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도곡동에 삼성전자 본사 세우려다 타워팰리스 지은 사연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㊾]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증언 ㊦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6-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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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적극 유치한 테일러시, 29년 전 英 윈야드 닮아

    • 건설 비용 41% 보조, 부지 헐값 제공한 英 정부

    • 96년 이건희가 꿈꾼 첨단 전자 복합단지 ‘도곡동 파크’

    • ‘삼성 특혜’ 여론에 결국 타워팰리스 들어서

    • 한남동 리움 미술관 건립 초기부터 관여한 이건희

    • 이건희 회장은 ‘실용주의 사상가’ ‘파괴적 혁신자’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 [조영철 기자]

    4월 15일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현재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에 8조8640억 원(64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이 당초 예상했던 규모보다 세 배가 넘는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화답했다. 공장을 추가로 하나 더 짓는 것은 물론 생산, 조립, 연구개발까지 한번에 할 수 있는 ‘반도체 복합화 단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테일러 공장에서는 최첨단 공정인 4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이하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기술을 가진 삼성이 미 본토에서 생산하게 됐다”며 자국민에게 성과를 자랑하느라 바빴다.

    이번 발표에서 의미심장했던 또 다른 한 가지는 삼성전자가 미 국방부 등 국방·안보 분야와 관련된 부처들로부터 직접 반도체를 ‘맞춤 수주’ 받아 생산·공급한다는 것이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삼성이 미국 국가안보를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가장 예민한 국가안보와 관련한 반도체 칩 제조를 한국에 맡긴 것이다.

    미국은 삼성뿐 아니라 대만의 세계 최고 파운드리 업체 TSMC에도 비슷한 규모의 천문학적 보조금을 지원할 예정인데 이는 첨단 기업들의 기술 및 설비를 본토로 빨아들이겠다는 큰 그림에서 나온 전략이다. 미국은 2030년까지 전 세계 첨단 반도체의 20%를 자국 내에서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삼성이 바꾸고 있는 美 농업도시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이 지난해 7월 자신의 SNS에 공개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 인스타그램]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이 지난해 7월 자신의 SNS에 공개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 인스타그램]

    삼성의 추가 투자로 당장 수혜를 보는 곳은 테일러시다.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만 최소 1만7000개로 추정된다.

    테일러시는 인구 1만6000명 남짓한 소도시로 우리로 치면 경북 영양군과 비슷하다. 주민 상당수는 면화나 옥수수를 키우고 있는데 1인당 소득은 텍사스주 평균 6만2586달러의 절반 정도(3만2719달러)라고 하니 조용한 미국 남부의 전형적 농업도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공장이 건설되면서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를 맞고 있다.

    테일러시의 삼성전자 유치가 공짜로 혹은 저절로 된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부가 그리는 큰 밑그림하에 지방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한 공무원들의 적극성이 있었다.

    라이델 시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성에 ‘노(No)’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말자는 원칙을 정했었다”며 “그들이 주문하는 모든 것에 ‘언제든, 물론 모두 다 가능하다’고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같은 달 한국에서는 이와는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세계 2위 반도체 장비업체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가 연구개발센터를 짓겠다(2025년 완공 예정)며 지난해 8월 매입한 경기도 오산 부지를 국토교통부가 아파트 후보지에 포함시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다. 업무협약을 맺으러 미국으로 가기로 했던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출장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SK하이닉스가 120조 원을 투자해 용인에 세울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 공장도 각종 민원과 규제에 부딪혀 아직 착공도 못한 상태라는 소식이다.

    지난 회에 이어 이승한 홈플러스 창업회장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무려 30년 전 데자뷔가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절대 노를 말하지 않는다’며 외국의 첨단 선진 기업을 유치하려는 테일러시의 태도가 영국 윈야드에 삼성전자 복합단지를 만들 때 이야기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삼성에 구애 올인한 英 정부와 윈야드

    한국 기업의 선진 글로벌 무대 진출과 관련한 산업사(史)에서 영국 윈야드 공장의 의미는 깊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선진 외국의 적극적 투자유치를 통해 공장부터 연구소까지 산업복합단지를 세운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1995년 10월 13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윈야드 공장은 영국 정부의 지대한 관심사여서 엘리자베스 여왕(2022년 작고)이 준공식에 직접 참석해 ‘삼성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축사까지 했다. 이보다 5년 전 일본 후지쓰 반도체 공장이 세워질 때도 여왕은 행사 참석까지는 했지만 축사는 하지 않아 이날 공식 연설을 한 것 자체가 매우 파격적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공장은 영국 정부와 지자체가 한 몸이 되어 삼성에 구애한 결과물이었다.

