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 회동 ‘비선 논란’ ‘후일담’ 점입가경
尹 미래비전도 과거청산도 애매모호
‘3년은 너무 길다’는 巨野 탄생의 의미
‘정상적 대선이냐, 아니냐’가 관전포인트
5월 9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총선은 차기 대선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1992년 총선에서는 YS가 여당의 당권을 확실하게 쥐어 대선을 향해 내달렸다. 1996년 총선에서는 DJ가 정계에 복귀해 집권의 단초를 만들었다. 2012년 총선에서는 박근혜가 차기 대권을 굳혔다. 2016년 총선에서 ‘차기’를 내세우지 못한 채 참패한 새누리당은 결국 ‘탄핵’을 맞이했다. 2020년 총선은 문재인 정부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오히려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여당 패배 성적표
2024년 총선에선 윤석열 정부가 헌정 사상 유례없는 여당 패배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여당이 전체 300석 중 108석을 얻어 개헌(탄핵) 저지선을 겨우 넘겼다. 여소야대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대 양당의 사실상 일대일 대결에서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여당이 밀린 사례는 없다. 더욱이 윤 대통령 임기가 40%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의 성적표다. 차기 대선, 정권 재창출과 교체에 대한 ‘미래’의 싸움도 아니고 현 정부 평가 성격이 압도적이던 선거였다.그렇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기록적 패배의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총선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지지율이 반등하거나 지지층이 역결집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미약하던 팬덤도 흩어지는 분위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해서 정국을 반전시키고 국정 장악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한 야당의 강력한 구심력과 의석수를 감안할 때 그리고 양남(강남과 영남)에 편중된 여당의 의석과 지리멸렬한 상황을 보면 쉽지 않은 과제다. 이 여름이 지나면 윤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11월)이 보인다. 이제 시간의 흐름에는 가속이 붙을 것이다. 차기 대선도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대선에서 패배한 날부터 이미 차기 대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여당은 그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현직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지지자들은 차기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불충’으로 간주하기 마련이고 레임덕으로 연결되기 십상인 차기 권력 타령을 좋아하는 대통령도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라는 것은 잔여 임기와 비례해 시간이 갈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은 여권 내에서의 종합적 영향력과 파워가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여권 내에서 형편없는 윤 대통령의 현재 위상은 자초한 면이 크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당의 주요 인물들을 노골적으로 핍박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6월 지방선거 대승 이후 “멀쩡한 여당 대표(이준석)를 어거지로 축출”했고 “무리수를 써서 새 대표(김기현)를 세우더니 다시 끌어내렸”으며 “최측근(한동훈)을 비대위원장으로 밀었다가 선거 와중에 노골적으로 흔들어댔”다.
물론 자기중심으로 여권을 재편했다는 이유만으로 윤 대통령을 비난하긴 힘들다. 다른 대통령들도 모두 그랬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함께 목숨을 걸고 권력을 탈취한 ‘쿠테타 동지’이자 자신을 여당 후보와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평생 친구를 배신하고 백담사로 내몰았다.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새 그림을 그려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임자이자 뿌리가 다른 자신의 대선 도전을 도운 전임자 노태우를 전두환과 묶어 사법 처리하고 민자당을 깬 후 신한국당을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이 요구한 대북 송금 특검을 수용해 김대중과 차별화를 시작하더니 아예 새천년민주당을 뛰쳐나와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당 안의 야당 노릇을 하면서 이명박이라는 현직 대통령을 누르고 소속 정당을 장악해 대선 후보가 되기 전에 당명까지 바꿔버렸다.
이에 비하면 윤석열과 이준석의 갈등은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준석 입장에선 젊은 지지자들을 유입시켜 국민의힘을 일신했고 대선에 공이 크다고 자부한다. 윤석열 입장에선 자신이 입당하기 불과 한 달 반 전에 대표로 선출됐다는 이유로 경선과 본선 과정 내내 자신을 거칠게 견제하던 이준석을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윤 대통령 취임 후 친정 체제 구축은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다. 지난 1년 반이 그런 시간이었다.
尹, 과거 대통령들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이전의 대통령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전임자들은 가치와 실리, 미래와 자신의 욕망을 절묘하게 결합해 새로운 권력 지도를 그렸다. 전두환 정권의 겸손한 2인자였던 노태우는 대선 때부터 불어닥친 민주화의 열풍, 군부 출신 당선자인 자신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과 여소야대의 압박을 고스란히 전임자 전두환에게 전이시켰다. ‘5공 청산’이라는 야당과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고 국정 운영 전반을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다. 5공 세력 중 전두환 직계를 숙청하고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과 김종필로 대표되는 산업화 세력에게 일부 지분을 나눠줘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런 점에서는 노태우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가 김영삼이다.민주 투사에서 거대 여당이자 군부 세력이 주류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변신해 집권한 그는 3당 합당의 원죄, 군부 정치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야당과 국민의 요구가 커지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하나회 해체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명분과 실리가 가장 완벽하게 일치한 장면이다. 문민정부는 5·18의 계승자임을 자임했다. 질주하는 문민정부 열차에 다수 보수세력은 슬그머니 무임승차했다. YS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과속에 반발해 이탈한 일부 보수세력도 역사의 반동 방향이 아니라 DJ 쪽으로 결합해 수평적 정권교체에 일조했다. 노무현은 전국 정당화,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해소, 3김 정치의 완전한 청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들은 자기 기반과 인재풀을 변화시키고 늘려나갔다. 노태우는 군 출신 대신 박철언·정해창·김종인·사공일·현홍주 등 세련된 정무 감각과 국제적 시야를 갖춘 엘리트 테크노크라트를 전진 배치했다. 이들은 경제와 외교 양면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김영삼은 민정계 일부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재오·김문수·정의화·홍준표 등을 정치판에 데뷔시켜 새 판을 짰다. 노무현은 86그룹을 대규모로 내세워 정치권의 연령대를 낮추고, 김진표·이용섭 등 중도 보수 성향의 관료를 끌어안았다.
