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려명黎明

2장 천사의 초대

  • 입력2014-03-19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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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술 한잔 할 테니까 준비해.”

    그날 오후, 근로자들이 버스로 퇴근했을 때 김양규가 말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전입 축하파티를 하겠다는 말이다. 공장건물 옆 숙소에서 하는 줄 알고 사무실에서 꾸물거리던 윤기철은 잘 차려입은 과장들이 들어서자 어리둥절했다. 윤기철의 표정을 본 기계과장 백종호가 빙긋 웃었다.

    “개성식당으로 가는 거야.”

    “밖으로 나간단 말입니까?”



    “그래, 공단 안에 식당이 있어. 술도 마시고 쇼도 본다구.”

    “이야.”

    감동한 윤기철의 표정을 본 과장들이 웃었다. 개성식당은 공단 구역 내에 있는데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후 7시 반이 겨우 넘었을 뿐인데도 홀은 반 이상이 차 있었고 안쪽 무대에서는 3인조 밴드가 경음악을 연주하는 중이었다.

    “아, 지배인 동지. 이 사람이 이번에 우리 회사에 새로 온 윤기철 과장이오.”

    구석 쪽 빈자리로 가면서 김양규가 다가온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 말했다. 50대쯤으로 굵은 눈썹, 곧은 콧날에 단정한 용모의 사내다. 지배인이 윤기철에게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최 과장 후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지배인이 내민 명함에 안성주라고 적혀 있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쪽 인원은 다섯 명. 김양규는 익숙하게 북한산 술과 안주를 시겼는데 주문을 받아 적는 아가씨는 한복 차림의 미인이다.

    “이봐, 윤 과장. 잘 있겠지만 여기서 여자 건들지 마.”

    아가씨가 돌아갔을 때 옆에 앉은 백종호가 낮게 말했다.

    “옛날에는 여자한테 집적거렸다가 많이 혼났어.”

    “어떻게 말요?”

    “쫓겨났다고 했어.”

    “증거 있습니까?”

    “소문이지만 분위기를 보라고.”

    백종호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과연 모두 얌전하게 테이블에 붙어 앉아 먹고 마시는 중이다. 어느새 스테이지에 여자 가수 한 명이 서 있다. 그때 앞쪽에 앉은 김양규가 말했다.

    “이봐, 윤 과장, 여기도 한국과 같다구. 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말야.”

    옆쪽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손님 대부분이 공단에 입주한 한국인 숙소 생활자들이다. 분홍빛 치마를 구름처럼 부풀리며 아가씨 셋이 테이블로 다가와 술과 안주를 내려놓았다. 그때 스테이지에 서 있던 여가수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오늘 개성공단에 부임해 오신 주식회사 ‘용성’의 윤기철 과장님을 축하합니다. 제가 축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와아.”

    테이블에 둘러앉은 동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고 주위에서도 박수를 쳤다.

    “자, 축하주를 받으세요.”

    가수가 말하자 옆에서 기다리던 아가씨가 잔에 술을 따른다. 술병 안에 인삼이든 인삼주다.

    “개성공단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자, 잔을 드세요.”

    가수의 지시에 따라 대부분의 손님이 잔을 들었다.

    “건배!”

    가수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고 사내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이렇게 윤기철이 개성공단에서의 첫날밤을 보낸다.

    다음 날 오전 10시 반, 윤기철이 사무실에서 정순미와 서류를 체크하고 있다. 업무과는 인력관리와 생산품의 입출, 경비 지급과 공장의 효율적 운영까지를 맡는 핵심 부서다. 공장 전반을 다 체크할 수 있는 부서인 것이다. 그래서 잘 짜인 조직이 아니면 월권 문제가 발생하지만 용성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생산과에서 내일부터 4시간 연장근무를 시작하는군요.”

    윤기철이 말하자 정순미가 서류 한쪽을 손끝으로 짚었다. 검지 손톱이 분홍빛이다. 갸름한 손톱이 손가락을 닳았다. 나란히 앉았기 때문에 정순미가 곧 손가락을 치웠지만 미세한 동작에서도 향기가 맡아졌다. 이건 체취가 절반 이상 섞인 독특한 냄새다.

    “인원이 150명 정도가 모자라기 때문에 4반, 5반은 연장 작업 못 합니다.”

    정순미가 서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4시간 이상 연장근무를 하면 능률이 오르지 않거든요. 납기는 20일 후로 다가왔는데 생산량을 맞추기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더 비싼 임가공비와 항공료까지 부담하고 칭다오 공장에서 생산해야 한다. 그것은 법인장이 결정할 사항이다. 윤기철이 머리를 돌려 정순미를 보았다.

    “우리가 생산인력 증원을 요청한 지 5년이 넘었는데 증원이 안 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때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바로 20㎝쯤 앞에 떠 있다.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오목렌즈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그때 정순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순미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개성 근처의 노동력이 부족해요?”

    불쑥 그렇게 물은 것은 정순미가 어떻게 나오나 보겠다는 의도가 컸다. 개성 근처는 물론이고 황해도 지역에서도 인력난이 심하다.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무나 끌어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대답했다.

