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픽션·팩트·팩션?

  • 글: 김현미 동아일보 미디어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10-28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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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션·팩트·팩션?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팩션’ 소설들. 독자는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가 사실인지에 대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요즘 출판가 유행어는 ‘팩션(faction)’이다. 소설의 픽션(fiction)과 사실의 팩트(fact)를 합성한 이 조어가 새삼 부각된 것은 ‘다빈치 코드’의 대중적 인기와 관계가 깊다. 저자 댄 브라운이 사실과 허구를 어찌나 그럴듯하게 버무려놓았는지 독자들은 마치 역사현장을 답사하듯 소설의 무대를 찾고 있다. 지난 여름 파리 생 쉴피스 교회(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자오선 로즈라인이 있는 곳)를 찾은 관광객만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헷갈리는 정도로 치면 매튜 펄의 ‘단테클럽’이 한 수 위다. ‘다빈치 코드’는 소재만 종교와 역사에서 빌려왔을 뿐 등장인물들은 명백한 ‘가공’인 데 비해 ‘단테클럽’의 주인공들은 역사책에 이름을 박은 실존 인물들이다. 소설에서 19세기 중반 보스턴 문인그룹을 형성했던 유명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역사학자 조지 워싱턴 그린, 편집자 제임스 토머스 필즈 등이 살아 움직이며 살인사건을 해결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원작 소설인 ‘진주 귀고리 소녀’도 절묘한 방식으로 ‘너무나 믿고 싶은 허구’를 만들어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 불린다. 큰 눈망울로 살짝 뒤돌아본 자세의 이 소녀는 누구이며 어떻게 그림의 모델이 됐을까. 저자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오랫동안 예술사가들의 관심 대상이었던 그림의 주인공을 하녀 그리트로 가정하고 화가 베르메르의 삶과 창작과정을 복원했다.

    작가의 해설 뒤따라야

    문학평론가인 서울대 김성곤 교수는 ‘팩션’에서 사실과 허구가 헷갈리는 현상을 두고 “픽션과 팩트가 혼합될 때 생길 수 있는 필연적인 부작용 중 하나”라고 했다.



    “사실과 허구 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곧 우리가 이분법적 구분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만 동시에 예기치 않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새로운 영역에서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오직 작가와 독자 그리고 평론가들의 책임이다.”(‘기획회의’5호, 2004.9.20)

    김 교수는 이런 혼란을 막는 방법의 하나로 작품해설이 붙은 ‘작가후기’를 제안했다. ‘단테클럽’은 ‘작가의 말’에서 창작과정을 밝혔고, ‘진주 귀고리 소녀’는 작가 인터뷰와 역자후기에서 사실과 창작의 경계를 설명했다. 그 점에서 ‘다빈치 코드’는 불성실하다. 댄 브라운의 다른 소설 출간 예고편만 잔뜩 달아놓았다. 다행히 소설에서 소품처럼 등장하는 책 ‘석고 단지를 가진 여인’이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라는 제목으로 번역됐고 ‘다빈치 코드의 진실’ 같은 책들이 출간돼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이탈리아 기호학자이며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1980년, 중세를 무대로 한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에 이어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소설 집필 첫해를 꼬박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바쳤다고 털어놨다.

    예를 들어 소설의 시간적 무대가 1327년 11월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2월이 되면 체세나의 미켈레(등장인물이자 실존인물)는 수도원이 아닌 아비뇽에 있어야 하는데 수도원 불목하니들은 날씨가 추워져야 돼지를 잡는다. 11월은 돼지 잡기에 너무 이르다. 하지만 돼지는 사건전개에 필요한 부분이다. 살해된 수도사가 돼지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혀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수도원을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산중에 배치했다.

    이처럼 작가의 친절한 해설은 미궁 속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붙잡고 빠져나오듯 독자를 혼돈에서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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