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죽어서야 영원한 사랑을 한 ‘작은 참새’ 에디트 피아프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6-20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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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트 피아프는 ‘작은 참새’였다. 142㎝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그를 불멸의 샹송 가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슬픈 참새’였다. 사랑도 노래도, 항상 지절대야 살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날에 그는 죽었고, 죽어서야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죽어서야 영원한 사랑을 한 ‘작은 참새’ 에디트 피아프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

    “하늘이 무너져버리고 땅이 꺼져버린다 해도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두려울 것 없으리.

    당신이 원한다면 이 세상 끝까지 따라가겠어요.”

    고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 결혼식에서 급우들과 이 ‘사랑의 찬가’를 축가로 불렀다. 딱히 아는 축가도 없었다. 이 노래는 교과서에서 배웠기에 익숙한 곡이었다. ‘사랑의 찬가’라는 제목은 결혼식 축가로 안성맞춤이었다. 공식적으로 토요일 자율학습에서 해방된 사춘기 소녀들의 가슴은 두근두근 설레었고, 신부의 순백색 웨딩드레스와 꽃으로 장식된 결혼식장 분위기에 도취해 축가 가사는 구구절절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사랑의 찬가’는 두 남녀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기원하는 대표적인 ‘사랑 노래’로 결혼식장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들은 이 노래의 원곡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가슴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깊은 슬픔을 간직한 여가수의 목소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알게 되었다. ‘사랑의 찬가’는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레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절규하듯 부른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1915~1968)’의 노래라는 것을….

    에디트 피아프의 강렬하고 비극적인 노래 한 곡은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본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드라마틱하고 치열했던 그의 48년간의 짧은 삶과도 닮았다.



    노래는 가사의 전달이 아니라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가수에게는 행복이 무언지 아는 것보다 절망과 고통, 아픔의 존재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피아프는 모든 감정을 초월해 절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도록 맞추어진 굴곡진 인생을 타고났다.

    길거리에서 태어난 에디트

    에디트의 본명은 ‘에디트 죠반 가숑’이다. 에디트는 만삭의 어머니가 병원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파리의 빈민가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어났다. 에디트의 부모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부상병을 간호해주고 탈주시켰다는 죄로 에디트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독일군에게 총살된 영국 간호사 ‘에디트 카벨’의 이름에서 첫째 딸 이름을 따왔다. 곡예사였던 아버지 루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당하면서 어린 에디트의 어둡고 외로운 인생은 시작된다. 엄마 아네트는 삼류 가수로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쌓기를 원해 어린 딸을 부양할 수 없었다. 에디트는 알코올중독자인 외할머니한테 맡겨졌다. 그 후 친할머니에게 맡겨지면서 에디트는 창녀촌에서 유아 시절을 보낸다. 각막염으로 3년간 시력을 잃었고 급격한 영양실조로 앙상한 뼈만 남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키는 142㎝에서 성장을 멈추었다. 학교 근처는 가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재회한 뒤 아버지가 속한 유랑극단과 전국을 떠돌았지만 성장 환경은 나아진 게 없었다.

    결국 에디트는 15세에 독립했다.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꾸렸고, 17세 때 배달원이었던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마르셀’을 낳았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출산한 유일한 생명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에디트는 엄마로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제대로 양육할 수 없었다. 딸 마르셀은 두 살 때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에디트 특유의 애절함과 절규하는 호소력, 그리고 들끓는 분노를 불화산처럼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아마 이때 만들어졌으리라. 에디트의 거리가수 시절은 단짝친구인 모몬(시몬 베르토)이 출간한 저서를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다. 모몬은 경찰 눈을 피해 자리 잡은 거리에서 에디트의 노래가 끝나면 바로 돈을 걷기 위해 항상 베레모를 쓰고 다녔다. 물도 나오지 않는 여인숙 3층 방에 살던 두 사람의 재산은 서랍장이 전부였다. 삶은 힘들었지만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하는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하늘이 뚫린 거리에서 마이크 같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하고, 그들이 내 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했다. 에디트는 길거리 공연에 맞는 가창을 익혔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좋은 목소리를 멀리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입 안의 공명 공간을 최대한 사용해 밖으로 내뿜는, 거리의 가수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발성법을 사용했다. 에디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모음에서는 온몸을 울리는 듯 최대의 공간을 열어서 사용하지만 자음은 억세면서 카랑카랑하게 발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특유의 발성법은 그의 허스키하고 강한 음색과 결합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이한 음성을 만들어냈다. 거리의 가수로 생활하며 부단히 훈련한 결과였다.