    “그것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사무실 안에는 생산과장이 보조사원하고 둘이서 샘플을 정리하고 있을 뿐 주위에 사람은 없다. 이윽고 시선을 뗀 윤기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기본적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회사나 근로자도 득일 텐데.”

    “윤 과장님.”

    오후 1시 반, 숙소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윤기철이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몸을 돌린 윤기철은 낯익은 작업반장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반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대표 동지가 제1상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아, 예.”

    제1상담실은 외빈용이다. 상담실로 들어선 윤기철은 안쪽에 앉은 조경필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경필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밝은 웃음이다.

    “윤 과장님, 커피 한잔 하십시다.”

    “아, 좋습니다.”

    따라 웃은 윤기철이 앞쪽에 앉았다. 조경필은 이미 인스턴트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쥐고 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미가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그 순간 윤기철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정순미가 윤기철 앞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놓더니 테이블을 돌아가 조경필의 옆에 앉았다. 그때까지 조경필은 웃음 띤 얼굴로 기다린다. 여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윤기철도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폈다. 턱도 들려져서 시선이 비스듬히 내려졌다. 입술에도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오르고 있다. 그때 조경필이 말했다.

    “처음이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정순미 동무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조경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런 질문은 저한테 해주시지요. 성의껏 대답해드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윤기철은 어느덧 자신의 어깨가 내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고수(高手)다. 조경필은 강약 조절에 능란한 것이다. 상대를 파악하고 기를 꺾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만일 이번에 조경필이 강하게 나왔다면 윤기철은 커피잔을 던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싸움은 해본 놈이 잘한다. 양아치를 이기려면 양아치보다 더 악착같이 구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조경필은 선수를 쳤다. 심호흡을 한 윤기철의 시선이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처음이니까 말씀드리는데 그런 것까지 보고할지는 몰랐습니다.”

    그 순간 정순미의 눈 밑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눈은 윤기철을 응시한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다. 그때 조경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앗하하, 그래요. 처음이니까 다 연습한 것으로 넘어갑시다. 자 됐습니다.”

    여전히 주도권은 조경필이 잡고 있다.

    “북측에서는 보조사원한테 한 말도 순식간에 총국으로 전달되는 상황입니다. 우리만 입을 닥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장원석이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모르죠. 7시 반에 정순미가 대한물산 창고 앞에 차를 받쳐놓고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정, 정순미가?”

    장원석이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럼….”

    “설마 정순미가 기쁨조가 되겠습니까? 그런다면야 콘돔 끼지 않고 덤빌 겁니다.”

    “이봐, 농담할 정신이 있어?”

    잠자코 있던 백종호가 거들었을 때 윤기철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시발, 부딪쳐봐야지요.”

    “도대체 왜?”

    마침내 장원석이 물었다. 놀랐기 때문에 이 질문은 늦은 감이 있다.

    “왜 자넬 데리고 가는 거야?”

    “제가 공산당이기 때문이죠.”

    “정말이냐?”

    그렇게 묻긴 했지만 장원석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네가 공산당이면 나는 나치다’는 표정이다.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사무실에서 TV 보다가 경찰들을 다 없애야 한다고 했거든요.”

    “정말이야?”

    이번에는 백종호가 묻자 윤기철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근데 뒷말을 뺐거든요. 경찰이 없어지면 목소리 큰놈 세상이 온다는 말을 말입니다.”

    “일부러 그랬지?”

    “그런 셈이죠. 어디 얼마나 빨리 보고가 되나 보자고.”

    “이 친구, 참.”

    입맛이 떨어진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은 백종호가 의자에 등을 붙였다.

    “그래, 갔다와서 이야기나 듣자.”

    “흠, 정순미라.”

    장원석도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시발, 나도 한국 욕이나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와이프가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는 윤기철만 알고 있다. 장원석이 입 다물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도 비밀이 있다.

    대한물산 창고 앞 길가에는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서 있었는데 뒤쪽 머플러에서 흰 가스가 피어올랐다. 시동을 걸어놓고 있다는 증거다. 인도는 텅 비어 있었으므로 윤기철이 10m 거리로 다가갔을 때 운전석 옆쪽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것은 정순미다. 언제 사복으로 갈아입었는지 흰색 셔츠에 검은색 치마를 입었는데 긴팔이지만 추워 보였다. 다가간 윤기철에게 뒷문을 열어주면서 정순미가 말했다.

    “어서오세요.”

    시선을 내렸고 문을 잡고 선 자세는 단정했다.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뒷좌석에 올랐다. 뭔가 한마디 뱉고 싶은 충동을 참은 것이다. 곧 문이 닫혔고 정순미가 앞좌석에 오르자 벤츠는 출발했다. 운전사는 어깨 윗부분만 보였는데 40대쯤의 건장한 체격이다. 잘 먹어서 목이 두툼했다. 차 안에서는 옅은 엔진음만 울린다. 시트에 등을 붙인 윤기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긴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정순미도 의식하지 않는다. 차가 섬유단지를 지나더니 전자단지 쪽으로 진행한다. 그때 머리를 돌린 정순미가 윤기철에게 말했다.

    “저도 오늘 같이 참석합니다. 과장님, 잘 부탁합니다.”

