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미국에서의 첫 주말 나들이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시간가량 차를 몰아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나갔다가 뜻밖의 가두행렬과 마주쳤다. 현란한 복장을 한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귀가 찢어질 듯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축제치고는 좀 요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좋은 구경거리를 만났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그러나 행렬 가운데 속옷 차림의 두 남성이 강도 높은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매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세계적 규모의 동성애자 축제가 열린다. 물정 모르는 서울 촌사람의 나들이가 공교롭게도 그날과 겹쳤던 것이다. 미국이 내게 보낸, 조금은 색다른 환영인사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동성애자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다. 미국 인구조사(US Census)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샌프란시스코 인구의 15.9%가 성적 소수자라고 한다. 이곳의 카스트로 거리는 관광 안내책자에도 소개될 만큼 동성애자 밀집지역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히피문화의 발상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내에서 진보적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로 꼽힌다.
개인적으로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약자들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엄숙한 토론장에서나 접했을 뿐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애정을 표현하는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성적 소수자 30%
실제로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들이 이성애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할 권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가령, 동성애자에 대한 직장 내 차별은 반대할지라도 그들이 길거리에서 애인과 손을 잡고 키스를 하는 모습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성적 소수자들의 거리 축제가 있다. ‘퀴어문화축제’가 올해로 벌써 9년째 열리고 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을 ‘이상한 집단’으로 매도하기보다 ‘다양성의 하나’로 존중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국은 성적 소수자가 살아가기엔 아직 불편한 사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이들에게,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비교적 살기 좋은 곳이다.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이 자연스럽고 이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대수롭지 않다는 눈치다.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학교에서 마주치는 동성애자 커플의 다정한 모습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미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UCLA) 법과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5년 사이 미국 내 성적 소수자 인구는 30% 증가했다. 워싱턴 주에서는 같은 기간 성적 소수자가 50% 증가했다. 이는 실제 성적 소수자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연구팀의 수석연구원은 “이 연구 결과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벽장 속’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을 밝히는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벽장 속에서 나오다(coming out of closet)’라는 관용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변에 알리지 않은 잠재적 동성애자 인구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이러한 경향은 동성애 코드의 미디어 노출 빈도에 점차 반영되고 있다. 최근 미국동성애자연합(Gay And Lesbian Alliance Against Defamation·GLAAD)은 흥미로운 통계를 발표했다. 올해 미국의 인기 방송사 5개 채널에서 방영된 88개 드라마 가운데 등장인물이 성적 소수자인 경우가 16건이라는 것. 이는 전년과 비교해 9건 늘어난 수치다.
표심 가르는 동성애 문제
최근에는 미국의 인기 여배우 린제이 로한이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동성의 애인과 함께 했음을 밝혔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그것도 올해로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은 여성 연예인으로서 커밍아웃은 위험한 결정일 법도 한데, 분위기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했다.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놀라울 게 없다는 식이었다.
이외에도 동성애자 권익운동에 동참하는 연예인들의 지지선언이 계속되고 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는 동성 간 결혼 합법화 운동에 각각 10만달러를 내놓았다. 브래드 피트는 기자회견에서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혹자는 동성애자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저 조용히 살아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남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느냐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라도 속옷 차림으로 애인과 거리를 활보한다면 눈총을 받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이는 타인에 대한 예의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동성애가 단지 사랑이나 취향에 국한된 문제라면 그저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성애는 법이 보장한 권리를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동성애자의 법적 권익 문제 중에서도 동성 간 결혼의 허용 여부는 대통령선거 때마다 토론에 등장하는 단골소재다. 이 사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후보자의 진보적 혹은 보수적 성향을 가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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