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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진짜 정치’, 당내 비판 세력 껴안기가 먼저다

[이동수의 투시경]

  •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입력2024-05-2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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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는 의견 다른 사람 얘기 듣고 설득해 조정하는 것

    • ‘로열 로더’ 윤석열 대통령의 위험천만한 초보운전 2년

    • 집권여당 컨센서스 없는 대통령-제1야당 대표회담은 공허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영수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영수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4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전화 통화한 직후 참모들을 모아놓고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라는 뜻을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총선 참패로 나타난 민심을 받들고 독선·불통으로 고착화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하는 대통령”을 선언한 그를 바라보는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국민이 ‘우리 대통령이 달라졌어요’라며 환영해 주길 바랐겠지만, 현실에선 “그럼 지금까지는 정치를 안 했다는 거냐”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소식이 전해진 직후 실시된 4월 넷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도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의 긍정·부정 응답은 한 주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긍정 응답은 23%에서 24%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이었고, 부정 응답만 68%에서 65%로 소폭 감소했을 뿐이다.

    정치는 선과 악 대결 아니다

    “대통령이 돼 가지고 지금까지 정치를 안 했다는 것이냐”라는 볼멘소리가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버나드 크릭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해서 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정의했다. 크릭은 정치란 결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며, 자기만의 이상을 고집하는 것은 타인의 이상을 훼손할 수 있기에 ‘타협점을 찾는 노력’이 정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는 정치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대립을 조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활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정치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걸핏하면 진행된 압수수색과 카르텔 비판, 지난한 야당 대표 수사가 모자이크처럼 윤석열 정부 2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의대 증원 문제도 처음엔 전공의들을 카르텔로 몰아붙이고 2000명 증원을 고집하다가 선거가 임박해 여론이 나빠지자 협상의 여지를 열었다. 이번 정부 들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라는 표현은 그간 한국 정치가 어떤 성격으로 변모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집권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윤석열 대통령에게선 검찰총장 물이 덜 빠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윤 대통령은 1991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1994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부임한 이래 27년을 검사로 살았다. 정치 경력은 그 10분의 1쯤 된다. 현재 정치권에서 이름이 거론되는 주요 정치인 중에 윤석열 대통령보다 정치 경력이 짧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내려놓고 그해 7월 국민의힘 입당을 전격 선언했다. 4개월 뒤 제1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다시 4개월이 지난 2022년 3월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검찰총장 옷을 벗고 대통령이 되는 데까지 겨우 1년이 소요됐다. 스타크래프트 등 e스포츠 세계에서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단번에 우승까지 거머쥔 프로게이머를 ‘로열 로더(royal roader)’라고 한다. 연예계로 비유하자면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받는 것쯤 되는데, 평생 도전해도 국회의원 한 번 못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정계에서 윤 대통령처럼 출마하자마자 대통령이 된 ‘로열 로더’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로열 로더’는 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결국 신인이다. 신인은 업계에서의 경험이나 인적 네트워크가 구관(舊官)들에 비해 취약할 수밖에 없다. 기반이 취약하면 외연 확장을 도모하기 어렵다. 집토끼도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산토끼를 잡으러 갈 수 있겠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이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의 묘를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수십 년 정치 생활에서 다져진 확실한 지지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3김에겐 상대에게 내줄 걸 내주더라도 본인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민의힘에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그런 기반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입지가 불안정한 정치인은 그걸 다지는 데 정치적 자원을 소모한다. 말 안 듣는 당대표를 무리하게 쫓아내고, 자기편 아닌 사람의 당대표 출마를 온갖 방법으로 찍어 누른 행위는 그런 콤플렉스의 발로였다. 그때 너무 많은 정치적 자원을 쏟아부은 탓인지, 윤석열 대통령은 그 당시 추락한 지지율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기성 정치권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인식도 가미됐다. 20년 넘게 특수통 검사로 살며 부패한 정치인을 여럿 봐왔을 그는, 정치인이라는 직업군을 향한 불신과 환멸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 예로 대선을 앞둔 2021년 12월 29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경북지역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정치인들은) 전문가가 들어오면 자기들끼리 해 먹는 데 지장이 생긴다”며 “무식한 삼류 바보들을 데려다가 정치를 해서 나라 경제, 외교, 안보를 전부 망쳐놓았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초창기 대통령실 인사에서도 정치인이 아닌 검찰·전문가 출신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경제관료 출신의 김대기 비서실장을 비롯해 복두규 인사기획관(전 대검 사무국장), 윤재순 총무비서관(전 대검 운영지원과장), 강의구 부속실장(전 검찰총장 비서관), 이원모 인사비서관(전 대검 검찰연구반) 등이 대표적이다. 기성 정치권을 바라보는 윤 대통령의 불신과 취약한 정치 기반이 어우러져 만든 결과였다.

