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호

南北 주도 남북관계 時代, 당분간 오지 않는다

[이근의 텔레스코프]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4-06-0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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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戰 이후 4단계 거친 남북관계

    • 냉전 종식 시기, 그때 對北 경협 더 했더라면…

    • 햇볕정책, 사실상 無효과

    • 기존 남북관계 틀 넘어 ‘선진 강대국’ 관점 필요

    휴전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50분경 미 제7보병사단 31연대 D중대 박격포 분대 장병들이 철원 근방 고지에서 마지막 포탄을 발사하고 있다. [동아DB]

    휴전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50분경 미 제7보병사단 31연대 D중대 박격포 분대 장병들이 철원 근방 고지에서 마지막 포탄을 발사하고 있다. [동아DB]

    6·25전쟁 이후 남북관계는 3단계로 이어졌다. 군사적 대치 및 체제 경쟁이라는 첫 단계를 거쳐 냉전 종식이 시작된 1980년대 후반부터 관여정책 및 햇볕정책의 단계로,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북한 비핵화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제3단계다. 지금은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을 분기점으로 해 핵전력을 보유한 북한과 향후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4단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남북관계의 흐름을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1953년 휴전 이후 남북관계는 민족의 적대적 분단이라는 하나의 단층선과 냉전이라는 또 하나의 단층선이 중첩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적대적 분단은 남북이 군사적으로 서로를 무력 통일할 수 있다는 잠재적 불안을 만들어놓았고, 민족통일이 남북한의 최우선 국가적 과제로 놓여 있는 이상 상호 간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게 된다.

    이에 더해 냉전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의 경쟁은 서로를 자신의 체제로 흡수해 통일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불안을 만들었다. 즉 우월한 체제가 열등한 체제를 흡수하는, 한쪽은 살아남고 다른 한쪽은 사라지는 흡수통일의 우려를 낳은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남북한은 민족통일이라는 과업과 일방적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비경쟁·체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南, 北 스스로 무너지리라 오판… 흡수통일 기회 놓쳐

    이러한 군사적 대결과 체제경쟁은 냉전이 종식되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은 친일 잔재를 청산했다는 명분, 그리고 사회주의 고도성장이라는 업적을 선전하면서 남북 대결에서 우위를 점해왔다. 북한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정말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차치하더라도 동원 체제에 기반한 사회주의 경제성장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면 당시 남한의 서민들에게는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한민국도 고속 경제성장을 했지만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추월한 것이 대략 197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듯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남한이 북한의 이른바 ‘매력 공세’에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더해 북한은 외세가 주둔하지도 않으며 친일 잔재도 청산한, ‘자주 독립국가’라는 정통성을 내세웠기에 외세인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군부정부 남한이 체제 선전에서 북한에 쉽게 우위를 점하기는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가 되며 냉전 종식과 함께 체제경쟁이 끝났다. 이에 남북 대결은 군사적 경쟁만 남게 됐다. 냉전 종식은 사회주의 체제가 더는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므로 만약 북한 체제가 국제적 흐름을 탔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할 수 있었고, 남북한 경제교류 증가와 함께 상호 시장 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

    경제적 통합은 당연히 군사적 대결도 완화하게 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흡수통일을 할 수 있는 천금과 같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신감을 가진 남한과 수세적 북한이 맺은 합의문이 몇 개 있다. 바로 1991년 남북한 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그리고 1994년 미국과 북한 사이에 맺은 ‘제네바 합의’다.

    1992년 2월 17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남북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1992년 2월 17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남북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이 세 개의 합의 가운데 특히 기본합의서는 남북 간 상호 교류를 활성화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호불가침·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군사적 측면에 방점을 둔 합의다. 즉 냉전 종식의 흐름에서 북한이 남한에 의한 인위적 흡수를 걱정하지 않는 대신 핵개발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당시 협상 당국의 속내가 명확하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한국 정부는 이러한 합의를 하더라도 북한은 국제적 흐름을 따라 조만간 붕괴하거나 극도로 약화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안심시키고 기다리면 조만간 동서독 통일과 같은 흡수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컨소시엄이 북한의 전력 사정을 개선한다는 명분 아래 북한이 이미 건설한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경수로 원자로로 대체해 준다는 합의다. 경수로는 핵무기 개발에 쓰이는 핵물질이 나오지 않는 원자로로 북한에 대한 전력 지원보다는 핵개발을 중단시키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 합의에 의하면 2003년까지 100MWe급 경수로 2기를 북한에 제공하고 경수로 완공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돼 있다. 그런데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파행하게 된 배경엔 미국과 우리 정부가 북한이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내부 분석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왕왕 나왔다. 즉 한국의 진심은 경수로 건설보다는 북한 붕괴를 기다리는 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대결적 관성이 남아 있던 당시 남북관계에서, 동유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목도한 우리 정부가 북한이 자체 붕괴하면 흡수하겠다는 기대를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북한을 안심시키기 위한 군사적 합의뿐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북한의 시장경제화를 촉진하는 개혁·개방을 국제시장과 연계해 동시 수행했다면 현재 베트남 정도의 시장화가 진행된 북한을 남한이 흡수통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제 정세·시기 모두 잘못 본 ‘햇볕 정책’

