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숀 매코맥 미국 국무부 대변인(오른쪽)이 10월11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강화협상이 아닌 외교협상에서 어느 일방이 완승하거나 완패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비록 이번 합의가 외견상 북한 쪽에 유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양측 이익의 균형점을 찾아냈을 때 협상이 타결되는 게 외교 교섭의 진리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과 북한이 얻는 이익은 과연 무엇인가.
이번 합의가 다소 의외인 것은 대부분 전문가들의 판단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북한이 임기 말 행정부와 담판을 짓느니 그럭저럭 시간을 끌다가 11월 미 대선 이후 차기 행정부를 상대하는 게 더 개연성이 높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제까지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던 부시 행정부와 중간결산하기를 택했다.
왜 그랬을까. “적과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이는 현재 상황이고 보면, 차기 행정부 출범까지 기다리는 게 유리하지 않았을까? 눈앞에 보이는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과실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테러지원국 해제조치가 당장 안겨줄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것을 평양이 몰랐을 리 없다.
영(零)에 대한 두려움
북한은 이번에 검증 문제를 털고 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설사 차기 백악관이 북한과의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해도 검증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어느 때보다도 허약한 상태에 놓인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3단계 협상 진입의 복병이 될 수 있는 검증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유리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핵 문제를 담당하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미국이 원하는 신고 및 검증은 핵 폐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언급을 몇 차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속내는 미국과의 ‘빅딜’을 위해 3단계 협상에 조기 진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클린턴 학습효과’도 한몫했을 것이다. “반복은 곧 죽음”이라는 게 2000년을 기억하는 북한 측 인사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임기 말 클린턴 행정부와의 협상을 지나치게 지연시키다가 시기를 놓쳐 2000년 북미공동 코뮤니케와 1994년 제네바합의가 모두 휴지조각이 됐던 실수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와의 합의 역시 구속력을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6자회담에서 추인되는 합의 결과는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더라도 마냥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분명 다르다.
부시 행정부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결정은 정책효과를 냉정하게 따지는 과정(이른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을 통해 나왔다기보다는 정부부처 간 이해관계(이른바 ‘조직과정 모델’)나 내부정치 논리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많은 이가 지적하듯 부시 행정부와 국무부로서는 전세계를 통틀어 사실상 유일한 외교 치적에 해당하는 북한과의 협상 진전에 손상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힐은 왜 리찬복을 만났나
더욱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 이번에 판이 깨지면 단순히 외교 실적 하나가 날아가는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북핵 외교가 두고두고 추궁당할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됐던 고농축우라늄(HEU) 관련 정보의 신빙성 문제가 이미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차기 행정부에서는 제임스 켈리 전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 현 차관보, 조지프 디트라니 전 대북 특사, 성 김 현 대북 특사 등 핵 협상에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청문회에 불려 나갈 판이다.
이번에 협상이 결렬돼 북한 측 표현대로 ‘영(零)의 상태’가 되면 부시 행정부는 지난 8년간 북한의 핵 능력을 증대시키고 핵 실험을 초래한 것말고는 한 일이 없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불완전 검증에 대한 논란을 감수하면서 부시 행정부 외교팀이 협상을 타결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일 듯하다. 실질적인 검증 가능성은 차치하고, 일단 명목상으로는 우라늄 농축 및 핵 확산도 검증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문화하기는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