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화제의 독립다큐영화‘워낭소리’이충렬 감독

“내 아버지에게 반성문 쓰듯 만든 영화”

  • 구가인│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9-03-09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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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제의 독립다큐영화‘워낭소리’이충렬 감독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서울 광화문의 한 극장 앞에 ‘워낭소리’의 포스터가 붙은 것은 한 달 전쯤 일이다. 소의 턱 밑에 다는 방울이란 뜻의 ‘워낭’이라는 말도 낯설었지만 배경이 된 농촌 풍경은 좀 진부해 보였다. 오롯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스크린 앞에 앉아 있기에 늙은 소와 노인은 그다지 매력적인 주인공이 아니었다.

    다른 예술영화들이 그렇듯 한 달을 못 넘기고 금세 사라지려니 했다. 사실 대중에게 생소한 장르인 다큐멘터리독립영화가 상영 기간을 보름이나 넘기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극장 구석에 위치한 80석짜리 상영관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300석의 본(本) 상영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두서너 석씩 차지하며 한가로이 영화 보기 좋았던 이 극장에 ‘낯선’ 관객들이 찾아왔다. 여고 동창쯤으로 보이는 중장년 이상의 아주머니 무리가 영화관을 장악했고 엄마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예닐곱 살짜리 아이들이 극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예술영화관 장악한 중장년층

    1월15일 개봉한 ‘워낭소리’는 개봉 1주차엔 1만명을 갓 넘기더니 이어 2주차에 4만7000명, 3주차엔 10만명을 모았고 한 달이 지난 현재 60만 관객을 돌파했다(2월15일 기준). 심지어 포털사이트 인기인 검색순위에 ‘최 노인의 소’가 올랐을 정도. 물론 1000만 관객 신화에 익숙한 한국영화계에서 그깟 60만명은 대단치 않은 숫자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개봉 당시 겨우 7개 상영관에서 시작한, 순수 제작비 1억원짜리 초저예산 독립영화가 상업영화를 제치고 전국 100여 개 극장에서 상영하게 됐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변’이다.

    이 영화를 만든 이충렬(44) 감독은 외주방송프로덕션 PD 출신이다. “‘VJ 특공대’ ‘6시내고향’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부터 정부기관 홍보용 영화까지 안 해본 게 없다”는 그에게 ‘워낭소리’는 “마지막 승부수라고 생각하고 만든” 첫 번째 극장용 다큐영화다.



    ▼ 한국에선 중장년층과 아이들만 확실히 잡으면 히트친다던데 ‘워낭소리’는 둘 다 잡았다.

    “젊은 사람들이 보고 부모에게 소개하기도 하고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입소문이 나서 나중엔 한 가족이 두세 번씩 보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 대중성을 의식하고 만든 다큐라 어느 정도 흥행은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 못했다. 영화판에 있었던 게 아니라 흥행 스코어 대한 개념이 없다. 1000만 관객이나 되어야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는 독립영화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론 너무 갑작스럽게 관심을 받게 되니까 얼떨떨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두렵다.”

    화제의 독립다큐영화‘워낭소리’이충렬 감독
    ▼ ‘워낭소리’가 왜 인기를 얻는다고 보는가.

    “주인공 할아버지의 삶이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것 같다. 예컨대 자식은 부모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고, 빠르게만 사는 현대인은 자기성찰을 하는 듯하다. 형식 면에서는 사실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다큐와는 조금 다르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편집방식을 취했다. 영화 끝난 뒤에도 잔영이 뇌리에 남아 있도록 기승전결 구조로 전개되는데 그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여든 노인과 마흔 살 소의 우정

    ‘워낭소리’의 주인공은 경상북도 봉화 산골에 사는 여든 살 된 촌부 최원균씨와 평균 수명보다 곱절을 더 산 마흔 살 된 일소다. ‘Old Partner’라는 영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30년 지기 동료인 노인과 소의 관계를 담았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노인을 위해 3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달구지를 끌고 경작을 도운 소 덕분에, 노부부는 9남매를 가르치고 키울 수 있었다. 노인은 그런 소를 위해 꼴을 베고 쇠죽을 끓인다. 평생 육체노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노인과 소는 생의 끝자락에도 노동으로서의 삶, 삶으로서의 노동을 천천히 이어간다. 영화에는 2005년부터 소가 죽는 2007년 1월까지 촬영된 화면이 담겨 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 순수 제작기간만 3년이 걸렸다. 우여곡절도 많아 처음엔 텔레비전 다큐로 기획됐다가 제작사가 바뀌며 영화로 만들어졌다.

    ▼ 방송용에서 영화로 바뀌면서 달라진 게 있나.

    “작품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제작사도 바뀌고 방송국에서 퇴짜를 놨다. ‘이런 게 재미가 있겠느냐, 의미는 좀 있겠다’ 식이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큐멘터리영화‘우리 학교’를 제작한 고영재 PD를 만나면서 영화로 탄생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바뀐 건 시간이 줄어든 것 빼곤 거의 없다. 예상컨대 방송이었다면 방송사 쪽 요구로 마지막 장면에 ‘할아버지의 삶은 다시 소로 이어진다’ 유의 희망적이면서도 도식적인 결말을 내놓았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영화로 만든 게 잘한 것 같다.”

    ▼ 이 작품에 오랫동안 매달린 이유는?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아버지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와 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한번 작품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최소한 3년 이상 길게 간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노인과 늙은 소를 찾으러 전국 안 다닌 곳이 없다. 2005년 촬영에 들어갔지만 할아버지가 카메라만 다가가면 사진을 찍는 줄 알고 동작을 멈춰 촬영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카메라에 익숙해지고 내가 할아버지의 동선과 할아버지, 할머니, 소의 관계를 파악할 때까지 6개월을 더 기다렸다. 사실 처음엔 소가 1년 안에 죽을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아들도 계약서 쓴 거다. 그런데 두 해가 지나도 소가 죽지 않아서 왜 소가 죽지 않냐고 제작자에게 욕을 먹었다(웃음).”