    윤기철이 똑바로 정순미를 보았다. 이제 머릿속에 녹음기가 넣어진 인상은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이것은 윤기철이 저 스스로한테 하는 말이다. 그렇다. 이제는 천사의 초대가 되었다.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윤기철이 휴게실로 나왔다. 휴게실의 TV 앞에 앉아 있던 생산과장 고형민이 윤기철을 보더니 손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윤기철이 옆자리에 앉자 고형민은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였다.

    “오늘 낮에 조경필이한테 경고 받았지?”

    윤기철의 귀에 입을 붙인 고형민이 물었다. 그때 윤기철이 리모컨을 집어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고 과장님, 왜 이럽니까?”

    “뭐가?”

    “왜 음량을 높여요?”

    그러자 고형민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고형민은 37세, 생산직에서만 15년을 근무한 기술자다. 오버로크 기계음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인지를 맞히는 전문가, 재단에서 다림질까지를 두르르 꿰고 있어서 공장은 고형민이 돌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졸로 소아마비 때문에 군 미필, 지금 보니 소심한 성격 같다. 윤기철이 TV를 향한 채 말했다.

    “경고는 무슨, 앞으로의 계획을 상담했지요. 내 결혼 문제라든가….”

    “공갈치지 마.”

    “정말입니다.”

    “공장에 소문이 다 났어. 자네가 이틀째 되는 날 경고 받았다고.”

    “무슨 일로 경고를 받았다고 해요?”

    “정순미한테 쓸데없는 것을 물었다면서?”

    “구체적으로 뭘요?”

    “쓸데없는 것이라고만 들었는데….”

    “멘스가 언제냐고 물었어요.”

    “정말?”

    “네가 겪은 놈 중에서 자지 사이즈가 제일 큰 놈이 몇 센티짜리냐고도 물었죠.”

    “지이랄.”

    리모컨을 집은 고형민이 음을 키웠으므로 윤기철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술 생각이 났다. 아래층 식당 냉장고에 가면 저녁에 먹다 남긴 김치찌개가 있을 테니 그걸 안주로 먹으면 될 것이다.

    정순미는 24세, 개성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고만 입력되어 있다. 가족관계 등 자세한 자료는 특구개발 지도총국에 비치되어 있을 것이다. 인력 관리는 북측 소관이기 때문에 윤기철이 정순미에 대해서 알고 온 것은 그것뿐이다. 사진도 못 보았다. 북한은 여자도 모두 의무징병제여서 다 군대에 간 것으로 알고 있던 윤기철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정순미는 물론 사무실 보조사원 다섯도 군대에 간 것 같지 않다.

    “아, 채널 좀 돌립시다.”

    윤기철이 개성맨이 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TV를 보던 사람들한테 윤기철이 소리치듯 말했다. 놀란 여직원들이 일제히 윤기철을 보았지만 과장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기계과장 백종호, 자재과장 장원석 둘이 있었고 여직원은 셋, 그중 정순미가 포함되었다. TV는 벽 위쪽에 걸려있어서 리모컨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에이, 저 새끼들을 싹 없애버려야지.”

    리모컨을 못 찾은 윤기철이 투덜거리다가 털석 자리에 앉았다. TV를 보고 한 말이다. 그 순간 윤기철은 여직원들의 몸이 굳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누구를요?”

    하고 물은 것은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다. 사무실에서 제일 어린 22세, 개성초급대 졸, 동그란 얼굴에 키는 작지만 귀여운 용모다. 윤기철이 머리를 들고 김현주를 보았다. 지금 TV에는 미군부대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시위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다.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는 30명 정도인데 경찰은 수백 명이다. 김현주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빙그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 누구야? 경찰이지.”

    “네? 경찰을 다 없애요?”

    놀란 김현주가 비명처럼 물었을 때 과장들이 머리를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둘 다 쓴웃음을 지은 표정이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아, 그럼, 경찰만 없으면….”

    그러고는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머릿속에만 남겨둔 뒷말은 이렇다.

    “목소리 큰놈이 이기니까 말야.”

    연장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이 11시로 늦춰지면서 간식이 공급되고 있다. 초코파이다. 윤기철은 한국에 있을 때도 초코파이를 즐기지 않았던 터라 사무실에 산처럼 쌓인 초코파이 박스가 지겹다. 초코파이 배급할 때는 사무실 여직원이 다 동원된다. 박스로 가져가 각 조(組)에 나눠주는데 가만 보니까 배급된 분량을 한 사람이 몰아서 갖는 경우가 많다. ‘초코파이 계’다. 12개들이, 또는 6개들이 박스를 가져가 장마당에다 팔기도 한다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용성’에서는 간식으로 초코파이를 1인당 3개씩 주었는데 4명이 계를 들면 4일에 한 번 6개들이 박스 2개를 가져간다. 유리창 밖의 재봉사 하나가 마침 6개들이 박스 2개를 가방에 넣고 있었다.

    “어이, 윤 과장, 애인한테 전할 물건 없어? 기념으로 AT-33형 몇 박스라도 전해주지 그래?”

