒤편 구릉.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저(拙著)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운주사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 하나를 밝히고자 한다. 그 비밀이란 운주사 경내에 장보고의 유골과 유물이 매장된 능묘(陵墓)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운주사 경내에는 이른바 최고의 명당이라는 터가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있는 작은 구릉이다. 이 구릉 위쪽에는 두 기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 원반형으로 생긴 3층탑에는 아예 ‘명당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범씨 설화

    이 구릉은 남쪽을 향해 있는데다, 좌우 양쪽에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하는 두 산줄기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뒤편에 배산(背山)으로 천불산을, 앞쪽에 안산(案山)으로 범바위산(일봉암이라고도 함)을 두고 있어 풍수적으로 명당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 자리는 왕혈(王穴) 터, 또는 왕후지지(王侯之地)라 불렸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 왕이 나와 칠산바다(전남 영광군 앞에 있는 바다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서·남해를 의미함)에 도읍을 정한다는 것이다. 설화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왕씨가 개성에 도읍하여 500년 해먹고, 다음에는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여 500년 해먹고, 그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여 700년을 해먹는다… 그러나 이곳에 묘를 쓰면 범씨가 나와 칠산바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 왕조를 펴는데, 그때가 되면 주변 7개국이 조공을 바칠 만큼(또는 중국이나 일본의 기를 누를 만큼) 강력한 국가가 된다…

    설화 내용 자체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터에는 범씨만이 묘를 쓸 수 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범씨는 흔히 볼 수 있는 성씨가 아니다. 다른 많은 성을 두고 왜 하필 범씨가 나온다고 했을까. 범씨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범씨 성의 한자는 范(풀이름 범)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범’자 중에는 帆도 있고 汎도 있다. 帆은 돛을 뜻하며 汎은 물 위에 뜨는 것을 의미하는 한자다. 그런데 칠산바다에 도읍을 정할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해양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배(船)와 관련된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범씨 성을 사용한 게 아닐까.

    또 다른 설화를 살펴보자. 이 터가 왕혈 터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외지 사람들이 밤중에 몰래 시신을 가져다가 묘를 쓰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에 꼭 인근 마을에 불볕 가뭄이 들어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필시 누군가가 그 자리에 몰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믿고 징이며 꽹과리 등을 들고 굿판을 벌이며 몰려가서는 묘를 다 파헤쳤다고 전해진다. 땅을 파헤쳐 보면 흔히 생석회가 두껍게 발라져 있고, 그 아래에서 육탈(肉脫)된 뼈들이 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자연 지형이 아니다?

    그렇게 찾아낸 뼈들을 버리지 않고 마을의 좌장 격인 어른이 한쪽에 치워두면 묘를 쓴 사람이 밤중에 몰래 와서 찾아갔다고 한다. 옛적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몰매로 다스리곤 했는데, 그런 마찰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묘를 할 때는 꼭 부녀자들만 달려들었다는 점. 남정네들은 근처에 얼씬도 않고 여자들이 묘를 파헤치는 광경을 멀리서 구경만 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꽤 구체적으로 전해지는데다, 증언한 사람 자신이 육탈된 뼈들을 직접 봤다고 하니 비교적 사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편이다.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장보고의 묘라는 전설이 있는 전남 완도군 장좌리의 목 없는 묘.

    이 설화에서 살펴볼 것은 금단(禁斷)의 성격이다. 즉 그 장소를 훼손하면 징벌이 가해진다는 응보적 성격을 띤 설화인 것이다. 원래 명당 자리는 다 임자가 있어 자격 있는 사람만이 써야 하며, 구체적으로 범씨만이 묘를 써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 설화가 나타내려는 것은 다른 게 아닐까. 즉 그 장소에 이미 누군가가 묻혀 있고, 그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습속과 설화를 만들어 퍼뜨린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부녀자들만 달려들어 파헤쳤다는 것은 시신이 남정네였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전래되는 설화는 물론 공적인 사료는 아니다. 그러나 오랜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문헌상의 기록으로 남기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던 사건들을 은유나 상징적인 형태의 설화로 만들어 민간 사이에 전해지게 했다. 설화는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자 우리의 또 다른 기록이고 역사다. 이 설화들은 소설가인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에 의해 조사된 것임을 밝혀둔다.

    그러면 이 구릉이 과연 묘라고 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알아보자. 이 구릉은 운주사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공사바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며, 소나무들이 자라 있는 데다 위쪽에 2기의 탑까지 세워져 있어 흔히 자연적으로 이뤄진 지형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자연적 지형으로 보기에는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

    우선 운주사 주변에는 이 구릉이 속해 있는 천불산이 원래 돌산(石山)인데 이 지역만 사토(沙土, 모래흙)로 되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이 구릉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다음으로, 이 구릉은 주변과 경사도가 다르다. 즉 이 지역의 좌측과 우측은 다소 급경사를 이루는 데 비해 이 지역만은 동물의 혀처럼 앞으로 쑥 나와 있다. 여기에 구릉의 윗부분도 완만하게 상승하지 않고 평평한 바닥으로 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깎아낸 것처럼 경사의 맥이 끊겨 있는 것이다. 99~132m2(30~40평)가량의 평평한 바닥은 산기슭으로는 적합한 지형이라 하기 어렵다.

