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진보언론 내부고발로 드러난 공영방송의 진실
NPR 기자 “트럼프 당선 후 공정성 무너졌다” 고발
관점 다양성 배척되는 NPR 회사 문화도 비판
[Gettyimage]
트럼프 당선 후 공영방송 급진적으로 변했다?
미 공영방송 NPR. [뉴시스]
“2011년만 해도, NPR 청취자가 살짝 좌파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큰 틀에서 미국을 대변하고 있었다. 청취자의 26%는 자신을 보수(conservative)라고 밝혔고, 23%는 중도, 37%는 리버럴(liberal)이라고 말했다. 2023년,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단지 11%만이 자신이 보수라고 밝혔고, 21%가 중도라고 했다. 청취자의 67%는 스스로를 ‘매우 또는 어느 정도’ 리버럴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보수 청취자만 잃고 있는 게 아니라 중도와 전통적 리버럴(traditional liberals) 청취자를 잃고 있었다.”
벌리너 기자는 전통적 리버럴과 현재 리버럴을 구분한다. 기고문을 읽어보면, 그는 과거 전통적 리버럴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개인의 자유, 인권,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열려 있는 개방성’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면, 현재 리버럴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으로 민주당, 특히 주류 좌파의 이데올로기를 중시한다고 보고 있다.
벌리너 기자는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기점으로 NPR의 공정성이 크게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 등 미국 민주당에 우호적인 메인스트림 미디어들이 트럼프 당선으로 충격과 절망에 빠졌듯 NPR 뉴스룸도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공정한 보도가 아니라 트럼프 정권에 타격을 주거나 트럼프를 끌어내리는 보도로 기울어갔다는 것.
그는 크게 세 가지 사례를 들었다. 2016년 대통령선거 때 러시아가 트럼프 당선을 위해 미국 대선에 개입했고 트럼프 측과 공모했다는 ‘러시아 게이트’ 의혹, 2020년 대선 직전 공화당 성향의 뉴욕포스트가 당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의 차남 헌터의 유출된 e메일을 입수해 보도한 ‘헌터 바이든’ 스캔들, 코로나바이러스의 중국 우한바이러스연구소 유출 의혹 등과 관련해 NPR이 어떻게 보도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NPR은 민주당 확성기였나
유리 벌리너 전 NPR 기자. [Uri Berliner X ]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6년 7월 31일, 연방수사국(FBI)은 비밀리에 러시아 정부와 트럼프 선거캠프 관계자의 연루 의혹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게이트 의혹 보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둔 그해 10월 초 국토안보부와 국가정보국은 힐러리 클린턴 선거캠프 해킹 e메일 유출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다고 확신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선거 과정에서 계속해서 러시아 게이트 의혹으로 트럼프 측을 공격했다. 트럼프 당선 후에는 특별검사를 임명해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트럼프 취임 첫해인 2017년 5월 로버트 뮬러(전 FBI 국장) 특검 임명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트럼프 취임 직후부터 탄핵을 요구했고, 메인스트림 미디어들은 트럼프 측의 공모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애덤 시프 하원의원 등의 주장을 집중 보도했다.
하지만 2019년 3월에 나온 특검 보고서는 탄핵을 요구해 온 진영에는 실망스러웠다. 보고서는 러시아 정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후보에게 유리하고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불리한 정보를 퍼뜨리고, 러시아 정보기관이 클린턴 선거캠프 정보를 해킹해서 유출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트럼프 선거캠프 인사가 러시아 정부와 공모했거나 러시아 정부에 협조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런 내용을 담은 뮬러 보고서는 연방법무부 웹사이트에 공개돼 있다.
