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의회를 통과한 ‘북한인권법안’의 목적과 정치적 의미,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놓고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쿠바, 이란, 이라크, 미얀마 등 제3국의 인권 및 자유화관련 특별법을 만들었다. 이들 법안과 ‘북한인권법안’을 비교·분석한 글을 소개한다. 필자는 “애초 논의되던 강경한 조항 중 상당부분이 삭제됐으므로 이 법안은 북한 붕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며, 인권문제를 대북지원책과 연계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편집자]
워싱턴DC의 미 의회 의사당.
이 법안을 두고 한국에서는 정치권을 비롯해 언론, 시민사회, 학계 등 사회 전반에서 격렬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강력히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 법안의 주목적이 북한정권 붕괴에 있으며,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의 대북 무력 공격이 뒤따를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이 법안은 ‘분배 투명성’을 제기하며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자체를 막으려 하기 때문에 반인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법안의 구체적 내용과 맥락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법안의 내용과 맥락을 미국에서 통과된 다른 나라 관련 특별법안들과 비교해 보고 아울러 한국 내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의문에 답하는 것이다.
우선 제3국의 인권 및 민주화, 해방을 다룬 법안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통과됐는지 그 경과를 살펴보자.
맨 처음 미 의회를 통과한 것은 쿠바 관련 법안이다. 1992년 ‘쿠바민주화법안(Cuban Democracy Act)’이 통과됐고, 1996년에 더 심화된 내용의 ‘쿠바자유민주법안(Cuban Liberty and Democratic Solidarity Act)’이 통과됐다(단 1996년 법안 중 3장 ‘쿠바 내 과거 미국민의 재산 보호’ 조항은 그 효력이 계속 정지되어 있다).
‘북한정권 붕괴’ 명시되지 않아
그 다음 제정된 것은 1998년 상하원을 통과해 그해 10월31일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이라크해방법안(Iraqi Liberation Act)’이다. ‘이란민주화법안(Iran Democracy Act)’은 2003년 7월 상하원을 모두 통과했으나, 이 법안이 상징성을 가질 뿐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의원들의 주도로 2004년 7월16일 ‘이란자유지원법안(Iran Freedom and Support Act)’이 상원에 추가 상정됐다.
미얀마 문제를 다룬 ‘버마자유민주법안(Burmese Freedom and Democracy Act of 2003)’은 2003년 7월28일 부시 대통령의 최종재가를 받았다(‘미얀마연방’은 1989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현 정부가 ‘버마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옛 국호를 개칭한 것. 그러나 이 법안은 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버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편집자).
9월29일 중국 베이징에서 탈북자 44명이 캐나다대사관 담장을 넘어 진입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은 북한인권법안이 북한정권 붕괴를 목적으로 제정된 법안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다른 유사법안과 북한인권법안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비판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미얀마·이란 관련 특별법안을 살펴보면 미국은 법안에 해당정권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법안의 목적이 정권교체일 경우에는 그 목적을 숨기지 않고 명시했다. 각각 살펴보면 이라크와 미얀마 관련법안은 정권교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고 쿠바, 이란, 북한 관련법안은 정권교체를 명시하지 않았다.
우선 이라크해방법안의 경우 법안 3장에 사담 후세인 정권 제거와 민주 정부로의 대체가 미국의 정책임을 분명히 했다(‘to remove the regime headed by Saddam Hussein from power in Iraq and promote the emergence of a democratic government to replace that regime’).
2003년 7월 통과된 이란민주화법안에는 정권교체가 명시되지 않았지만, 2004년 7월 상정된 이란자유지원법안에는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내용이 법안 3장에 들어 있다(‘to support regime change for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and to promote the transition to a democratic government to replace the regime’).
오른쪽 표에서 이란의 정권교체와 관련해 ‘×’로 표시한 것은 2004년 법안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바민주화법안은 쿠바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지지하지만, 직접적으로 카스트로 정부의 교체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to seek a peaceful transition to democracy’).
버마자유민주법안에도 제2장 8항에서 현 미얀마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버마민주동맹(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에 미얀마인을 대표하는 정통성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to officially recognize the NLD as the legitimate representative of the Burmese people as determined by the 1990 election’).
버마민주동맹은 1990년 실시된 버마 총선에서 다수당 자리를 차지했으나 미얀마 군부가 이를 무시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버마민주동맹 소속 국회의원을 포함한 민주인사들이 살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정치적·역사적으로 볼 때도 미얀마의 정통성은 버마민주동맹에 있다는 것이 이 법안의 입장이다.