    정치 신인으로 채워진 대통령실

    정치는 진입장벽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단히 전문적 영역이다. 고려해야 할 것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정치는 법학(제도), 경제학(민생), 심리학(여론) 등 각종 학문의 총체적 집합이다. 어지간한 경험을 갖추지 않고선 이들 사이의 조율을 꾀하기 어렵다. 상대를 대할 때 요구되는 일종의 정치적 프로토콜도 존재한다. 역사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초보들은 그런 프로토콜을 간과하기 일쑤다. 그들이 운전대를 잡으면 위험천만한 곡예 운전이 펼쳐진다. 대통령 부부가 2022년 9월 8일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까지 갔다가 교통체증을 이유로 급작스럽게 조문을 취소한 사실이 그랬다. 영국 당국이 사전에 안내했음에도 대통령실이 이를 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어이없는 실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심지어 대통령실은 공식 SNS에 올린 여왕의 이름도 잘못 기재했다. 2023년 12월엔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앞두고 네덜란드 정부에 무리한 의전을 요구했다가 최형찬 주네덜란드 한국대사가 상대 정부로부터 초치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자잘한 외교 결례 논란은 셀 수 없다. 국제행사에 가서 약속을 못 잡아 ‘혼밥’만 먹다 온 대통령은 있었어도,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외교적 물의를 빚은 대통령은 윤 대통령이 처음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신인이지만 동시에 최고의 위치에 있는 까닭에 기존의 정치적 관행과 관례를 존중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취임 2년이 다 돼서야, 그것도 총선에서 참패하고 나서야 야당 대표와 만나고 걸핏하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들이 그렇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재의요구권(거부권)은 일종의 ‘핵 단추’처럼 여겨졌다. 야당과의 전면전 선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영삼부터 문재인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은 모두 합쳐 9번의 거부권만 행사했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한 적조차 없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불과 2년 만에 그 여섯 명이 행사한 것과 같은 횟수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양곡법이나 간호법같이 대화로 풀 수 있는 법안마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반박한다. 그렇게 치면 야당이 200석을 넘기고 “마음에 안 든다”며 멋대로 대통령을 탄핵하려 해도 비판할 수 없다.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원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정치권에 발 담근 적 없던 윤석열 대통령으로서는 그동안 이어져 온 정치적 컨센서스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컨센서스의 파기가 정치 양극화를 심화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유권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강 대 강으로 맞붙는 정치 구도에선 국민의힘이 무조건 불리하다. 지지층 인구구조나 지역 기반 모두 열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무너뜨린 정치적 컨센서스를 회복하지 않는 한, 핵심 지지층만 지지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정당의 잃어버린 유산

    과거 보수정당의 강점은 ‘레거시(legacy·유산)’였다. 이합집산이 심한 민주당계 정당에 비해 보수정당은 3당 합당 이래 꾸준히 단일 정당을 유지해 오며 인적 자산과 경험의 축적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에서 이회창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보스들은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당내에선 쇄신을 단행하고 밖으로는 상대방과 대화에 나섰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의약분업의 출구를 연 건 그 결실 중 하나였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2016·2020·2024년 세 번의 총선에서 보수정당은 이합집산과 당명 변경을 거듭했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단일 대오를 유지하며 몸집을 점점 불리고 있다. 보수정당은 자신들의 가장 큰 강점이던 ‘사람과 노하우의 축적’을 스스로 갉아먹었다. 이명박 대통령 땐 친박 학살 공천으로, 박근혜 대통령 땐 “배신의 정치 심판”으로 그 과정에서 미래 자산이 모두 소진됐다. ‘배신의 정치’ 프레임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이 대표적 사례다. 2015년 이른바 시행령 파동 이후 새누리당에는 친박이라는 공통의 유전자를 공유한 정치인들만 남게 됐는데, 2016년 국정농단 사태가 발생하면서 그들의 기반이 모두 무너져버렸다.

    친박에게 내쳐진 사람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당내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국민의힘은 결국 대권주자를 외부에서 수혈해야만 했다. 그게 한때나마 문재인 정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윤석열 검찰총장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권을 거머쥔 게 어느덧 2년, 국민의힘에 입당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을 그 시간 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보수정당 리더들의 과오를 답습했다. 당의 ‘레거시’를 무시하고 다 갈아엎겠다는 식으로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을 자기중심으로 재편하려 한 게 그렇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관행과 규율도 함께 무너져버렸다. 윤 대통령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취약한 정치 기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승돼 온 인적 자산과 노하우를 갈아엎으면 다음 대선에서 또다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외부에서 새 인물을 데려와야 할 것이고, 그게 반복되면 5년마다 컴퓨터 포맷하듯 당 시스템도 초기화될 수밖에 없다.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라는 발언이 전해진 이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영수 회담이 열리고 국민의힘이 이태원특별법에 합의한 변화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치는 야당과만 하는 게 아니다.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 눈치 보면서 원내대표 선거에 출사표를 내지 않았던 장면은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과연 바뀔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진짜 정치’는 당 내부에서 시작돼야 한다. 대대로 계승돼 온 당의 인적 자산과 경험을 존중하고, 정치권에서 통용돼 온 컨센서스를 지키는 것이 시작이다. 당내 비판 세력도 껴안지 못한다면 이재명 대표를 백번 만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동아 6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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