    사무실로 들어선 자재과장 장원석이 물었을 때는 오후 10시 40분이 되어 있었다. 연장 근무자도 슬슬 퇴근 준비를 시작했고 앞마당은 버스들의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참 내일 돌아갑니까?”

    윤기철이 물었다. 돌아간다는 말은 서울로 간다는 뜻이다. 개성에서 서울, 즉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3일 전에 통일부에 신청해서 허가가 나와야 한다.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걸리는 터라 요령이 생겨서 돌아가기도 전에 들어오는 신청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청이 지겨워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습성들이 붙었고 장원석은 한 달 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 AT-33 전해줘?”

    장원석이 다시 물었다. AT-33은 이번에 용성 개성공장에서 생산되는 여성용 고급 팬티다. 실크가 섞인 신제품으로 전량 수출품이다. 윤기철이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됐습니다.”

    장원석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애인한테 차였습니다. 장 선배.”

    “어? 왜?”

    “개성으로 발령 났다고 했더니 헤어지자고 하더만요. 그년이.”

    그때는 사무실이 조용했는데 여직원들은 제각기 딴전을 피우고 있었지만 귀는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말문이 막힌 장원석이 입맛만 다셨고 윤기철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시발년은 내가 좌천당한 것으로 알고 있더라고요.”

    말을 마친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1년 반을 사귀고 헤어졌지만 조하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헤어진 것이 전혀 서운하지 않은데도 이렇게 이용해먹었다. 윤기철은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정순미가 손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다 들었을 것이다. 너 들으라고 한 말이니까.

    숙소 휴게실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정상은 아니다. 환경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오히려 마음 놓고 떠드는 자가 이상하다. 개성공단에선 남북이 공존하며 합심해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경계선만 나가면 남북은 60여 년간 주적(主敵) 관계였고 지금도 그렇다. 밤 12시 반, 야간근무를 마친 관리자 셋이 숙소 식당에 모여 앉아 소주를 마신다.

    “요즘 대표하고 윤 과장이 사이가 좋은 것 같던데.”

    기계과장 백종호가 소주잔을 들고 윤기철을 보았다. 둥근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호인, 기계 전문가여서 사람하고 상대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인지 순수하다. 대표 조경필도 한 수 접어주는 상대, 회의 때도 거의 말이 없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면 말이 좀 많아진다. 백종호가 말을 이었다.

    “입주 이튿날 경고 한 방 맞고 말야. 이제 열흘쯤 되었나?”

    “글쎄, 경고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입맛을 다신 윤기철의 시선이 옆에 앉은 시설과장 오석준에게로 돌아갔다.

    “내 소문이 어떻게 났습니까?”

    “이 친구가 여론에 민감하네.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오석준이 안주로 김치를 집어 씹었다. 오석준은 33세, 시설 담당이라 외부에 자주 나간다. 공장 증축, 개조, 건축자재 통관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총국에 안면이 꽤 있어서 조경필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대다. 하지만 오석준은 생산 전반에 대해서는 관계가 없는 위치다. 오석준이 지그시 윤기철을 보았다.

    “정순미하고 열흘째 말 안하고 있다면서?”

    “아니, 열이틀 되었습니다. 오 선배.”

    바로 대답한 윤기철이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물었다.

    “어떤 시발놈이 그런 말을 합니까?”

    “내 조수.”

    오석준의 조수는 여직원이 아니라 남자다. 30대 후반의 사내로 이름은 하민호, 만날 둘이 밖으로 함께 다니는 터라 별 이야기를 다 듣는 모양이다. 오석준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정순미가 대표한테 포장반이나 검사반으로 보내달라고 했다는군.”

    “그랬더니요?”

    “대표가 안 된다고 했다는 거야.”

    “그 시발년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윤기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직업에 대한 의무감, 샐러리맨의 도리 따위도 전혀 관심이 없는 종자로구먼.”

    “흐흐흐.”

    그때 백종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봐, 우물에서 숭늉 찾냐? 잘 지내, 내일 출근하면 말 붙이라고.”

    “내가 왜 말을 안 했단 말입니까? 업무 이야기는 다 합니다.”

    소파에 등을 붙인 윤기철이 숨을 길게 뱉었다. 그렇다. 의도적이었다. 업무 이야기만 던지고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천리만리 달아난 상황이다. 별것도 아닌 일을 쪼르르 달려가 보고한 행태가 우습기보다 기가 막혔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그럭저럭 지내는 건 싫다. 이 기회에 첫인상에서 가슴에 새겨진 흔적을 싹 치워버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조하나에 의해 비워진 구멍을 너무 성급하게 채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오석준이 말했다.

    “이봐, 걔는 최석동이 짝사랑이었다고. 물론 손도 못 댔지만 말야.”

    “말도 안 돼.”

    놀란 윤기철이 말했을 때 백종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런 대상이 있는 건 좋은 일이지. 이런 곳에서 말야. 난 최 과장이 부럽더라고. 그만큼 순수하다는 증거이기도 했지.”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까? 뜬금없이?”

    이제는 윤기철이 화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을 때 백종호가 말했다.

    “아, 글쎄 벽에 여자 사진 붙이고 보는 것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돼.”

    “가끔 움직여서 문제지. 냄새도 풍기고.”

