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비’는 발효액을 증류해 만든 술의 통칭이다. 포도주로 만든 브랜디는 대표적인 오드비다. [GettyImage]
내가 오드비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건 첫 직장에 다닐 때다. 대형 출판사에서 인턴십을 한 뒤 작은 잡지사에 취직했는데, 1년 10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회사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은 것이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은 바닥에 가라앉은 마음을 어깨에 이고 사무실을 함께 치웠다. 정리가 마무리될 즈음, 누구도 밥 생각이 없었기에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했다.
송별회도, 회식도 아닌 그 자리에서 당연히 소주를 마실 줄 알았지만, 가장 위 선배가 “오늘은 오드비”라고 했다. 음식 얘기를 주로 다루던 잡지사라 사무실 안에 꽤 다양한 술이 흩어져 있었다. 그중 반쯤 남은 브랜디 ‘아르마냑(Armagnac)’을 골라 머그잔에 따라 나눠 마셨다. 가장 주저앉고 싶은 날에 ‘생명수’라니! 맛과 멋의 언저리에서 일하던 우리에게 참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어쩐지 슬픈 마무리 같지만, 이후에도 나는 계속 음식 관련 일을 하게 됐다. 나의 사수는 소설가, 편집장은 요리사가 됐고, 오드비를 제안한 선배는 지금 잡지와는 멀고 먼 사업을 한다.
진도에서 만난 새빨갛고 진한 홍주
소금과 함께 마시는 데킬라는 코를 탁 때리는 향이 매력적인 술이다. [GettyImage]
여행 책을 쓴다고 전국을 헤매고 다니다가 진도 어느 작은 방에서 마신 홍주. 술이라면 나도 꽤 한다 생각했는데 10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새빨간 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이다를 타서 홀짝였다. 긴 여정에 말할 수 없이 지쳤던 그 밤, 홍주의 붉은 품에 안겨 집에서처럼 달게 잤다. 홍주에 들어가는 ‘지초’라는 약초 덕인가도 싶다. 다음날 아침, 반짝하고 깨어난 기분이 생생해 지금도 집에 홍주를 둔다. 눈 뜰 힘조차 없이 피곤한 밤이 찾아오면 홍주의 붉은 마술에 다시 기대 볼 마음에서다.
아주 작은 트럭에서 음식을 팔던 친구가 홍대 앞에 번듯한 가게를 차린 날, 나란히 창가에 앉아 데킬라에 탄산수를 섞어 마신 것도 기억난다. 그때 친구는 자기 기분이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주인공이 바다를 만났을 때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영화를 못 본 터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중에 보니 주인공들이 떠난 여행 혹은 모험의 발단에 데킬라가 등장한다.
내 또래들은 대체로 생애 첫 데킬라를 소금, 레몬과 함께 마셨을 것이다. 멕시코 사막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부족한 염분을 채우려고 소금을 이 술과 같이 먹었다는 유래도 들었을 테고. 코를 탁 때리는 향과 야성미가 찌릿하게 깃든 데킬라는 노동, 모험이라는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
한때 가게를 열면 꿈이 완성될 줄 알았던 친구는 이후 더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한창 일하던 30대의 우리는 ‘노동 후에는 노동주’라는 달콤한 규칙을 만들어 놓고 틈만 나면 만나 데킬라를 마시곤 했다.
차가운 구리잔에 담아 천천히 즐기는 ‘모스코 뮬’
구리로 된 잔에 얼음과 함께 담아 마시는 모스코 뮬. 푹푹 찌는 여름 밤 즐기기 좋은 칵테일이다. [GettyImage]
잔에 입술을 대는 순간 뺨까지 얼얼한 찬 기운이 퍼진다. 아무리 독한 보드카를 사용해도 차가움과 라임‧생강향 덕에 상쾌하게 느껴진다. 요즘처럼 푹푹 찌는 여름, 구리컵을 양손으로 꼭 쥐고 조금씩 마시며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내게 이 한 잔을 처음 권해 준 사람은 17년 전 함께 잡지를 폐간하며 오드비를 외쳤던 그 선배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만나 그때의 오드비, 그리고 이후 쌓아온 자신만의 오드비를 이야기하곤 한다.
화가 폴 가드너는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곳에서 멈출 뿐”이라고 했다. 여름도, 감염병도, 노동도, 인생도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흥미로운 곳에서 멈췄다가 그 기억을 갖고 흘러갈 뿐이다. 그 소중한 기억을 오래 각인시키는 데 한 잔의 생명수는 꽤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