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런 단호함은 지난해 8월 탈레반에 인질로 잡힌 독일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탈레반의 최후통첩을 앞두고도 ‘철군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오히려 독일군 증파 의사를 밝혔다. 최후통첩 이틀 뒤 인질 1명이 살해당한 뒤에도 흔들림 없이 “독일군의 아프간 주둔은 매우 중요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장기간 계속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메르켈 총리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념이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미국한테 잘 보여 반대급부나 얻어보자는 계산에서 나온 언행이 아니다. 그는 로마의 군사전략가인 베제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인 것이다.
메르켈은 2003년 초 21세기 외교 및 안보 정책에 관한 글에서 독일 역사와 신유고 연방 코소보 자치주에서 벌어진 ‘코소보 사태’(유고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사태)를 거론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평화제일주의, 급진적 평화주의가 오히려 평화가 아닌 폭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더 큰 화(禍),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인권과 안정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때로 군사적 개입은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메르켈의 이 말에는 우리 대북관계에서도 새겨야 할 대목이 많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부었지만 북한은 우리의 선의(善意)를 핵무장으로 보답했다. 이런 북한의 행동에 대해 오히려 ‘핵무장을 이해한다’ 는 식으로 반응해온 게 지난 정권이었다. 로마사 전문가인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평화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에 가다
메르켈의 친시장 정책과 친미 정책이 동독 체험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합쳐 35년 세월을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동독 출신자가 통일 독일에서 주류 서독인들을 제치고, 최연소 여성 장관을 거쳐 최초 여성 총리가 되었으니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다.

메르켈의 남편인 요하힘 자우어 박사.

사르코지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 상하원 표결을 지켜보고 있다.
메르켈이 태어나기 두 달 전인 1954년 5월 말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은 18만명에 달했다.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1년에는 그 수가 270만 이나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부모가 동독행을 택했던 데는 사연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막 끝내고 결혼한 뒤 메르켈이 태어나자마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을 교화하라는 명령에 복종해 동독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동독이 정의로운 공동사회라는 초기 기독교 사상에 근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