이러한 법안과 비교해 볼 때 북한인권법안에는 북한정권의 교체는 물론 북한정권 제재와 관련한 내용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북한정권에 강경한 입장을 지닌 미국 내 인사들은 이 법안이 너무 미온적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물론 북한인권법안을 지지하는 미국 의원들 가운데는 북한정권 붕괴를 바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북한인권법안을 지지한다고 해서 인권법안 자체가 북한정권 붕괴를 의도한다고 볼 수는 없다. 국가보안법 유지를 지지하는 이들 중에 북한정권이 교체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의 의도가 북한정권 붕괴라고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내에서 북한인권법안이 미온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북한보다 가혹하지 않은 독재국가를 타깃으로 한 법안에도 공공연히 정권교체를 표명했으면서 유독 북한 관련법안에 정권교체가 명시되지 않은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향후 북한정권 교체를 명시한 새 법안이 추가로 상정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북한인권법안이 북한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하므로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북한 정권교체’를 명시한 법안이 나올 때 힘을 모아 반대투쟁에 나서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목적 자체가 ‘북한인권 향상’으로 명시된 현재의 법안에 대해 정권교체 시도 반대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오히려 ‘인권’이라는 보편타당한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법 통과 후 무력공격’ 전례 없어
북한인권법안을 반대하는 또 다른 논거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도 이라크처럼 무력공격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이런 논리라면 이란민주화법안은 미국의 이란 공격 사전조치이고, 버마자유민주법안은 미얀마 무력공격의 사전 단계여야 한다. 이란·미얀마 관련법안은 지난해 통과되었으므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쿠바의 경우가 이 주장을 반박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92년 쿠바민주화법안을 통과시켰지만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쿠바를 무력공격하지 않았다. 인권 개선이나 민주화 등을 목적으로 한 미국의 특별법안과 무력공격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이라크해방법안이 그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는 2001년 9·11 테러로 조성된 새로운 국제정세, 즉 반테러 전쟁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라크해방법안은 미국이 반테러전쟁을 선포하기 전인 1998년 통과됐는데, 더욱이 이 때는 부시 행정부가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 시기였다.
이라크해방법안에서 특기할 점은 군사지원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군사지원 규모가 9700만달러를 넘을 수 없다고 그 액수까지 명시했다. 이 부분을 확대 해석하면 미국이 이미 클린턴 정부 때부터 이라크 공격을 기도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이 사실상 해방구나 다름없었던 사정과 연관이 깊다.
쿠르드 지역은 이 당시 이미 후세인 대통령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켜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라크해방법안에 명시된 군사지원은 이 지역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이 군대는 독자적으로 정부 공격을 시도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대한 군사지원을 후세인 공격기도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놀랄 만한 점은 비밀리에 이뤄져도 좋을 군사지원 내용을 미국 정부가 법안에 모두 공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공개주의 원칙하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은 1985년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통해 대외정책의 비밀주의가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한 뒤 가능한 모든 정책을 공개하고 있다(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레바논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추진한 비밀계책을 일컫는다. 당시 미국은 레바논 테러집단을 후원한 이란에 무기를 파는 대가로 인질을 빼오기로 비밀리에 타협했다. 수천t의 무기가 이스라엘을 거쳐 이란으로 건너갔고 인질들은 하나 둘씩 석방됐다. 미국은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사회주의정권에 대항하는 우익 콘트라반군의 무장을 도왔다. 이 사건이 공개되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큰 시련에 빠졌고 이후로는 대외지원을 공개하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는 현재 민주화 세력이 비폭력 민주화운동 그룹과 무장운동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미국 정부는 비폭력 민주화운동 그룹에 대해서만 지원한다는 원칙을 버마자유민주법안 8장 a조에 명시하고 있다(‘to assist Burmese democracy activists dedicated to nonviolent opposition to the regime’). 이러한 사례는 미국이 무력공격의 사전수순으로 특별법안을 통과시킨다는 주장이 근거 없음을 방증하고 있다.
경제제재 조항도 삭제
북한인권법안에는 경제제재(Economic Sanctions)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북한인권법안 이전 상원에 계류됐다가 폐기된 ‘북한자유법안(North Korea Freedom Act)’에는 ‘북한이 완전한 경제개혁을 이루기 전까지는 대북 무역해제 및 경제원조를 제공할 수 없다’(402조)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번에 통과된 북한인권법안에서는 삭제됐다.
이를 다른 나라 관련 특별법안과 비교해보면 북한인권법안이 얼마나 온건한 성격을 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쿠바민주화법안의 경우에는 매우 광범위한 경제제재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경제제재는 물론 쿠바정부를 지원하는 타국 정부에까지 그 제재를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버마자유민주법안은 경제제재 범위를 좁혀 미얀마 군부정권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에 대해서만 제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 그러한 기업의 대미수출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또한 미국 내에 있는 미얀마 군부의 자산을 동결하며 이들에 대한 국제기구의 금융·기술 지원을 반대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란민주화법안도 마찬가지여서 이란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섬유나 음식류에 대해 제재를 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라크해방법안에는 경제제재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91년 걸프전 이후 이라크는 전면적인 UN경제제재 상태하에 놓여 있었으나 이후 이라크의 경제난이 매우 심각해지자 1994∼95년부터 경제제재를 완화했다.