    화제의 독립다큐영화‘워낭소리’이충렬 감독

    이충렬 감독에게 ‘워낭소리’는 첫 극장용 영화다. 사진은 영화 속 장면.

    ▼ 왜 소를 함께 다뤘나.

    “아버지를 떠올리니까 바로 소가 떠올랐다. 우직하고 열심히 산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소가 닮았다. 내가 촌놈이기 때문인지 아버지 하면 소를 끌며 농사짓는 기억밖에 없다. 지금의 쇠락한 시골과 그 속에서 퇴물이 된 아버지와 축사에서 살이 뒤룩뒤룩 찌고 있는 소의 모습은 싫었다. 기억 속 아버지를 현실에 불러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들의 헌신, 그런 게 아직 우리 사회에 유효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지금도 시골에서 돼지를 키우신다. 영화 속 할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똑같다고 보면 된다. 관객이 가능한 한 영화에 공감할 수 있도록 다큐 속 인물의 보편적인 모습만을 담았다. 그래서 영화 속 할머니 할아버지의 특별한 사연은 다 편집하고 우리 부모님과의 공통점만 남겼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가 저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라고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영화를 본 미국인 기자도 ‘그 할머니 잔소리하는 게 우리 엄마랑 똑같다’고 하더라.”

    영화관람 후 말없이 용돈 건네준 아버지

    전남 영암 출신으로 3남1녀 중 둘째인 그는 자신에 대해 ‘사고 많이 친 자식’이라고 말했다. 고려대학교 교육학과(85학번)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PD로 활동하면서 무속인,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자, 사북탄광 노동자 등을 다룬 다큐를 기획했지만 방송국에서는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툭하면 퇴짜를 놓았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계속되자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그는 “돈도 못 벌고 매번 실패하니 부모님에게 너무 미안했다”는 말로 당시 심정을 설명했다.

    “반성문을 쓰듯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 감독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유년의 우리를 키우기 위해 헌신한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소를 위해 이 작품을 바친다’라는 자막을 넣었다. 앞서 지난해 부산영화제 때 영화를 본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생한 스태프들과 술 한잔하라”며 용돈 30만원을 쥐여주었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 노인 부부 역시 DVD를 통해 영화를 보았지만 자신이 노래 부르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린 할머니와 달리 할아버지는 몇 장면을 신기하게 보다 곧 일하러 나갔다고 한다(이후 봉화의 한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됐는데 할아버지는 건강 문제로 오지 않았고 할머니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 ‘워낭소리’가 유명세를 타면서 최노인 부부를 만나러 봉화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이다. 찍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사후 책임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분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게 영화로만 기억해주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방송국에서 카메라맨이 찾아가 귀찮게 하면 다 내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내려갔는데 화가 나서 알은 체도 안 하시더라. 사실, 소에게도 미안하다. 촬영이 더뎌지니까 소가 빨리 죽기를 바란 적도 있고 나 때문에 빨리 죽었다는 생각도 든다. 할머니 할아버지 편찮으신 것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 그런 점들이 죄송하다.”

    ▼ 촬영하면서 특히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늙은 소가 힘에 부치니까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소 달구지에서 내려와 나뭇짐을 덜어 나눠지고 옆에서 걷더라. 그전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다. 길에서 기다리다 그 장면을 잡아냈는데 할아버지가 성자처럼 느껴졌다.”

    ▼ 소도 늙었고 노인도 몸이 좋지 않다. 그런데도 왜 끝까지 노동을 포기하지 않는 걸까.

    “그건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식이 있는 한 부모가 자유로울 수 없듯, 소도 주인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고 할아버지도 소가 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할아버지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자기 몸이 안 좋은데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땔감을 마련한다. 소여물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노인이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노동이란 게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면서 습관이 된 거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냥 시시포스 신화처럼 반복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할아버지와 소가 일종의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농약을 안 치는 것도 소가 건강하지 못하면 자기 삶도 깨지기 때문이고,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은 할아버지 원망을 많이 하지만 그 할아버지가 없으면 자기 삶이 깨진다는 것을 안다.”

    소소한 것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영화 만들 터

    ▼ 다큐를 찍으면서 변한 게 있다면?

    “할아버지는 자기가 관심 갖는 것 외엔 관심이 없다. 여전히 할머니 잔소리와 카메라를 싫어한다(웃음). 반면 할머니는 카메라를 아셨다. 원래 할머니가 말이 많은 분이 아닌데 외지에서 사람이 오니까 신이 나서 시키지 않은 이야기도 줄줄 하셨다. 다큐로 두 분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단 나는 다큐를 찍으면서 마음이 좋아졌다. 느릿한 걸음걸이나 호흡법을 따라가다 보니 삶이 단순해지고 마음을 비우니까 한결 좋아졌다. ‘워낭소리’가 힐링 무비가 된 셈이다.”

    “매일 스무 번 남짓 같은 말을 반복”할 만큼 잦은 인터뷰에 지쳤기 때문인지, 지난 10년간 소처럼 묵묵히 “꿈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던” 감독은 인터뷰 내내 담담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현재 새로운 작품에 대한 계획은 없지만 앞으로도 일상적이고 내면적인, 소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답한 그는 한편으론 “첫 작품에서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아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감독의 ‘행복한 불안’과 무관하게 ‘워낭소리’ 열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 2월15일에는 청와대에서도 워낭소리를 단체관람하기 위해 예술영화전용관을 찾았다는데, 성장과 효율의 대척점에서 ‘느릿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철학을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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