    술잔을 쥔 오석준이 윤기철을 향해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사람아,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강한지 아나? 윤 과장 자네도 석 달만, 아니 두 달만 더 지내봐. 전에는 포르노를 봐도 서지도 않던 놈이 수영복 사진만 봐도 선다네. 여긴 그런 세상이야.”

    려명黎明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작업반을 지나던 윤기철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바로 옆의 재봉사 하나가 끊어진 봉제사를 잇고 있었는데 이미 다 써서 봉에 감긴 실이 10여 가닥밖에 되지 않는다. 서너 번 재봉틀을 밟으면 다 떨어질 것인데 마지막까지 쓰려고 잇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수백 번 공장 현장을 다녔어도 이런 장면은 처음 본다. 윤기철은 다시 발을 떼었다. 오전 10시 반이다. 윤기철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김양규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오늘 오후 6시에 출하해야 해. 가능하겠어? 안되겠지?”

    “1차분이 650박스, 2차분이 450박스니까 오늘 오후에 450박스를 싣도록 하겠습니다.”

    김양규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2차분 배는 1주일 후에 떠나지만 배가 싱가포르에 들르지 않고 곧장 제다로 갑니다. 그래서 도착시간이 하루 차이밖에 안 납니다.”

    “옳지.”

    순간 김양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제다 하역장에서 1, 2차분을 섞어 분배하면 되겠구나.”

    “바이어가 받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 생각을 못했어.”

    어깨를 늘어뜨린 김양규가 길게 숨을 뱉는다. 그러나 얼굴엔 웃음이 번져 있다. 오늘 오후에 출하될 수량은 580여 박스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물량은 1주일 후의 2차분 배에 전량 다 출하할 수 있다. 윤기철이 1, 2차분을 싣고 갈 배의 기착지와 목적지의 도착 시간을 체크했기 때문에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겠다. 그들은 1주일 늦게 출하되면 1주일 후에 도착할 것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라앉았던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윤 과장님이 1등 공로자요.”

    사무실에 와 있던 조경필도 웃음 띤 얼굴로 칭찬했다.

    “아니, 1등 공로자는 정순미 씨입니다.”

    윤기철의 말에 사무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컴퓨터를 두드리던 정순미도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내가 정순미 씨한테 다른 배 없느냐고 물었더니 1, 2차분 배의 도착시간을 묻더군요. 선박 스케줄에 선적시킬 배의 도착시간이 비어 있었습니다.”

    윤기철의 시선이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그래서 선박회사에 체크를 했던 겁니다. 정순미 씨가 힌트를 준 것이죠.”

    “아니에요. 저는.”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정순미가 머리까지 흔들었다.

    “저는 그저….”

    “자, 박수.”

    갑자기 김양규가 박수를 치며 말했으므로 사무실은 박수소리로 덮였다. 윤기철은 박수를 두 번만 치고 다시 사무실을 나왔다.

    6시에 인천으로 출발할 1차분 450박스도 포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7시 반이 되어서야 컨테이너를 실은 차량이 공장을 떠났다. 컨테이너 차량이 떠나는 것을 보고 숙소로 들어선 윤기철에게 기계과장 백종호가 물었다.

    “어디 있었어?”

    “컨테이너 기사하고 이야기 좀 했어요.”

    “그랬군.”

    숙소는 2층 건물로 아래층이 주방과 식당, 휴게실이다. 주방 아줌마가 저녁 준비를 하다가 둘을 보더니 물었다.

    “먼저 차려드릴까?”

    “아뇨. 좀 있다 법인장 오면 같이 먹지요.”

    먼저 대답한 백종호가 옆쪽 휴게실로 윤기철을 끌고 들어갔다. 주방 아줌마도 용성 개성법인 사원이다. 아줌마는 한 달 간격으로 둘이 임무교대를 하는데 이 아줌마의 반찬은 대체적으로 짜다. 휴게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을때 백종호가 웃음 띤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윤 과장 덕분에 정순미가 초코파이 10박스를 공로상으로 받았어.”

    “10박스나.”

    놀란 윤기철이 눈을 치켜떴다.

    “계를 해서 20일은 참아야 타는 물량인데, 그것도 특근 간식으로.”

    “제가 시켜줘놓고 무슨 말이야?”

    윤기철을 흘겨본 백종호가 말을 이었다.

    “조경필이가 윤 과장하고 정순미를 붙여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윤 과장이 어떤 놈인데요? 씨말이라도 되는 놈입니까?”

    “정순미가 배 도착시간을 묻기나 했어?”

    “정순미가 씨받이란 말입니까?”

    “작업 건 거야?”

    그때 윤기철이 어깨를 부풀리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생각 없네요.”

    윤기철의 표정이 냉랭했으므로 백종호는 입맛만 다시고 말했다. 거짓말이다. 정순미는 배 도착시간을 묻기는커녕 선박 스케줄을 보지도 않았다. 다 윤기철이 지어낸 말이다. 사무실 분위기가 심각해져 있어 정순미는 거짓말이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시원하게 한 방 먹였다. 그런데 포상으로 초코파이를 10박스나 받다니, 가난한 집구석에 소가 들어갔구나.