    윈야드 공장은 1996년 설립돼 10년 가까이 삼성전자의 유럽 공략을 위한 심장 역할을 한 전진기지였다. 가동 1년 만에 흑자를 내 유럽 전체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았었다.

    영국은 물론 대다수 유럽 사람들이 ‘코리아’라고 하면 북한인지 남한인지도 구분 못 하던 시절, 영국 정부와 지자체는 한국의 대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원팀이 되어 뛰었다.

    이승한 전 회장은 윈야드 공장 설립에 처음부터 함께했다고 한다. 그는 윈야드 공장을 이건희 회장의 대표적 상상력인 ‘복합화 상상력’을 구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운을 뗐다.

    “이건희 회장께서 복합화를 내걸며 발신한 메시지는 ‘합치는 것이야말로 미래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같은 융합 시대를 미리 내다본 거라고 할 수 있죠. ‘업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모으는 게 답이다’ ‘빨라야 힘이 된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잖아요. 복합화는 회장님의 미래를 보는 상상력, 즉 미래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해외 생산기지도 복합화하자고 하셨습니다.”

    공장이 윈야드로 결정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유럽의 심장부에 공장과 연구개발센터, 마케팅 교육까지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복합단지를 만들어보자고 하셨어요. 당시 IOC(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이던 사마란치를 배려해 스페인에 세우자는 의견까지 포함해서 여러 나라와 지역을 검토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영국으로 결정이 됐고 노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중에서 윈야드로 결정이 됐죠.

    무엇보다 이 지역 공무원들의 적극성이 여러 면에서 저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공항에 내리는데 정부 관리들이 대거 나와서 리무진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말 최고 국빈 대우를 했으니까요. 만찬을 할 때는 스코틀랜드 주지사, 유력 경제인들, 투자 유치하는 지자체의 에이전트들까지 나와서 공장 건설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합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공장 부지 후보지로 이동했는데 인부들이 ‘SAMSUNG’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중장비들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 미리 한국에서 주문했다는 겁니다. 많은 영국 사람들이 한국 자체를 모르던 시절에 그렇게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려고 정말 열심이었어요.

    다음 날에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아름답고 큰 성에 갔는데 왜 옛날 영화 보면 사진 찍을 때 펑! 하고 터지는 플래시가 있잖아요. 성 앞에 그걸 설치해 놓고 플래시 터뜨려 가며 기념사진 찍어주고 유지들을 다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공장부지 중에는 개인 땅이 있었는데 땅 주인이 뉴캐슬유나이티드라고 하는 축구팀 구단주였어요. 그 양반이 벨기에 경기에 초대해서 요리사가 딸린 VIP실을 통째로 비워놓고 우리를 최고 수준으로 환대했습니다.

    경기 전에 선수단하고 악수도 시켜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치하고 사진도 찍었어요. 나중에 삼성전자 가전 공장이 윈야드로 결정됐을 때 현지 신문에서 대서특필한 게 ‘이건 축구의 승리다’ 이런 헤드라인이 나오더라고요(웃음).