    무대로 날아간 작은 참새

    안전한 구걸 생활을 위해 에디트는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일정 금액을 상납하기도 했다. 이는 후일에 가수로 명성을 얻은 에디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부촌(富村)의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에디트에게 당시 카바레 ‘제니스’의 지배인 루이 르프레가 다가온다. 목소리에 매료된 이 지배인은 에디트에게 실내에서 노래 부를 것을 제안했고, 가녀린 체구에 맞는 ‘피아프(작은 참새라는 뜻의 프랑스어)’라는 예명도 지어줬다. 이때부터 전설 ‘에디트 피아프’가 탄생하게 된다.

    가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그의 노래는 이내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출연하는 무대는 항상 만석이었고, 카바레 ‘제니스’는 일약 명소로 탈바꿈했다. 상처받은 작은 영혼이었던 21세의 ‘작은 참새’는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 어울리던 불량배들은 에디트가 벌어오는 금액의 상납금을 요구하다가 카바레 지배인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렀고, 에디트도 공범으로 몰려 안락한 무대가수 생활을 1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이후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살인자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술에 찌든 삶을 살았다.

    변두리 무대를 전전하던 그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작가이자 작곡가, 가수인 레이몽 아소(Raymond Asso·1901~1968)를 만나면서 마침내 자신만의 레퍼토리를 완성했다. 레이몽에게서 교양 교육을 받으면서 에디트는 자신의 곡을 작곡, 작사하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가난, 방황, 거리의 여자 같은 그동안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 온화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된다. 레이몽은 그가 ‘무대의 가수’가 되도록 무대 매너와 손동작을 교정해줬고, 거리에서 익숙해진 잘못된 발음과 ‘지르기 발성’을 입 안으로 품는 기술까지 가르쳤다. 에디트가 배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격하고도 애잔한 힘으로 분노와 행복,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전달하는 감동을 선사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심수봉이 부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가사처럼, 에디트의 노래에는 선원이 많이 등장한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선원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에디트의 내면적인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에디트의 인생에 등장하는 많은 남자는 매번 첫사랑처럼 순수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몽마르트 언덕에 위치한 파리의 명물 ‘물랭루즈’에서 만난 여섯 살 연하의 이탈리아계 미남가수 이브 몽탕(Yves Montand·1921~1991)과의 사랑도 그러했다. 이때 에디트가 부른 노래가 그 유명한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이다. 이미 정상에 서 있던 에디트는 자신의 무대 1부를 이브 몽탕이 홍보할 수 있게 했고, 남자친구의 곡을 선별해주면서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이들의 관계는 이브 몽탕이 유명세를 타면서 서서히 식어가게 된다.

    이즈음 에디트의 명성은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그동안 프랑스 샹송이 상륙하지 못했던 미국에서 에디트의 생소한 음악과 창법은 신선하게 다가갔다. 프랑스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에디트의 눈물겹게 아련하면서도 정열적인 음악은 미국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에디트는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자 프랑스의 복싱영웅인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 1916~1949)과 운명적으로 미국에서 마주치게 된다.

    마르셀 세르당과 ‘사랑의 찬가’

    이미 세 아들을 둔 가장으로 챔피언 타이틀 경기 때문에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마르셀과의 만남은 축복받을 수 없는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은 짧았다.

