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잘 모시지도 못하고, 마음 상하게 해드린 것 용서해주세요. 다 푸시고 편히 저세상 가세요.”
그 마지막 구절의 절절함에 둘러섰던 식구들이 감전이라도 한 듯 일제히 훌쩍이기 시작했다. 순간 엄마 얼굴에 실낱같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새언니 옆에 서 있던 오빠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연극 대사라도 읊듯 감정을 넣어 목멘 음성으로 고별인사를 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어머니가 이 지경이 되실 때까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불효했어요. 이제 우리들 걱정, 세상 시름 다 놓으시고 좋은 길 가세요.”
비장한 얼굴로 말을 마친 오빠는 마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를 숙이고 훌쩍이는 새언니를 일으켜 부축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엄마의 팔에 부착된 심장박동기의 스크린은 조금도 변함없이 일정한 모양으로 그래픽을 그리고 있었다.
임종자리
그동안 콧구멍에 튜브를 넣어 위 속으로 음식물을 투여하던 것을 가족들 동의를 받아 제거한 게 사흘 전이다.
딴 정신은 없어도 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둔화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워 있는 병원이 한국에서 한동안 계시던 요양원이라고도 하고, 오래전 우리들과 살던 수원이라고도 하면서도 목구멍의 고통을 절절하게 호소하셨다.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회진 온 의사에게 물었다.
“이 튜브를 빼면 어떻게 됩니까.”
며칠간 입으로 아무 음식도 넘기시지를 않아 끼운 튜브라 그걸 빼버리면 굶어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까. 내 질문에 의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억지로라도 잡숴야지요.”
“엄마, 죽 잡수셔야 된다는 선생님 말씀 들었지? 잡숫겠다고 약속하면 빼드릴 거야.”
엄마는 조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튜브를 빼게 되었다.
엄마는 이제는 살았다는 듯이 편안해 하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집에서 쑤어 온 죽을 입에 넣어드리면 기를 쓰고 삼키는 듯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는 떠 넣어드린 죽을 입속에 한참을 물고 있다가 뺨을 꾹꾹 누르면 깜짝 놀란 듯 삼키곤 하셨다.
그런데 주말인 어제부터는 아무리 뺨을 꾹꾹 눌러도 삼키지를 않으니 온종일 목으로 넘긴 음식이 서너 숟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세상 사는 것이 귀찮아지신 듯 온종일 눈을 감고 뜨려고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면 오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가게를 비울 수가 없다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3주가 되도록 한 번밖에 다녀가지 않은 오빠와 동생에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전화를 했었다. 임종자리만큼은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얼굴들을 하고 나타나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온 후 남편인 남동생의 뒤에 숨듯이 붙어 있던 작은올케는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한 한 뼘 높이는 됨직한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이 힘들었던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병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람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20대 때처럼 가는 허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꽉 졸라맨 허리께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그 자세가 내 눈에 경이롭게 들어왔다. 남이라면 부러웠을 그 가느다란 허리가 새삼스럽게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은 작은올케에 대한 내 감정이 애초에 끔찍할 만큼 고약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엄마 곁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그래도 손위 시누이인데 눈길 한 번 주고 고개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치레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이후 내내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남동생은 그 옆 벽에 기대서서 어둠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올케의 눈치가 보이는지 초조한 기색이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