    ‘목 없는 묘’

    현재 이 바닥 위에는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탑 형식의 4층탑과 원반 형태의 석판을 중첩시켜 만든 3층탑 등 2기의 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원래는 이 탑들이 없고 그저 평평한 바닥으로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800년대 운주사 주지를 지낸 설담 자우(自優) 스님이 운주사를 보수하면서 다른 지역에 있던 탑을 옮겨왔다고 한다. 자우 스님은 운주사의 다른 많은 자리를 두고 왜 하필 대웅전 뒤편의 후미진 이 자리에 탑들을 옮겨놓았을까. 그도 설화 등을 통해 이 자리가 뭔가 의미 있는 장소라는 것을 간파하고,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탑들을 세운 것은 아닐까.

    이 구릉이 자연적인 것인지 인공적인 것인지는 전문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알 수 있겠지만, 만약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용도는 누군가의 능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규모도 그렇지만 산기슭의 후미진 위치나, 풍수지리적인 관점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다른 용도를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능묘를 봉분 형태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운주사가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누군가의 능묘라는 게 알려지면 어느 때고 훼손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완도군 장좌리의 행길 옆 언덕배기 위에는 예로부터 ‘목 없는 묘’라는 허름한 묘가 하나 전해온다. 이 묘는 장도(將島)가 바라다보이는 장좌리의 ‘청해진 수석공원’에서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다 언덕배기로 오르면 찾을 수 있는데, 묘라기보다는 그저 흙더미에 불과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묘지석이나 표지판도 없다. 더구나 그 위에 소나무며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완도군 안에서도 그 위치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중국 산둥 적산법화원에 있는 장보고 기념관.

    이 묘가 바로 해상왕 장보고의 묘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추정의 근거는 이 부근이 청해진이 있던 곳이고, 장보고를 시해한 염장이 장보고의 목을 들고 경주로 향했다는 사실뿐이다. 생전에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하던 장보고를 생각하면 이 묘를 대하는 순간 눈이 시큰해지는데, 이 시큰함이 의문으로 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묘가 과연 장보고의 실제 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듯, 우리 역사는 종종 영웅을 버렸어도 민중은 그 영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보고 추종세력은 그가 죽은 뒤에도 중국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동안 건재했다.

    필자는 오랜 연구 끝에 전남 화순의 운주사가 장보고의 추모 유적지일 가능성이 크며 운주사 경내 어딘가에 장보고의 묘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한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이처럼 대규모의 능묘 조형물 유적을 조성했다면 실제 능묘도 조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 아래 능묘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았고, 대웅전 뒤편에서 비정(比定)되는 위치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장좌리의 ‘목 없는 묘’는 과연 무엇인가. 그 묘는 장보고의 실제 묘를 감추기 위해 일종의 가묘(假墓)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라면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국내에서 장보고의 흔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다만 완도군에 청해진 유적이 일부 남아 옛 자취를 드러낼 뿐이다.

    장보고의 흔적

    그러나 장보고는 역사 속에 그렇게 간단히 매몰시켜버릴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 그가 단지 대규모로 무역활동을 벌인 무역상이 아니라, 황해를 무대로 해상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중해를 무대로 국가를 건설했던 로마처럼. 그는 막대한 재력과 강한 군사력, 탁월한 리더십과 민중의 두터운 신망 등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킬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가 만약 정권의 서슬에 희생되지 않고 제명을 다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면들은 우리 선조들이 후세에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뭔가를 어떤 식으로든 남겨놓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는 뛰어난 업적 외에도 자질이나 인품 등 여러 면에서 후세에 길이 남겨 귀감을 삼을 만한 인물이었다.

    “화순 운주사에 해상왕 장보고 능묘 숨겨져 있다”
    최홍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법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품 :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 ‘천년의 비밀 운주사’ ‘베팅333’


    이런 이유들로 해서 필자는 평소 그의 흔적이 국내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주사의 유적들만 갖고 그의 면모를 살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운주사가 그를 기리는 사적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장보고라는 거인의 면모를 파악하는 자료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선조들이 장보고라는 인물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남겨놓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그는 생전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대역죄인으로 몰려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인물이다.

    필자는 운주사 대웅전 뒤편의 능묘로 추정되는 장소에 그의 유골과 함께 상당량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장보고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줄 유물들이.

    그동안 이러한 주장을 여러 관계 요로에 알리고 탐사나 발굴을 권고해왔다. 그러나 번번이 높은 벽과 한계만 실감했을 뿐이다. 이제 내 주장을 공개적으로 알려 많은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호응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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