북한인권법안에도 경제제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법안의 목적이 정권에 대한 제재보다는 북한인권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법안들이 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기 위해 경제제재 조항을 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북한인권법안에 반대하는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은 반대논리의 하나로 이 법안이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 또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제3국 관련 특별법안 중 인도주의적 지원에 관한 내용은 쿠바, 이라크, 북한 관련법안에 들어 있다. 가장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규정한 쿠바민주화법안의 경우에도 NGO의 식량지원이나 의약품·의약기기 원조에 대해서는 규제조항이 없다(쿠바민주화법안 1705장 c항). 이라크해방법안은 한 걸음 나아가 후세인 통치에서 탈출해 쿠르드족이 점령하고 있는 해방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분배 투명성’은 전제 아닌 권고
북한인권법안에는 인도주의적 지원문제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다. 일례로 식량분배의 투명성을 강조하던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원칙은 지키되 좀더 유연한 방법으로 대북 식량지원 문제를 처리하려는 시도를 담았다. 원래 하원에서 통과된 초안에는 직접지원과 간접지원을 분리하여 직접지원은 투명성 등 조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하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9월28일 상원에서 수정·보완된 안은 이 조건을 강제적이 아닌 의회 권고사항으로 완화시켰다.
더욱이 간접적인 지원, 가령 WFP(세계식량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원하는 것은 투명성을 강조하되 전제조건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하원에서 북한인권법안이 통과되고 이틀 뒤인 7월24일 WFP를 통해 북한에 식량 5만t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인권법안에 포함된 인도적 지원의 골자는 난민, 망명자, 탈북고아, 성매매 희생여성 등에 대한 것이다. 미국 의회는 이들 북한주민 지원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2000만달러의 예산을 할당했다.
민주노동당 의원 및 당원들이 9월30일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미 상원의 북한인권법 통과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편 북한인권법안에는 북한 인권·민주화운동 단체에 대한 지원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법안은 이 단체를 정의하면서 인권, 민주화, 법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단체로 한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주민에 대한 합법적 교육, 문화교류에 대한 지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북한인권법안 102조). 북한인권법안이 남북교류를 증진시키려는 한국정부의 정책과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북한인권법안을 지켜보며 궁금한 것 중 하나는 미국이 이러한 법안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 말고 ‘타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증진시킨다’는 목적으로 입법을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유럽의회의 경우 단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내법이 아닌 결의안(resolution) 형태로 타국의 인권문제에 개입한다. 아시아권에서도 미얀마, 이란이 유럽의회 결의안의 단골 메뉴였고 최근에는 북한도 주요 관심대상에 올랐다.
또한 EU는 제3국과 무역·협력협정 을 맺을 때 인권조항을 반드시 삽입했다. 이 인권조항을 어길 경우 협정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전통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서유럽과 소련이 헬싱키협정을 체결할 때 서유럽은 소련측에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권조항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킨 바 있다.
유럽 시민사회는 인권·민주주의 의식이 매우 강하다. 이를 반영하듯 1992년 이후 EU는 양자간 경제협정을 체결함에 있어 인권·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을 양자 협력관계의 기초이자 핵심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인권조항을 위반했을 경우의 제재 조치도 포함됐다.
1995년 EU와 베트남이 체결한 경제협정은 아시아 국가 관련 인권·민주주의 관련조항이 들어간 최초의 협정이다. 이 협정은 공동위원회(Joint Commission)를 두어 2년에 한 번씩 하노이와 브뤼셀에서 번갈아 인권상황에 대한 검증회담을 하도록 명시했다. 만약 이 회담에서 EU가 베트남의 인권상황을 인정할 수 없을 때에는 원칙적으로 지원을 유보하거나 최악의 경우 무역관계를 단절한다고 못박았다. 이 협정은 특정국가와의 관계개선이나 지원문제를 그 나라 인권상황과 연동하고자 하는 미국의 인권법안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 상원은 북한인권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대북지원과 인권문제 연계조항의 구속력을 완화했다. 이는 대북지원에 있어 미국정부의 신축적인 재량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국무부 안에 북한인권담당 특사를 임명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북한인권문제가 제기될 수 있도록 강화한 부분도 있다. 특사가 임명되면 그의 활동과 보고서가 지속적으로 언론의 관심이 되고 당연히 북한인권문제가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조항이 민주당과의 협의과정에서 법안에 첨가됐다는 사실은 한국내 일각의 생각과 달리 민주당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공화당보다 더 강경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상원은 ‘지역내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북한과의 인권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의회의 입장’이라며 행정부에 대북한 인권대화 추진을 촉구했다.
