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국회의원, 業의 성격 닮아 있어
의료 현장 이야기 전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일
개혁신당에 대한 믿음·애정, 점점 깊어져
이준석은 ‘합리적 알고리즘’ 장착한 정치인
종군기자 꿈꾸던 모범생, 부모 권유로 의대 진학
포도송이 같은 발가락에 반해 소아청소년과 行
소아과 포기 내몰린 현실에 회의감 느껴
각계 전문가 국회에 많이 들어오는 게 진정 국민 위한 길
[영상] 이주영 개혁신당 국회의원 의원
꿈이 뭐냐는 물음에 항상 ‘기자’라고 답했다. 초등학생 때 TV 속 걸프전을 취재하는 기자를 보며 종군기자를 꿈꿨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영화와 음악 잡지도 종류별로 사 볼 정도로 세상을 알아가는 일이라면 흠뻑 빠졌다. 뼛속까지 문과라 믿었던 딸에게 아버지는 슬그머니 의대 입학 원서를 내밀었다. 다니던 외고에 여자 동급생 대부분이 의대에 지원하던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렇게 종군기자를 꿈꾸던 그는 뜻하지 않게 의대에 진학했다.
전공을 정할 무렵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아응급실 인턴 시절, 아이의 발을 잡고 있다가 매끈하고 통통한, 갓 달린 포도송이처럼 동그란 발가락에 반했다. 첫째를 낳고 엄마가 됐고, 둘째를 낳던 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됐다. 셋째를 낳은 뒤부터 소아응급실 의사로 일했다. 소아응급실은 생사고락이 공존하는 무대였다. 매일 여러 아이와 부모의 극적인 순간을 목도했다. 어떤 날은 기쁨과 안도가 교차했고, 어떤 날엔 답답해 울화통이 치밀기도 했다. 고된 일상에도 아이들을 치료한다는 보람에 그의 삶은 햇살 좋은 낮처럼 내내 환했다.
개혁신당 비례 1번으로 22대 총선에 당선, 초선의원으로서 4년간 의정 활동을 펼칠 예정인 이주영 의원은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의정 갈등이 봉합되는 데 역할 하겠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비례 1번의 무게
천직이라 여기며 다니던 일터를 저버리는 건, 애초 그의 계획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의료 현장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보호자의 불신과 소송이 일상이 되던 때에도 그는 끝까지 버텼다.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비슷한 나이대 동료들은 서로가 소아응급실 사수의 저지선이 돼줬다. 2023년 3월 소아청소년과 폐과 선언이 나올 때도 현장을 지켰다. 10년 근무 경력을 뒤로하고 올해 2월, 그가 결국 의사 가운을 벗은 건 의지했던 동료들이 하나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정과 삶이 있었기에 누구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에서 하나의 챕터가 끝났을 뿐이었다.정확히 석 달 뒤,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이번에도 ‘되겠다’는 강한 의지보다는 주변 권유가 먼저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동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둔 개혁신당 이주영(42) 의원의 이야기다.
이 의원은 1982년 대구에서 태어나 동국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거쳐 소아응급의학 세부전공의로 일했다.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전문응급센터 교수로 10년간 근무하다가 2월 퇴사 후 개혁신당에 입당, 3월 20일 비례대표 1번에 이름 올렸다. 비례대표 2번에 배정된 천하람 후보와 함께 공동총괄선대위원장 직책을 맡아 선거운동 내내 발로 뛰었다.
총선을 치르고 한 달 뒤 이 의원을 서울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아직 일이 바쁜 건 아니지만 완전히 새로운 일을 배우는 과정이라 정신이 없다. 아이들은 ‘엄마가 매일 집에서 잠을 자는 건 좋은데, 아침마다 나가는 건 싫다’고 한다. 응급실은 당직제라 24시간 근무하면 오프 때는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아직 적응을 못 하는 것 같다”며 빙긋 웃었다.
이 의원이 출마 당시 주목을 받은 건 의사 출신이라는 이력에 앞서 소속 정당 때문이었다. 이준석 대표가 국민의힘을 나와 독자적으로 세운 개혁신당의 비례대표 1번. 결과적으로 이준석·천하람 의원과 함께 국회 입성하게 되는 성적표를 받았지만, 그는 “우리 당에서 한 명만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건 이준석, 두 명이라면 천하람까지라고 생각했다. 셋 다 당선되던 순간 ‘이 당은 이제 살겠구나’ 싶었다”며 그날을 회상했다.
