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달러화의 공급과잉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해온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 가치를 흔든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따른 과도한 달러 공급과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포기했고,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 중심 체제가 등장한 바 있다. 위기를 맞은 현재 미국의 대응 역시 새로운 국제경제체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미국이 그동안 세계 유일 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축이 달러화의 힘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제부터 미국의 지위 역시 본격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잠시 1980년대로 가보자. 경제 저성장이 이어지던 1980년대 중반 미국은 최악의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1985년 플라자합의 등을 통해 일본과 서독이 엔화와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하도록 ‘팔을 비틂으로써’ 가까스로 달러화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전문가들은 미국의 패권이 하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의 저자인 폴 케네디를 필두로 로버트 길핀, 스테판 그래즈너, 그리고 리처드 로스크랜스 등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이미 쇠퇴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보통국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흔들리는 ‘구조적 위상’
이때 제기된 반론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됐다. 우선 브루스 러셋 예일대 교수는 ‘The Mysterious Case of Vanishing Hegemony: or Is Mark Twain Really Dead?’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 세기 전 건재해 있는 마크 트웨인이 죽었다는 오보가 유럽에서 나왔듯 이번에는 미국의 패권이 사라지고 있다는 오보가 나오고 있다’고 일갈했다. 러셋 교수는 “당장 경제사정이 어렵다 해서 미국의 패권이 흔들린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물리적 힘과 문화적 힘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또한 코카콜라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가 전세계에 뻗어나가 있는 한 패권은 건재하다는 논리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자 출신으로 런던 정경대의 원로 교수였던 수전 스트레인지의 견해는 그보다 더 강력했다. 러셋이 말한 군사력과 대중문화 이상으로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기제는 월가(街)의 금융시스템이라는 것이었다. 세계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의 자본주의이므로,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움직이는 ‘구조적인 힘(structural power)’을 갖고 있다는 스트레인지의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과정을 거쳐 1990년대가 도래했고, 주지하다시피 1차 걸프전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의 부양책이 성공하면서 과거의 위상을 회복했다. 이러한 호조는 부시 행정부로 이어졌고, 학계에서도 “미국이 돌아왔다”는 담론이 주류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미국은 다시 위기 앞에 서 있다.
이 위기의 성격이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핵심이었던 미국 금융시스템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리먼 브러더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이들은 단순한 은행이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회사들이다. 이들의 붕괴 또는 약화는 미국이 가진 ‘구조적인 힘’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리적 군사력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미국 패권의 ‘구조적 위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군사력 역시 장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10월8일 미 대선후보 2차 토론회 논쟁은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이 미국의 군사력 유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존 매케인 후보는 관계가 없다는 논지로 답했지만, 버락 오바마 후보는 단호하게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경제력 없이 어떻게 군사력을 증강할 것이며, 경제적 뒷받침 없이 어떻게 세계 곳곳에 미군을 전진 배치할 수 있겠느냐는 답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