    미국의 제이크 라모타에게 패해 타이틀을 내준 마르셀이 라모타와의 리턴 매치를 앞두고 에디트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것이다. 1949년 10월 27일 그가 탄 비행기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추락했다. 그의 나이 34세. 109승(64KO) 4패라는 대기록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에디트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라도 일찍 보고 싶은 에디트가 여객선 대신 비행기를 탈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에디트는 드디어 찾아온 사랑을 보내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죄책감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비극적 감정이 온몸으로 전율하며 태어난 노래가 바로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였다. 마르셀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애절하고 구슬프게 부르짖었던 이 노래를 통해 에디트는 어둠의 세계에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둘의 사랑은 짧았지만, 두 사람이 나눈 편지는 책(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으로 출판돼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면 둘의 사랑은 결코 짧지만은 않은 듯하다.

    혹자는 파리를 대표하고 동시대에 활동한 에디트 피아프와 코코 샤넬을 비교한다. 그러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각자 분야에서 최고가 된 것을 제외하고는, 둘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남성관부터가 다르다. 일 중독자였던 코코 샤넬은 권력과 부를 가진 남성과의 사랑을 통해 사업을 확장시켰지만,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이 존재하기에 노래를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에디트 피아프’라는 상품의 사업 확장이나 전략적인 제휴 개발은 중요치 않았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한 사람에게 조준하고 그 틀에서만 움직였다.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 에디트는 다른 순회공연을 하던 프랑스 샹송가수 자크 필스(1914~1970)를 만나 또 다른 사랑에 빠지며 뉴욕에서 첫 번째 결혼을 한다. 타의추종을 불허한 샹송의 여왕 에디트의 영향 덕에 자크는 미국 내 인지도를 높였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두 사람은 음악 안에서 감미로운 사랑을 확인하지만, 역시나 다정한 사랑의 속삭임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사실, 에디트는 평상시에도 다소 경박할 정도로 언행이 직설적이었고 감정기복이 심했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약물 과다복용으로 주변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피폐한 몸으로 재활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크는 에디트의 병적인 히스테리를 참지 못하고 결혼 4년 만인 1956년에 결혼생활을 끝냈다. 혼자 남게 된 에디트는 술과 약물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이때 그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진다. 자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처럼 알코올중독에 모르핀 상습복용까지 겹쳐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고, 점차 머리도 빠지게 되면서 완전히 웃음을 잃게 된다.

    나란히 묻힌 ‘21세 연하남’ 테오파니스

    생전 에디트는 “노래를 못하면 살아갈 수 없고, 죽음보다 외로움이 더 무섭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관객 앞에서 노래를 못하게 되는 순간이 자신이 죽는 순간이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외로운 성장환경 탓에 사랑을 갈구했던 에디트는 무대 위에서 노래로 연기하며 사랑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치유받았지만, 공연 중 쓰러지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없게 된다.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1961년 어느 날, 마지막 사랑이 찾아왔다. 25세의 잘생긴 이발사였던 테오파니스 람부카스(1936~1970)는 노래를 하고 싶었고, 에디트는 그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테오파니스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그리스어로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인 ‘사라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테오는 아프고 지친 에디트를 진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에디트와 21세 연하남의 만남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아들뻘’ 남자를 유혹한 늙은 여우라며 손가락질하거나 에디트의 명성을 이용한 결혼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결국 에디트는 1년간의 마지막 결혼생활을 끝내고 생을 마감했다. 테오 역시 에디트가 떠난 지 7년째 되던 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에디트가 묻힌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서 에디트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마지막 남편 테오. 어쩌면 에디트는 죽어서나마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영원한 사랑을 실현한 게 아닐까.

    에디트 피아프의 48년간 생애는 이미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는데, 특히 2007년 영화 ‘장밋빛 인생’은 많은 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연극 ‘에디트’, 창작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 발레 뮤지컬 ‘사랑의 찬가’에 이르기까지 ‘작은 참새’ 에디트의 인생에 깃든 노래와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무대에 오른다. 에디트의 일생과 그가 절규했던 노랫말은 사람들의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감정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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