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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이슈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분쟁지역의 의료봉사자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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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은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꼭 필요한 의사를 살해했을까. 배경에는 9·11테러 직전 카불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있다. 2001년 여름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SNI 연합이라는 구호단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했다. 이 단체 소속 독일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예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여주다 당국에 적발됐다. 아프가니스탄 언론은 이들이 선교를 위해 들어온 기독교인이라고 보도했다. 이윽고 탈레반 정부는 모든 외국인 구호단체를 추방했다. 이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외국 구호단체는 모두 기독교 선교 집단이라는 선입관이 생겼다.

알라가 주는 고통

탐과 함께 희생된 의사 중에는 영국인 외과의사 캐런 우(36)도 있다. 그는 22세 때 의과대학에 진학해 호주, 파푸아뉴기니, 남아프리카공화국,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의료 봉사를 한 훌륭한 의사다. 그는 결혼 날짜를 받아놓은 상황에서 연봉 15만 달러의 의사 직을 버리고 2010년 카불로 날아왔다. 또 다른 희생자 토머스 그램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통증을 멈추는 의사’로 소문난 치과의. 치과장비를 야크에 매달고 히말라야 산맥 중턱까지 올라가 치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여성이 외간 남성 앞에 나설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의 충치를 치료하려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는 남자들을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의료 봉사에 나서게 된 것은 글로벌치과구제(GDR) 설립자 로리 매튜를 만나면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치통은 알라가 주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치과 치료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치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치통을 잊게 하는 묘약은 아편이다. 그램스는 이곳에서 놀라운 의사였다. 카불프레스에서 일하는 라힘이라는 이름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램스가 진료 가방을 내려놓으면 이 아픈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상당수의 아프가니스탄인은 이를 치료하는 의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예전엔 치통을 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그램스에게 진료받은 이들은 인간이 이를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걸 신기해한다. 그램스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준 훌륭한 치과의사다.”

‘닥터 서’의 살신성인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2010년 12월 25일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 지역의 한 병원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다친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램스 같은 의사들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손실이다. 카불대 파쉬르 교수의 견해는 이렇다.

“아프가니스탄은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면 사형을 선고하는 근본주의 이슬람교 국가다. 외국인은 ‘탈레반이 무도하더라도 설마 생명을 지키는 의사까지 죽이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을 잘 모르는 서구의 시각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일지라도 기독교인이면 탈레반에게 스파이이자 적이다.”

한국인 서기용(54) 씨도 IAM 소속으로 1997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탐과 함께 아픈 이를 치료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위내시경을 처음 도입한 의사로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위내시경을 하려면 파키스탄까지 가야 했다. 필자는 그를 기억하는 이를 여럿 만났다. 직접 치료를 받았거나 소문을 들어 명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스핀자르호텔 지배인 굴 아하마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자 “닥터 서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의 친척은 차로 15시간이나 걸려 여기까지 와서 닥터 서에게 진료를 받고 위장병을 완치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서 씨는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남부로 이동해 우르즈간 주의 키사오라는 지역에서 작은 병원을 세웠다. 우르즈간 주는 산악 오지다. 그런 곳에서 변변한 지원금도 없이 진료하는 한국 의사가 있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곳은 탈레반의 본거지로 외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다.

그가 병원을 열자 탈레반은 병원에서 진료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2002년 초 그는 탈레반 지역사령관을 직접 만나 병원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사령관은 “우리는 지금 카르자이(대통령)와 미군 때문에 일시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구호단체를 거부한다. 구호단체가 오면 뒤를 이어 미국 놈들이 들어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탈레반이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에선 더 이상 쓰지 않는 낡은 의료 장비를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여왔다. 한국에서 파키스탄으로 장비를 보내 육로로 국경을 통과한 후 카불로, 다시 남부 칸다하르로 이송하고 그것을 키사오로 옮겼다. 이렇게 도착한 장비는 엑스레이 기계, 피검사 장비, 위내시경 및 초음파 기구다. 복잡하지 않은 수술이라도 할 수 있어야겠단 생각에 병원을 개원했다고 한다. “월 3000달러를 가지고 병원을 운영했을 만큼 어려웠어요. 의사로서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병원을 개원한 것은 의사로서의 사명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2005년 그는 병원에서 차로 두 시간 떨어진 어느 시장에서 반군의 총격을 받았다. 그는 무차별로 총질하는 반군을 피해 차 밑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라는 정지명령을 듣지 못해 벌어진 사소한 오해였다. 그는 운전기사를 죽이겠다는 반군 지휘관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상대방의 수염을 만져주면서 용서를 비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문화예요. 탈레반의 수염을 만지며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래서 잘 해결됐지만 아찔했던 순간입니다.”

그는 이동 진료도 나섰는데 병원으로 되돌아가는 ‘피의 고개’(아프간 남부의 헬만 주와 우르즈간 주 경계에 있는 고개이름)를 넘을 때마다 무섭고 긴장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의료 봉사를 하는 까닭이 뭐냐고 우문을 던졌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언젠가 병원에 콜레라를 앓는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을 살리고자 수액 30병을 하루 종일 투여했습니다. 모두가 죽으리라고 생각하던 그 아주머니가 살아나서 무척 기뻤어요. 의술을 가진 사람으로 행복을 느꼈지요.”

그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있다. 2007년 샘물교회 신도 납치 사건 탓에 정부가 철수를 요청하면서 진료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큰 병원을 새로 지었고 병원 장비도 보완했는데 그것을 다 놔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 사람들을 진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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