벌리너 기자는 러시아 게이트 보도에서 NPR이 민주당의 주장만 확대 재생산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에서 러시아 게이트 전담 의원 역할을 한 연방하원정보위원회 소속 애덤 시프 의원 인터뷰만 수십 차례 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뮬러 특검 보고서가 나온 뒤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보도를 접었을 뿐 그간의 보도에 대한 내부 비판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헌터 바이든 스캔들에 눈감다
벌리너 기자가 거론한 두 번째 사례는 2020년 대선과 관련된 사건이다. 당시 11월 대통령선거 직전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 차남 헌터 바이든 e메일 스캔들이 터졌다. 트럼프 지지를 선언한 뉴욕포스트는 헌터 노트북의 e메일을 입수했다며 그가 우크라이나와 중국 기업에 아버지를 연결해 주는 대가로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바이든 후보의 연루 가능성도 제기했다.바이든 선거캠프 입장에선 선거 직전 터져 나온 대형 악재였다. 바이든 측은 러시아가 개입한 정보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MSNBC 등 민주당 성향의 메인스트림 미디어는 바이든 측 주장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NPR은 다른 언론들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2020년 10월 22일 NPR은 퍼블릭 에디터(NPR Public Editor) 명의 X(트위터) 계정에 ‘뉴욕포스트의 헌터 바이든 기사와 관련해서 왜 NPR이 다루지 않고 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제대로 된 기사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 순전히 소음일 뿐인(just pure distractions) 내용에 청취자와 독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벌리너 기자는 당시 NPR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헌터 노트북은 뉴스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뜨거운 쟁점을 따라가는 취재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내 모임에서 NPR 최고의 언론인이자 공정한 언론인으로 꼽혀온 한 기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NPR이 트럼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헌터 노트북(e메일) 보도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취임 이후 헌터 e메일 보도의 핵심 내용은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벌리너 기자는 “그때라도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 게이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힘든 결정을 하지 않았다(뭉개고 넘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뉴시스]
코로나바이러스 보도의 편향성
벌리너 기자가 언급한 세 번째 사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원인과 관련된 보도였다. 2020년 초기 코로나바이러스 원인을 놓고 중국 우한의 시장에서 팔던 박쥐에서 바이러스가 유출됐을 가능성과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사고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동시에 제기됐다. 그러자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 앤서니 파우치 소장을 비롯한 보건의료 관리들은 연구소 유출설은 음모론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FBI를 비롯한 정보기관도 연구소 유출설이 신빙성이 없다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대통령이던 트럼프의 입장은 달랐다. 2020년 5월 트럼프는 자신이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유출됐다는 확신을 주는 증거를 직접 봤다고 말했다. 다만 기밀문서로 지정돼 있어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당 성향의 주요 언론은 트럼프가 음모론을 퍼뜨린다고 비판했다. 대표적 언론 중 하나가 NPR이었다.
벌리너 기자는 NPR이 파우치 소장을 비롯한 보건의료 기득권 세력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자 여러 명이 연구소 유출 가능성이 높다는 탐사보도를 했지만 NPR은 박쥐에서 유출됐을 거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밝혔다.
벌리너 기자는 우한바이러스연구소 유출설이 사실상 정설이 됐는데도 NPR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2023년 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에너지부가 백악관과 의회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 내용을 입수했다면서 “미국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유출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NPR은 해당 보도와 관련해 ‘연구소 유출 가능성을 높게 보는 근거 자료가 비밀문서로 지정돼 있어 확인할 수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여전히) 과학적 증거는 압도적으로 자연발생 가능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벌리너 기자는 이에 대해 “진실을 추구하는 호기심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중심이어야 할 공영방송 보도가 정치로 인해 얼룩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벌리너 기자의 내부 비판에는 민주당 성향의 최고경영진이 관점을 정해놓고 취재를 지시하는 회사 문화도 포함됐다. 예컨대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NPR은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시스템 차원에서 인종차별에 감염돼 있다는 전제하에 사회를 바꿀 방법을 찾으라는 지시가 당시 최고경영진에서 내려왔다는 것. 관점의 다양성이 배척되는 회사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기고문이 게재되고 논란이 일자 회사 측은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 외부 기고를 했다는 이유로 벌리너 기자에게 5일 정직 처분을 했다. 그는 며칠 뒤 자신이 지적한 NPR의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없는 신임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근무할 수 없다며 사직했다. NPR 일부 기자들은 벌리너 기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사실과 다르게 회사를 비판하며 내부 총질을 했다는 것. 다만 러시아 게이트, 헌터 바이든 스캔들, 코로나바이러스 연구소 유출설 등과 관련한 핵심 내용에 대한 반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미국 전문기자협회(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의 윤리 강령 중 하나는 ‘진실을 추구하고 보도하라’는 것이다. 윤리적 저널리즘(ethical journalism)은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언론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세금을 지원받는 공영언론의 경우엔 더욱 엄격히 적용돼야 하는 항목이다. 정치·사회·경제 모든 분야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편견 없이 정확한 사실을 보도해야 할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보도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묻는 갤럽 조사를 보면, 1972년 68%이던 언론 신뢰도는 2023년 9월 1일 현재 32%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한때 가장 공정한 언론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NPR 청취자 숫자도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8월 퓨리서치센터 분석을 보면, 1주일 평균 NPR 청취자 숫자는 2017년 이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2017년 1120만 명이던 1주일 평균 청취자는 2022년엔 827만 명으로 300만 명 가까이 줄었다.
25년 간 몸담아 온 공영방송을 사직한 중견기자의 내부 비판 기고문은 언론 위기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지금 언론은 공정한가. 하물며 공영방송은 공정한가. 이 시대에 공정한 언론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