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 회원들이 ‘신동아’ 독자를 위해 오랜만에 함께 모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병익 회장(위). 1954년 9월 서울 인사동에 동지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아래 오른쪽). 아래 왼쪽 작은 사진은 김병익 회장이 정부에서 받은 무공훈장(아래 왼쪽).
재일 학도의용군의 6·25전쟁 참전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7월 초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 4층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외롭게 사무실을 지키던 김병익(金炳翼·78) 재일 학도의용군동지회 회장은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참 만에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김 회장은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았던 242명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46명에 불과하다”면서 “운 좋게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지만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마음은 시커멓게 타버린 지 이미 오래”라고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미국 언론은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청년들의 구국 행렬을 두고 “세계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1950년 여름 재일교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재일교포 학생들의 6·25전쟁 참전이야말로 세계 역사상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이다. 병역 의무도 없는 해외교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 나간 숭고한 뜻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 발발과 지원 물결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일교포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불과 5년 만에 조국이 동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대해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우익 단체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전쟁 발발 다음날 담화문을 발표한 데 이어 29, 30일 이틀 동안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민단은 전국 청년학도의 자원병을 조국 전선에 파견한다. ▲전선 장병과 피난민에게 구호물자와 위문품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 ▲매일같이 준동하는 공산 진영의 파괴공작에 대비해 조직을 한층 더 견고히 하고 수호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이 결의에 따라 8월 5일 ‘자원병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재일교포 학생들의 지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곧 1000명이 넘는 재일교포 청년 학생이 참전 의사를 표시했다. 신체검사와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은 642명. 나이도 18세 고등학생 김교인(金敎仁)과 조승배(趙承培)부터 중년 고개를 넘긴 45세 김순룡(金順龍)까지 다양했다. 특히 당시 지원자 가운데는 연약한 처녀들도 있었지만 여성 지원자들의 한국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후쿠시마(福島)현 일본인 청년 대표가 민단 중앙본부를 찾아와 혈서로 작성된 100여 명의 일본인 지원자 명단을 제출하는 놀라운 사건도 벌어졌다. 여기엔 간호사로 일하던 일본인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관동군 출신인 그는 패전과 동시에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겪은 온갖 수모를 잊지 못하며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참전한다고 밝혔다. 오사카(大阪)에서도 일본군 특공대 출신 2명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
민단은 이들의 참전 의사를 전해 듣고 고민에 싸였다.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직 한국에 반일(反日) 감정이 남아 있는 상황에 일본인이 참전할 경우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