당선되리란 예측은 일찌감치 하지 않았나요.
“주변에서 비례 1번은 3% 넘으면 될 거라고 했어요. 당선 가능성만 보면 제가 제일 높았죠. 사실 제 당선 여부는 저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1번인 내가 안 되면 아무도 안 되는 거구나. 나는 꼭 돼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선거운동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죠. 두 번째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천하람 후보였어요. 이준석 대표의 당선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던 상황이었죠. 개표 당일 이준석 대표 당선 확정 소식이 떴을 때 눈물이 날 뻔했어요. 빗속에서 뛰고, 100개 단지를 다 뛰어다니고…. 선거운동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옆에서 봤으니까요. 이 대표 당락에 따라 개혁신당에 힘이 걸리는 정도는 천지 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당선보다 이 대표 당선 소식이 더욱 기뻤습니다.”
불과 석 달 전까지 의사였다가 국회의원으로 이직하게 됐어요. 업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데, 정치에 발을 들여 보니 어떤가요.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병원도 비슷했어요. 어떤 일이 주어지면 스스로 빨리 배워서 결과를 내야 했죠. 모든 환자의 케이스가 다르니까 늘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했어요. 정치도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배우고, 주변에 도움을 구하고, 함께 해나간다는 점에서 닮아 있어요. 다만 의사는 처음엔 동료 의사, 간호사와 환자 상태를 공유하고 마지막에 주치의가 홀로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해요. 반면 정치는 개인으로부터 발화된 생각을 확장하고, 설득을 통해 주변 동의를 얻고, 마지막에 일을 추진할 때는 많은 이의 마음이 모인 상태여야만 가능하죠. 그런 점에서 반대되는 성격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그런 과정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의원, 선배 정치인을 통해 배우며 민의를 잘 반영해 보고자 합니다.”
이준석과 올바른 알고리즘, 그리고 방향성
이 의원은 출마하기까지 고민이 깊었다. 그가 쓴 칼럼과 지난해 11월 출간한 책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를 접한 여러 정당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다. 일언지하에 거절만 하던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의사 출신인 박인숙 전 의원이 말이었다. 소아심장학 부문에서 국내 1위로 꼽혔던 그는 19·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박인숙 전 의원의 어떤 조언에 출마를 결심하게 됐나요.
“소아 의료에서는 위대한 롤모델이죠.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분이고, 자녀도 저처럼 세 명이어서 동질감을 느꼈고요. 제가 고민을 말하니 교수님께서 ‘의료 현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의사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라는 취지로 조언해 주셨죠. 당시 저는 계획 없는 채로 병원을 그만둔 상태였어요. ‘더는 소아의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좌절감, 저의 20년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감정에 빠져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교수님 말씀이 ‘이 일은 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들렸어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입당한 건 아니에요. 정당의 일원으로서 현시점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시작한 겁니다.”
여러 곳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는데 왜 개혁신당이었나요.
“교수님 면담 이후 뉴스 검색을 하면서 정치 현안과 정당에 대해 찾아봤어요. 이준석 대표의 창당 과정, 개혁신당이 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들어왔어요. ‘만약에 정치가 내 인생에 들어온다면 여기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당했죠. 정치에 대한 편견이 선거운동 기간에 지역구를 돌며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여러 기성 의원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이 바뀌었어요. 저희가 참 열악한 환경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지도부와 당원들이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 전부 진심이구나. 적어도 누가 돼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됐어요. 선거 끝나고 개혁신당에 던져진 100만 표라는 숫자를 보면서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금 느꼈고요. 남편도 의사인데 우리가 병원에만 있으면서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당이 제대로 나아간다면 우리나라 정치의 미래가 새로운 장을 맞이할 수 있겠다’ ‘아이들에게도 정치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했죠. 개혁신당에 대한 애정은 점점 깊어지고 있어요.”