    지도총국 국장이면 개성공단 지휘부의 서열 5위권 안에는 든다. 그 국장 오영환이 용성을 방문한 것은 오전 10시 반경이다. 중앙특구개발 지도총국은 용성에서 300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국장급이 남한 사업장을 가볍게 방문하지는 않는다. 미리 연락을 하는 것이 통례인데 오늘은 갑자기 들어왔다. 그렇다고 이것이 결례는 아니다. 수시로 ‘격려 차원’의 방문을 권장했기 때문이다. 오영환은 50대 중반으로 흰 얼굴에 말쑥한 정장 차림이어서 마치 남한 증권회사 간부 같았다.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조경필의 안내를 받아 공장을 둘러보면서 오영환이 옆을 따르는 김양규에게 물었다.

    “근로자가 몇 명이 더 필요합니까?”

    “예, 300명 정도.”

    김양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실제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김양규가 서둘러 덧붙였다.

    “솔직히 많을수록 좋습니다. 국장 동지.”

    300을 부르고 나서 너무 적게 불렀나 하고 후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인원을 더 증원해준다면 칭다오 공장을 이쪽으로 이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조가 있나? 붉은색 머리띠를 두르고 누가 덤빈단 말인가? 그때 오영환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 총화실에서 여기 남한 동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총화실이라고 문에 푯말이 붙어 있지만 회의실이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면면을 보면 남한 측에 김양규와 현장에 있던 과장 넷이 앉았고 북한 측은 오영환이 조경필만 참석시켰다. 남한 측 과장 중에는 윤기철도 끼어 있다. 한국에서도 외부와 상담을 하거나 출장을 갈 때 대개 한 등급씩 직급을 올리는데 윤기철은 개성에 들어온 직후부터 과장 행세를 했다. 법인장도 대놓고 과장으로 불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오영환에게 과장들을 인사시킬 때 업무과장 윤기철로 소개되었다. 오영환이 앞에 앉은 김양규부터 과장까지를 쓰윽 훑어보면서 물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오영환이 웃음 띤 얼굴로 김양규를 보았다.

    “근로자 증원 이야기는 들었으니 다른 것으로.”

    뜬금없었으므로 윤기철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테이블만 보았고 다른 과장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윤기철은 직장생활 5년이다. 군생활 2년도 거쳤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불쑥 나섰다가 이로울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첫째로 저놈 오영환이 갑자기 나타난 의도를 모르는 것이다. 100개가 넘는 남한 사업장 중에서 그저 발 닿는 대로 이곳에 들어왔을 리가 없다. 그때 오영환의 시선이 윤기철에게로 옮겨졌다.

    “업무과장이라고 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공단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윤기철이 눈을 크게 떴다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러자 오영환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더니 시선이 옆에 앉은 생산과장 고형민에게로 옮겨졌다. 고형민은 잔뜩 긴장해서 몸이 작아진 것 같다. 그 순간 윤기철은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덮이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에 섬광처럼 여러 장면이 스치고 지났기 때문이다. 장면 속에는 대화까지 포함되었다.

    “공산당, 조경필, 정순미, 그리고 미군기지이전 반대데모 장면, 경찰을 다 없애라고 했던 발언.”

    옆에서 고형민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목소리가 귓속에서만 맴돌아서 내용을 모르겠다. 그렇다. 나에 대한 보고가 다 들어갔다. 그래서 나를 한번 보려고, 또는 격려차 온 것 같다.

    오늘도 야근이어서 윤기철은 숙소로 들어와 저녁을 먹는다. 오후 7시40분, 식탁에는 김치찌개, 된장국, 겉절이 김치에 창란젓, 명란젓까지 놓여 있다. 김은 필수다. 식탁에 앉은 인원은 둘, 자재과장 장원석이 앞쪽에 있다. 장원석은 서울에 다녀온 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 결혼 3년 차인 장원석은 아이가 없고 부인이 간호사라고 했다.

    “소문이 났어.”

    씹던 것을 삼킨 장원석이 불쑥 말했으므로 윤기철은 머리만 들었다. 장원석이 표정 없는 얼굴로 윤기철을 보았다.

    “총국 국장이 윤 과장 보려고 왔다는 거야. 그 소문이 현장에서 내 귀까지 도착하는 데 5시간쯤 걸렸지.”

    “좆같이 늦네요.”

    다시 밥을 떠 넣은 윤기철에게 장원석이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자네를 격려차 왔다는데, 이해가 가나?”

    “이젠 내가 북으로 넘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내가 넘어가고 싶다.”

    갑자기 대화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윤기철의 어깨가 늘어졌다. 그래서 음식을 씹기만 했더니 장원석이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그 시발년이 바람을 피우고 있어.”

    “…”

    “시발년이 핸드폰에다 별걸 다 남겨 놨더라고, 그걸 또…,”

    장원석이 눈을 부릅뜨고 윤기철을 노려보았다. 섬뜩한 표정이다.

    “집안 아무 곳에나 놔두다니, 핸드폰을 말야.”

    “…”

    “내가 그걸 보지만 않았더라도….”

    “술 한잔 하실래요?”