선혈이 낭자했고 배신자라는 원성이 쏟아졌고 때로는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대통령들은 미래의 비전과 과거 청산을 잘 버무렸다. 어제의 동지를 쳐내는 대신 적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속받은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 연합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이너서클이 만들어지고 측근과 친인척들이 발호하는 부작용이 없진 않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과(過)보다 공(功)이 앞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일단 지금까지만 보면, 과거 대통령들과 많이 다르다. 여당을 자기 당으로 만든 것만 똑같다. 내세운 특별한 명분이나 가치가 없다. 문재인 정부 적폐 청산, 외교 방향 전환 등이 전 정부와 차별점이지만 여당 재편과는 관련 없다. 야당이 발목을 잡으니 여당을 일사불란하게 재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긴 했다. 그런데 이른바 3대 개혁이라는 노동·교육·국민연금에 대한 정부의 개혁안이 뭔지는 총선 때까지 불분명했다. 인재풀에는 비선만 보일 뿐이다. 이태원 참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총선 패배 직후 비서실장 물망에도 올랐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의 핵심 인물인 당시 오영주 외교부 2차관은 중기벤처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대통령실 내에서조차 비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정부나 대통령실뿐 아니라 여당 재편도 심각했다. 이준석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당대회 와중에 나경원, 안철수까지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영남 출신 김기현을 대표로 세워선 역부족일 것이라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쏟아졌지만 대통령과 가깝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은 “어차피 총선은 대통령 얼굴로 치르는 것이다” “존재감 없는 인물이 당대표가 돼야 한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그리고 총선 기간엔 윤 대통령 자신이 후원한 것이나 다름없는 20년간 손발을 맞춰왔다는 검사 출신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벌인 갈등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나마 유사한 사례다. 당시 여당 대표 김무성은 박근혜에게 ‘패싱’ 당하거나 압박당했고, 대통령과 정책적 차별성을 바탕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원내대표 유승민은 아예 여당에서 축출됐다. 박 전 대통령은 여당의 자생적 노력을 돕지 않았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아예 용납하지 않았으며 방해했다. 유신 정권 시절 후계 구도를 언급하다 축출당한 윤필용 수경사령관처럼 여긴 것이다. ‘자기 정치’라는 단어가 주홍글씨처럼 여겨진 것은 박근혜 정부 때와 윤석열 정부 때가 똑 닮은 꼴이다. 그래서 두 대통령 모두 자기 임기 중 치러진 총선에서 패배했다. 성적표는 윤 대통령의 것이 박 전 대통령의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직에 오른 역대 대통령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 [동아DB]
인기 없는 대통령과 2027년 대선
총선 이후에도 윤석열과 박근혜는 닮은 꼴을 유지할까. 8년 전 박근혜는 총선 이후에도 당에 대한 장악력을 강력히 유지했다. 이른바 공천 학살과 영남권 대승 덕에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내 친박 비중은 더 높아졌다. 총선 패배 이후 당내 비박계의 혁신 시도는 친박계 초재선 의원들의 집단행동에 의해 좌절됐다. 대신 친박계가 옹립한 경북 청도 출신 원로 법조인 김희옥이 혁신비대위원장직을 맡아 전당대회를 치렀다. 그리고 전당대회에선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지낸 친박 중의 친박 이정현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당대표 이정현은 전대 직후 청와대 오찬에서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여당은 박근혜 대통령께서 이끄시는 이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집권 세력의 일원으로 책무를 다하겠다. 당·정·청이 완전히 하나, 일체가 되고 동지가 돼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여당은 자생력을 키우기는커녕 민심과 점점 멀어지면서 청와대에 종속됐고, 미르·K재단이 수면으로 올라오자 마비 상태에 접어들었다. 여당 대표 이정현은 국정감사를 보이콧하고 본인이 직접 단식에 돌입했지만, 여당의 국회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민심만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최순실의 이름이 나왔고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선 이후에 윤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만 한 장악력을 유지할 순 없을 것 같다. 좋은 방향이든 좋지 못한 방향이든 일사불란하게 당과 지지층을 내몰 힘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윤 대통령은 총선 이후 한 달 동안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은 총선 직후 홍준표 대구시장과 비공개 만찬을 했고 홍 시장은 그 직후부터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대한 무차별 저격을 지속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 총선 참패에 대한 한 전 위원장의 책임론이 희석되고 지지율이 오히려 반등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인기 없는 대통령’과 차별화하려는 것이 여권 차기 주자들의 속성인데, 오히려 대통령이 알아서 차별화를 해주고 있는 격이다.
이재명 대표와 영수 회동 이후 ‘비선 논란’과 ‘후일담’은 점입가경이다. “소모적 정쟁이 아니라 생산적 정치로 가면 이 대표의 대선에 도움이 될 것” “이재명의 대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대통령실에 안 쓰겠다”는 식으로 대통령이 이야기했다는 보도는 대통령에 대한 여당 지지자들의 정을 떼기에 충분하다. 정권 재창출이 아니라 야당 대표와 ‘딜’을 통해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 한다는 의심까지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적 여소야대라는 총선 결과, 점점 독특해지고 예상이 어려워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스타일, 야당의 1극이라는 위상과 사법 리스크가 공존하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 대통령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지지율이 오르는 한동훈 등 여권 차기 주자들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참으로 이상한, 예측이 어려운 차기 대선 레이스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아니 정상적 대선이 치러질지도 장담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