이준석 대표에 대한 평가가 분분한데, 곁에서 지켜본 이 대표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직접 만나기 전에는 재기발랄하고 외향적인 줄로만 알았어요. 가까이서 보니 혼자 생각에 잠길 때가 많고, 머릿속에 알고리즘이, 플로 차트가 돌아가는 게 보이는 듯했어요. 어떤 계산이 개입되지 않고,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맞는데?’ 이런 종류의 알고리즘이 돌아가는 느낌이었죠. 알고리즘은 오류수정의 가능성이 중요한데 ‘아니오’라고 했을 때 언제든 화살표를 꺾어 수정할 수 있는 좋은 순서도를 장착한 사람이구나 싶었고요. 일도 두세 가지를 동시에 바쁘게 하는데 방향성이 있고, 그렇기에 다른 당에 대해서도 맥락 없이 비난하지 않더라고요. 의사 출신으로서 ‘애매한 정치 철학보다는 올바른 알고리즘과 방향성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준석 대표에게 점점 더 확신과 신뢰를 보내고 있어요.”
4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개혁신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이주영 의원(왼쪽)이 이준석 대표, 천하람 의원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명감 넘치던 소아청소년과 마니아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로 조리 있게 대답하는 모습이 국회의원이라기보다는 환자 상태의 경과를 전하는 대학병원 교수에 더 가까웠다. 말의 수위도 대개의 정치인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데 반해, 그는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닿을까를 고심하며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듯했다. 꼿꼿하게 편 허리와 속까지 뚫어보듯 빤히 들여다보는 눈,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가 어떤 일생을 살아왔을지 짐작게 했다.어린 시절 모범생이었을 듯합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을 것 같기도 하고요.
“외고를 나와서 그 정도로 성적이 좋지는 않았어요. 전 사실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어요. 책 읽기를 좋아했고, 영화와 음악 잡지는 종류별로 다 사 봤고, 피아노도 오래 쳤어요. 좋아하는 영화도 고1 때까지는 주말이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고요.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었는데 가정형편상 그러진 못했고요. 그래서 더 책과 영화에 몰두했고, 자연스레 작가나 감독, 기자를 동경하게 됐어요.”
의외로 어릴 때 꿈이 의사가 아니라 기자였다고요.
“고3 때 의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전까지 제 꿈은 항상 기자, 종군기자였어요. 당시 걸프전이 있던 시대였고, 종군기자라는 직업이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왔죠. 이후로는 백지연·신은경 아나운서를 보며 앵커를 꿈꾸기도 하고,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는 건 어떨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항상 문과였어요. 우연히 아버지가 ‘변호사가 되더라도 의대를 나와 사시를 치면 경쟁력이 있다’고 하셔서 원서를 쓰게 됐어요. 의대가 6년인지도 모르고 들어갔어요. 의학 공부가 재미있다기보다 대학 생활이 즐겁다 보니 재수를 하려다 포기하고 쭉 공부한 케이스예요. 저희 학번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좋은 친구들, 선후배들과 공부하며 크게 고민하지 않고 살았어요. 의사로서 사명감보다는 ‘Do no harm’이라고 ‘환자 몸에 나쁜 걸 하면 안 돼’라는 걸 늘 배웠던 기억이에요.”
2000년대 후반에 서울아산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한 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선택했어요. 당시에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 외과를 지망했어요. 언제나 최선일 수 없지만 최선을 향해 가는 수술 과정이 멋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래 서 있으면 쓰러지는 미주신경성실신이 있어서 참관하다가 두 번 쓰러지는 바람에 포기했어요. 인턴 때 소아응급실에서 아기 발을 잡고 있었는데 포도송이처럼 동그란 발가락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이걸 평생 보면 축복이겠다 싶었죠. 첫 환자가 소아암환자, 처음 떠나보낸 환자도 중학생 백혈병 환자였는데, 환자 한명 한명과의 관계에서 배워가는 것이 사명감이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나를 봐주는 보호자들의 눈을 보고, ‘우리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을 보며 사명감을 갖게 됐죠.”
이 의원이 소아청소년과를 지망하던 2009년까지만 해도 지금의 소아청소년과를 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른바 ‘소아청소년과 마니아’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 역시 소아 환자들을 진심으로 대하던 소아청소년과 마니아였고, 2013년 소아응급실에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몸이 고될지언정 일은 정말 즐거웠다고 한다. 전공의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환자·보호자·의사가 서로 신뢰하며 병마와 싸워나가며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공고하던 신뢰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사건이 2017년 12월 일어났다.