이러한 다자회담 구상은 앞에서 언급한 1975년 헬싱키협정을 모델로 하고 있다. 미국·유럽과 소련·동유럽 사이에 체결된 헬싱키협정은 안보·경제·인권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으로 소련 및 동유럽 진영이 인권적 가치를 공식인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참여연대 등 국내 NGO 단체들도 북핵문제 해결방식으로 이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미 의회가 헬싱키모델 해법을 결의한 것은 북한문제 해결에 있어 무력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하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권압박정책의 성공사례
미국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북한인권법안이 실질적으로 북한인권 개선에 효과가 있을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절대적으로 폐쇄된 체제특성상 외부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압박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보다는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지속하면서 개방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주로 햇볕정책을 기반으로 삼는다.
물론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인도주의적 지원과 개방유도정책은 바람직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지원과 개방유도정책이 인권향상정책과 꼭 대립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햇볕정책의 원조인 과거 서독의 동방정책은 동독의 정치범을 돈을 주고 빼낼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반면 앞서 설명한 헬싱키협정에서 보듯 유럽은 소련·동유럽과 관계개선 협상을 할 때 인권문제를 빼놓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소련 및 동유럽 민주화의 원동력이 됐다.
이 두 사례는 대북 인권압박정책이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충분하다.
외부의 인권압박이 북한 내부의 인권개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례는 북한 자체에서도 발견된다. 우선 가장 익숙한 경우가 탈북자 문제다. 1990년대 중반 대량 탈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송환된 탈북자에 대해 북한당국이 엄격하게 처벌했다. 단순 탈북자를 정치범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환된 탈북자를 국경 현장에서 총살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꾸준히 탈북자문제를 제기한 결과 요즘에는 그 처벌강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이제는 탈북을 시도했다 송환된 주민들이 단순노역장에서 몇 개월 복역하는 수준의 가벼운 처벌을 받고 있다. 공개 처형당하는 숫자도 현저하게 줄었다. 남북정상회담 때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탈북자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일본인 납치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본정부는 집요하다 할 정도로 납치문제를 북일정상회담의 중요 의제로 삼았다. 처음에는 납치문제를 전면 부인하던 김정일 위원장은 결국 이를 인정하고 직접 사과했다. 심지어 일본인 납북자가 일본에서 가족을 만난 뒤 북한으로 귀환하지 않은 일까지 발생했지만, 그 후에도 북일 양국간 회담은 계속됐고 일본은 여러 안건에서 북한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 납치문제로 인해 일시적으로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회담이 재개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비추어 북한에 인권문제를 제기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소강상태를 피할 수 없을지 몰라도 대북관계 자체가 파국을 맞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오히려 인권문제를 정부간 회담의 정식의제로 상정한다면 북한인권의 개선은 물론 북한과 더 수준 높은 관계개선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올 수 있다.
‘인공기 소각’ 뛰어넘는 접근 필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현재 한국에서 북한인권문제에 있어 보수세력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보진영은 북한인권문제가 반공보수세력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가 북한인권문제에 계속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자칫 진보적 시민사회 자체의 약화로 연결될 공산이 크다.
북한의 인권상황이 세계 최악의 수준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인권실태는 이미 남한의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능가하고도 남을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진보적 시민사회가 이 문제에 계속 침묵한다면 이는 보수세력의 공격 이유가 될 것이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침묵은 오히려 보수세력의 강화만을 야기할 뿐이다. 더욱이 유엔 인권위원회를 비롯해 국제사회가 북한인권문제의 심각성을 공인한 터라 진보세력이 고립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드시 보수세력과 같은 방식으로 북한인권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공보수진영의 문제제기 방식을 넘어서서 전향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한국의 보수진영은 반공반북의 맥락에서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는 측면이 있다. 즉 북한 인권탄압의 심각성을 제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북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보수집회에서 흔히 연출되는 인공기 소각장면이 그 예다. 인공기는 김정일 위원장과 그 체제뿐 아니라 북한 인민도 자신들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깃발이다. 북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인공기를 소각하는 행위는 북한인민 전체를 적(敵)으로 돌리는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또한 일부 보수세력은 북한의 인권을 제기하면서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적 조항에는 집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한국내 진보세력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선택할 길은 분명하다. 우선 침묵을 지키지 않아야 하며, 남과 북을 다른 기준에서 접근하는 일부 보수세력의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을 벗어나고, 인권문제는 제기하되 북한의 실체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북미수교를 검토했던 미국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