    3월 13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탱크병 대 연합부대 간 대항 훈련 경기에 참석해 장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3월 13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탱크병 대 연합부대 간 대항 훈련 경기에 참석해 장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제네바 합의와 북한 비핵화 시도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파행하고 종결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1997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정권을 잃은 보수 정부를 대체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에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증대하는 ‘햇볕정책’ 시대를 연다. 이는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져 비핵화라는 군사적 조치와 남북한 경제통합이라는 경제적 조치가 최소 10년간 이어졌다. 그 이후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도 경제적 통합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를 설정하려는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는 진보 정부를 넘어서서 일정 기간 관성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햇볕정책이 잘 설계된 정책이었다 하더라도 그 추진 시기 면에서 실기(失期)한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햇볕정책을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동시 협력해 북한에 시장경제라는 그물망을 넓게 던지고 들어갔으면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북한이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기에는 체제의 내구력이 상당히 커진 시기였다. 햇볕정책이 추진되더라도 이미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자유화 물결을 통제·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유럽 붕괴는 소련 경제권 붕괴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 경제권에서 분리된 중국·북한·베트남·쿠바 등은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북한이 체제 유지 내구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채택한 것이 2013년이니 햇볕정책이 우리가 원한 만큼 북한과의 시장 통합과 체제 전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 이후 우리의 대북정책은 북한 혹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화두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비핵화 이슈 이외의 남북관계는 거의 ‘올 스톱’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대북정책은 그야말로 정부의 간판 정책이 됐다. 외교정책 대부분의 에너지와 자원이 이 분야에 쏠렸지만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까지 감수하면서 무리하게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감행한 김정은 정권을 비핵화·경제개혁의 길로 이끌 수 있을지 시작부터 의문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 트럼프 정부 초기 북한에 부과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모두 지지했을 뿐 아니라 그 트럼프 정부를 다시 역으로 설득해 정상 간 대화로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하려는 모험을 시도했다.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은 우리 정부의 외교와 정보를 담당하는 수장들이 북한에 가서 구두(口頭)로 듣고 온 것이다. 국제정치에서는 문서로 확약한 것도 종이 휴지가 되는 일이 빈번한데 (앞서 언급한 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제네바 합의 모두 그러한 운명을 겪었다), 우리 정보기관의 수장이 구두 약속에 대한 검증 노력도 없이 그대로 받아서 미국에 전달한 것은 우리 정보기관 역사상 가장 해괴한 일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은 당연히 그 구두 약속에 대한 검증을 요구했고, 북한은 반대로 “최고 존엄의 구두 약속”이라면서 상응하는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南北 각자 운명 결정하는 시절 당분간 오지 않아

    이런 와중에 김정은 정권의 비핵화 의지 유무가 확인된 사건이 바로 2019년 2월 미국과 북한 간 비핵화 협상인 하노이 정상회담이다. 북한은 영변 일대 부분적 비핵화와 북한 경제에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경제제재 해제를 교환하기 위해 하노이까지 기차를 타고 왔지만 미국은 생각한 가설, 즉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크지 않다는 가설이 검증되는 것을 보고 협상을 깼다.

    북한은 협상 카드를 딱 한 장 들고 와서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 중요한 협상을 날렸다. 북한 협상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북한은 핵개발 의지를 감추지 않고 핵무력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치달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남북관계를 리뷰한 이유는 시대 변화와 전략·정책 실기 등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핵무력을 가진 적성국 북한은 대한민국의 미래 국가 비전에서 더는 우리에게 인구·시장·물류·군사력·평화 등에서 자산이 될 수 없다. 북한이 우리를 향한 핵무력을 가지고 있는 한 북한과의 정상적 대화와 교류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북한은 중국, 러시아, 이란이라는 수정주의 대국들과 긴밀히 연결된 수정주의 연대의 일원이 됐다.

    1월 16일 김정은은 “민족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연설했다. 남북관계가 사실상 적대적 두 국가 관계임을 선언한 것이다. 김정은의 북한은 남한보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다른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길로 가고 있다. 경제제재의 구멍도 잘 찾아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남북관계 시각에서 벗어나 수정주의 대국인 중국·러시아·이란과의 연대라는, 더 크고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북한에 접근해야 한다. 한반도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국제질서 전체를 보면서 북한을 함께 다뤄야 한다는 의미다.

    당분간 남과 북이 주인이 돼 서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남북관계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외교는 저 수정주의 연대와 또 그들이 자신들 밑으로 줄을 세우려고 하는 중간 지대에 있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기왕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더 큰 외교’를 해야 한다. 즉 선진 강대국이 돼야 하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한국의 핵무장이 향후 우리에게 어떤 외교안보적 공간을 열어줄 것인지를 다루면서 ‘대한민국 강대국론’ 연재를 마친다. 이후엔 좀 더 현안에 집중한 비판적 글로 집필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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