“한국 의료계에 아주 상징적인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죠. 그 이후로 소송 자체를 많이 하는 분위기가 됐어요. 소송이 많아진다는 건 민원은 10배, 20배 늘어난다는 뜻이에요. 대부분의 사안이 민원의 구실이 되고, 의사들은 의학적 판단을 했는데도 경과가 안 좋으면 소송부터 걱정해야 했어요. 분명 10년 전에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어요. 어려울 것 같아도 교수들이 ‘한번 살려보자’ 하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외과계 수술하는 교수들이 ‘나는 소아 전공 아니라서 못해’라고 물러서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커졌어요. 그렇다 보니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한테 일이 과하게 몰리고, 민원과 소송을 감수하며 일하게 됐죠. 소아의 경우 기대여명에 따른 기대소득까지 산정하니까 액수도 커요. 잘못이 없더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 여론이 부정적으로 조성됐고요. 결과적으로 소아를 전공한 분들이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현실에 내몰린 거죠.”
사직서를 내기까지
이주영 당시 총괄선대위원장이 선거를 사흘 앞둔 4월 7일 경기 화성을 거리 유세에서 이준석 대표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개혁신당]
사명감으로 버텼는데,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요.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지역의료로서 회의를 느끼는 일이 늘었거든요. 누가 봤어도 어려웠을 상황이고, 그 이상 현대의학으로 방법이 없는, 어느 병원에 갔어도 똑같은 프로토콜로 했을 상황이라는 게 있거든요. 의료진의 그런 결정에 보호자분들이 대놓고 ‘지역병원이라서…’ 라는 말을 하거나, ‘그래도 서울로 갈래요’라고 하는 경우가 시간이 갈수록 늘었죠. 서울로 가면 문전박대당할 가벼운 사안인데도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 사실 저는 서울아산병원에 있을 때나 천안 순천향병원에 있을 때나 똑같은 소아청소년과 의사고, 오히려 지금 더 경험이 많은 의사인데 ‘지역병원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신뢰받지 못하는구나’ 싶어 회의가 컸어요. 사실 중부 전체를 통틀어 저희 병원 의료진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점점 법적 위험이 늘고 정신적으로 일하기 힘들어지면서 동료들이 하나둘 사직하고, 병원 일부가 문을 닫게 됐어요.”
가족들은 의사를 관둘 때에도,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지지해 주던가요.
“남편에게 ‘사직을 할 건데, 앞으로 다시 일할 계획이 없어’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고심 끝에 말하자 남편이 처음으로 ‘이전까지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 지지해 왔지만, 지금 상황에서 당신이 만일 감옥에 가면 우리 애들은 누가 봐. 이제 그만두고 안전한 일을 하면 좋겠어’라고 말하더라고요. 남편은 개업의인데 제가 한번은 ‘당신은 이런 자괴감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여보, 나도 의사야. 당신이 의사 취급 못 받는 거 슬퍼’라고 하더라고요.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남편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도 ‘네가 충분히 생각했겠지’라고 하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다만 정치권이 아무래도 공방이 벌어지니까 다칠까 봐 걱정하시긴 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언론으로 접하던 정치인들 사이에 제가 있고,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니 힘들까 봐 걱정하죠. 아이들은 ‘엄마는 무슨 일을 하려고 국회의원이 된 거야?’라고 물어요. 그 질문이 저에게는 참 본질적 물음이 되더라고요. 앞으로 정치적 행보라는 것이 없을 수 없고, 모두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릴 때도 있겠죠. 적어도 가족들이 물어볼 때 대답할 수 있고, 그 대답에 가족이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싸고 대통령과 의료인 단체의 갈등이 석 달 넘게 이어졌다. 정부도, 의사도 궁극적으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지키고 살려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방법론을 두고 양자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형국이다.