    장원석의 말을 자른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듣기가 거북했기 때문이다. 아니,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그 핸드폰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살아갔을 것이라는 장원석의 입장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업무 이야기 외에는 입을 딱 닫았고 정순미가 지나가면 숨을 멈췄다. 그렇게 버릇이 되어서 태도도 자연스러워졌다. 장원석과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는 8시 40분이다. 사무실에는 정순미 혼자 앉아 자료를 챙기고 있었는데 윤기철이 그런 자세로 옆으로 지나갔을 때 머리를 들고 말했다.

    “과장님,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말해요.”

    뒤쪽 자리에 앉은 윤기철이 정순미의 머리통을 노려보았다. 정순미는 긴 생머리를 뒤로 묶어서 올렸다. 그래서 가운 위로 목이 드러났고 눈을 부릅뜨면 목의 솜털까지 보인다. 그때 정순미가 몸을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거리는 2m 정도, 사무실 안은 조용해서 윤기철은 입안의 침을 삼키지 못했다.

    “저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으며 정순미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좀 놀랐습니다. 하지만 과장님이 제 사기를 올려주시려고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하지.”

    정순미를 똑바로 보면서 윤기철은 자신이 처음 반말을 쓴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좋다. 지금부터 반말 존댓말 반반이다.

    “우리는 같은 조요, 팀이라고 하지. 팀원이 잘되어야 팀이 살고, 용성이 살고, 개성공단이 살고, 남북한, 아니, 북남한이 잘살게 되는 겁니다.”

    이런 스타일의 연설은 윤기철이 수백 번을 해봐서 익숙하다. 고교 때부터 애들 잡을 때 어깨를 부풀리면서 노가리를 깠던 것이다. 그때는 두서가 없고 산만했지만 지식과 경험이 쌓인 지금은 압도적이다. 윤기철이 말을 맺었다. 길면 안 된다. 이번은 정순미가 투항한 것으로 만족하자.

    “앞으로 손발을 잘 맞춥시다.”

    그러고는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때 눈앞에 선배 임승근의 얼굴이 떠올랐고 목소리도 울렸다.

    “그래, 어디 배까지 맞춰봐라.”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김양규가 말했다.

    “총국이 우리 회사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이야. 근로자 공급도 될 것 같아.”

    식탁에는 과장 셋이 모여 있었는데 셋은 야근 때문에 지금도 자는 중이다. 김양규의 시선이 윤기철에게로 옮겨졌다.

    “용성이 살아야 개성공단이 살고 그래야 남북한이 잘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숨을 들이쉰 윤기철을 향해 김양규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맞아, 그것이 애국하는 것이라고. 윤 과장은 아주 멋진 표현을 했어.”

    “누구한테 표현했단 말입니까?”

    옆에 앉은 시설과장 오석준이 묻자 김양규가 다시 웃었다.

    “누구긴 누구야? 정순미지.”

    오석준이 윤기철을 보았다. 눈이 가늘어져 있다.

    “그렇게 연설을 했어?”

    “뭐, 말하다보니까….”

    “그러니까 정순미하고 그딴 말 할 정도로 대화가 시작되었단 말이군.”

    어깨를 올렸다가 내린 윤기철이 입안으로 밥을 가득 퍼넣자 오석준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또 한 번 당한 셈이다. 제가 먼저 말을 걸어놓고 또 다 보고해버렸다. 미끼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멍청하게 그것을 덥석 물어버린 꼴이다. 도대체 이년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문득 윤기철의 머릿속에 녹음기가 떠올랐다. 요즘에는 매장에서 사라진 구형의 커다란 녹음기다. 그 녹음기가 정순미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버튼만 누르면 뱉고, 또 누르면 삼킨다.

    “윤 과장님, 커피 한잔 하실까요?”

    장원석과 함께 창고 안을 점검하던 윤기철에게 다가온 조경필이 말했다. 윤기철은 조경필을 따라 창고를 나왔다. 4월 초순, 이제 윤기철이 개성 생활을 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한 달이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난 것 같다. 날씨가 포근했으므로 둘은 창고 앞마당이 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사방 800평쯤 되는 마당은 배구 코트, 농구 코트가 마련되어 있지만 텅 비었다. 조경필이 나무 벤치에 등을 붙이고는 입을 열었다.

    “국장 동지가 저녁 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합니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조경필이 빙긋 웃었다.

    “물론 특혜 시비가 일어날 테니까 비밀 회동이 되어야만 합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죠?”

    “윤 과장님께 호감을 품고 계시거든요.”

    웃음 띤 얼굴로 조경필이 말을 이었다.

    “알고 계셨겠지만 지난번에 우리 용성을 방문하신 것도 윤 과장을 보려고 오신겁니다.”

    “…”

    “국장 동지의 신임을 받으면 용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닙니까? 그것이 곧 개성공단을 위해서도 좋고 말입니다.”

    윤기철은 심호흡을 했다. 이것들의 머릿속에서 기계를 빼낼 수는 없을 것인가?