정부는 궁극적으로 필수의료 강화를 목적으로 수도권을 제외하고 공공의료 사각지대인 지방의대 의대생을 증원하기로 했는데, 정부의 방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의료를 확충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취약계층 의료 강화의 방향성은 맞아요. 다만 묻고 싶은 건 정부가 생각하는 ‘지역의료’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거죠. 지금도 빅5병원으로 쏠림이 심하고, 국립 거점 의료병원 원로 교수님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지역의 의대생을 늘린다고 해서 지역의료의 신뢰도가 높아질까요. 그게 가능했다면 지역경제와 지역 교육은 왜 못 살리나요? 지역경제와 교육을 살렸다면 지역의료는 살리려는 노력 없이도 거기서 힘을 갖고 뿌리를 내렸을 거예요. 지금은 지역 인구가 소멸하고, 경제가 힘을 잃고, 의료뿐 아니라 지역 인프라를 지역민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대생만 늘리는 것이 답일까 의문이 들어요.
참 가슴 아팠던 말이 ‘낙수효과’라는 말이에요. ‘의대생 많이 뽑아놓으면 누군가 비인기과에 가겠지, 실력 없는 누군가 가겠지’ 하는 생각과 함부로 뱉는 말들…. 그 말을 쓴 정부, 언론 모두 의도가 나빴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지역병원의 소아응급 의사였던 저로서는 ‘내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는 거예요. 의국 성적 1등인데도 소아청소년과에 온 후배도 있어요. (기자가 놀라자) 보세요. 기자님도 놀라잖아요. 이미 모두가 ‘1등인데 왜 소아과를?’ 하는 생각이 있으니 안 가는 거예요. 내가 역량이 있어도 비인기과를 지망하고, 지역병원에 가는 순간 ‘도태된 의사’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죠. 이런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지역 의대생만 늘린다고 지역의료가 살아나진 않을 거예요. 근본적 해결책 마련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이 의원에게서 욕을 먹을지언정 해야 할 이야기는 하겠다는 결기 같은 것이 엿보였다. 2024년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고민하는 바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초선 의원의 열정도 느껴졌다. 22대 국회에서 이주영 의원의 쓰임이 적지 않을 걸로 보인다.
진정으로 서민 위한 길
이주영 의원. [지호영 기자]
“우리나라 정치의 다양성이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을 비례대표로 이름 올릴 때 저분이 장애인을 더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장애인이 일반인의 삶에 대해 뭘 알겠어?’라는 말은 하지 않죠. 또 기업인이 국회 입성할 때 ‘경제에 대해 잘 알겠지’라고 하지 ‘서민에 대해 뭘 알겠어?’라는 질문은 하지 않잖아요. 유독 의사에 대해서는 선입견이 있죠. 만약 의회가 의료체계 정상화에 기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말 기득권만 의료체계를 이용하는, 결국 서민은 진료 거부를 당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의사뿐 아니라 IT 전문가, 과학기술, 우주항공 전문가들이 국회로 더 많이 들어와야 해요. 국회의 전문성이 확대되고, 전문 영역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길이죠.”
개혁신당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전에 없던 새 정치를 할 걸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개혁신당의 당면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안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당면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조국혁신당과 같이 인터뷰한 적도 있고,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다른 당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올바른 방향성과 현시점에서 실현 가능성 있는 답이 있다면 그 방향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정파에 갇혀 있지 않고 정치적 빚이 없는 당이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 있을 수 있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도 덜 눈치 볼 수 있죠. 양쪽 모두에서 표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어요. 저희는 지지율이 조금 오른다고 정권을 가져올 수 있는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화두를 많이 꺼내서 공론화할 겁니다. 국민들이 화답해 주시기만 하면 양당이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당이 될 거라고 봅니다.”
4년 뒤에 어떤 국회의원으로 평가받기를 바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4년 뒤 이 모든 갈등이 잘 봉합돼 의료계가 정상화하고, ‘하고자 했던 일을 이뤘으니 다시 소아과 의사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 그때 국민들이 ‘근데 너는 한 번 더 해라’고 말할 정도로 ‘좋은 국회의원이었다. 그래서 아쉽다’고 느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때 가서 국회의원 그만하겠다는 것도 실례되는 얘기일 수 있고, 한 번 더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일단 진심을 다해 충실히 일할 것이고, 4년 뒤에는 많은 것이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원으로서 우리나라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나라,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라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이 각자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나가고, 국가는 국가의 미래에 대해 방향성을 가지는, 그런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인과 국가가 함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신동아 6월호 표지
정혜연 차장
grape06@donga.com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나야, 감칠맛
[영상]“‘폭풍군단’ 노림수는 다탄두 ICBM 텔레메트리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