    “과장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윤기철은 몸을 돌렸다. 점심시간, 대부분의 근로자는 현장을 비웠지만 넓은 공장 안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그룹들이 있다. 그중 한 그룹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네 명이 둘러앉은 사이에서 하나가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나머지 셋은 웃는 얼굴이다. 용성의 가운은 청색이다. 그리고 먼지막이용 흰 스카프형 모자를 썼다. 절을 한 여자가 허리를 폈을 때 윤기철이 알아보았다. 전에 봉제사를 아껴 잇던 여근로자다. 그 내용을 적어 ‘우수노동자’로 추천했더니 대표가 포상을 했다고 들었던 터다. 포상은 초코파이 6개들이 3박스다. 과장급 이상은 ‘우수노동자’를 추천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결정과 포상은 대표가 한다. 윤기철도 웃으며 답례했다.

    “아니, 뭘요. 당연한 일인데요, 뭐.”

    “과장님 인기가 제일 높아요.”

    뒤쪽 여자 하나가 말하자 나머지가 까르르 웃었다. 앞에 선 여근로자의 이름은 유민희, 가슴에 붙인 이름표에 적혀 있다. 기록표에 나온 자료는 33세, 기혼이라고 했으니 자식이 있을 것이다. 몸을 돌린 윤기철은 문득 자신의 인기가 높다는 말을 떠올렸다. 유민희를 우수노동자로 추천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갖가지 소문이 생산 현장에서 떠돌 것이고 정순미한테 뱉은 말도 그 속에 포함 되어 있다. 그 때문이다.

    “선박 스케줄 가져왔습니다.”

    컴퓨터에서 복사한 자료를 윤기철의 책상 위에 놓으면서 정순미가 말했다. 서류 끝을 쥔 갸름한 손가락을 보면서 윤기철은 문득 성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섹스를 안 한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었다. 오후 3시 반, 점심 후의 늘어지는 시간이어서 현장의 생산량도 감소한다. 사무실에는 자재과 보조사원 김현주까지 셋뿐이다. 머리를 든 윤기철에게 정순미가 말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윤기철은 시선만 주었다. 눈썹도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때 앞쪽 자리에 앉아 있던 김현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김현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정순미가 나가라고 한 것 같다. 그때 정순미가 말했다.

    “제가 오늘 저녁에 안내를 맡았습니다.”

    숨을 죽인 윤기철은 앞에 선 정순미의 입술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았다.

    “7시 반에 공장 옆쪽의 대한물산 창고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마침내 윤기철이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아예 반발로 다시 묻는다.

    “누가 누구를 기다려?”

    “제가 과장님을요.”

    “왜?”

    “지시를 받았습니다.”

    정순미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윤기철을 보았다. 이제는 반듯하게 선 자세다. 그러고 보니 가슴이 꽤 나왔다. 굳게 다문 입술, 반듯한 콧날, 순간 윤기철은 정순미의 입이 탄성으로 벌어지는 상상을 했다. 알몸의 두 다리가 번쩍 치켜 올라가는 것도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정순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윤기철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네가 날 접대할 것이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다.

    조경필이 비밀이라고 강조했지만 김양규한테까지 입을 다물 수는 없다. 비밀은 퍼뜨릴수록 무게와 책임이 줄어드는 법이다. 오후 5시경, 윤기철은 회의실에서 김양규와 둘이 마주 앉았다. 방금 업무회의를 마친 회의실도 어수선했다. 나가려는 김양규에게 할말이 있다고 한 것이다. 김양규가 연일 야근으로 꺼칠해진 얼굴을 들고 윤기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영환 국장이 만나자고 합니다.”

    대뜸 말했더니 김양규가 어깨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둘이서 같이 저녁을 먹자는데요. 조 대표가 오전에 말해주었고 조금 전에는 정순미가 저를 안내해준다고 합니다.”

    “…”

    “시발, 절 북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7시 반에 정순미가 대한물산 창고 앞에 차를 받쳐놓고 기다린다는데요.”

    “…”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입맛을 다신 김양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모르지, 사람들이 말을 안 하니까.”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요.”

    윤기철이 김양규의 다문 입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전 법인장님께 보고하고 가는 것이니까 혹시 실종되면 처리해주시지요.”

    그러고는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부담 느끼시면 과장들한테도 말해놓을까요?”

    “아니, 그것이, 나는….”

    이제 김양규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이놈은 비밀이 노출된 책임을 혼자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머리를 끄덕인 윤기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오후 6시 10분, 오늘도 연장근무여서 일찍 저녁을 먹으려고 숙소에 온 과장은 셋, 생산과장 고형민, 기계과장 백종호, 그리고 자재과장 장원석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셋이 일제히 수저를 들었지만 윤기철은 의자에 등을 붙인 채 셋을 번갈아 보았다. 밥을 먹던 장원석이 먼저 물었다.

    “왜? 밥맛이 없어?”

    “오늘 저녁 초대를 받았어요.”

    기다리고 있던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총국 국장 오영환이 밥 먹자고 조 대표한테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놀란 셋이 일제히 숟가락질을 멈췄고 고형민은 딸꾹질을 했다.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비밀을 지키라면서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지만 어디 그럴 수 있어야지. 법인장한테 말했더니 과장들한테는 말하든지 말든지 하라는군요.”

    이 정도는 거짓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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