    협상 막바지 윈야드를 떠날 때 배웅 나온 고위 공무원과의 만남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후보지 중 어디로 정할 것인지 궁금해하길래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고 하자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는 거예요. 진심으로 자기 지역의 발전을 생각하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우리나라에도 저런 공무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영국 정부가 제시한 파격적 혜택이었습니다. 보조금이 전체 공장 건설 비용의 41%나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평당 우리 돈 4만 원 정도 되는 땅을 거의 헐값인 5000원 수준으로 제공해 준다고 했고, 진입 고가도로·공장 내 조경·교육훈련비까지 보조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건설에 들어갔을 때는 공무원들이 아예 건설 현장에 상주하며 공사에 필요한 모든 행정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해결해 주는 극진한 성의를 보여줬습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김철수 씨였는데 나중에 저와 만난 자리에서 ‘공사비 대출 이자를 얼마나 냈느냐’고 묻길래 ‘한 푼도 안 냈다’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아니, 그런 시스템을 우리 말로 뭐라고 합니까?’ 하길래 제가 ‘특혜라고 합니다’ 해서 둘이 함께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각 나라가 다 그렇지만 그때 영국 정부는 외국 선진 기업을 유치해서 경제를 살리고 국민 일자리 창출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어요. 사실, 정치란 건 그런 일하는 거 아닙니까.”

    영국 정부 태도에 놀랐던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도 그런 경험이 매우 특별했던 것 같았다.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별도 제목을 달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평당 5000원인 윈야드 단지’라는 글 전문이다.

    1996년 10월 영국 북부에 있는 윈야드의 삼성전자 종합단지 준공식에 갔을 때 정부와 민간단체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은 런던에서 400km나 떨어진 준공식장까지 와서 “이번 준공식은 삼성과 지역사회간 협력관계 이상의 국제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21세기 양국 관계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는 요지의 축사를 해주었다.

    사실 요즘 외국에 가보면 각국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1960~70년대에는 한국도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노력했는데, 요즘은 동남아나 남미는 물론 구미 선진국들이 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외국 기업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외국에 공장을 지어 보면 계속해서 또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우선 토지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도로, 항만 등 인프라까지 책임지고 해결해 주며 인허가 절차도 신속, 간단하다. 또 각종 보조금이 많아 미숙련자 훈련 지원은 기본이고, 심지어 주재원 가족을 위한 개방대학(開放大學)까지 만들어준다.


    착공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윈야드 단지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정부가 전담팀까지 구성해서 담당 공무원들을 직접 현장에 보내 행정 절차를 제때 원활하게 처리해 준 덕분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에서 투자 유치 보조금을 신청하자 담당 관리가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직접 현금을 전달할 정도였다. 어떻게 해서든 공장을 끌어들여 장차 고용과 세수(稅收)를 확보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으로 활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장 하나 짓는 데 얼마나 많은 인허가 절차와 도장이 필요한가. 지구촌 시대가 된 지금은 세계 어느 곳이든 기업 활동을 하기 좋은 곳으로 자본과 기술이 옮겨간다. 이러한 상황에 한국도 많은 외국 기업들을 유치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내 기업들까지 밖으로 나가게 되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중 큰 이유가 공장부지 가격이 한국은 외국과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불리하다는 점이다. 처음 공장을 지을 때 건설비가 비싸게 들면 아무리 경영을 잘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윈야드 단지는 한 평에 5000원가량 들었다. 그런데 삼성이 10년 전 충남 대산에 삼성종합화학단지를 조성할 때는 평당 20만 원 정도 들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비쌀 테니 아마 윈야드 단지를 우리나라로 옮겨 온다면 땅값만 100배 이상 들지 않을까 싶다. 국내 시장을 닫아놓았던 옛날과 달리 이제는 문을 열고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데, 이렇게 땅값이 비싸다면 발목에 무쇠를 달고 달리기 경주를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간에서는 흔히 기업이 부동산 투기를 한다고 하지만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기업이 그 규모를 끊임없이 늘려가려면 토지가 계속 부족하기 때문에 토지를 사고팔아 차액을 남길 이유도 시간도 없다.


    또 항상 증설에 대비해야 하므로 땅을 처음부터 좀 넉넉히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삼성전자가 수원에 40만 평을 공장 부지로 잡았을 때 부동산 과다 보유라고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공장이 비좁아 일부 시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어도 땅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어쩐지 3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 씁쓸함을 준다.

    한편 이승한 전 회장은 윈야드 공장 건설 당시 영국 상공부 장관이던 마이클 헤즐타인(훗날 부총리)과 이 회장이 나눈 재미있던 대화가 생각났다며 소개했다.

    이건희 회장은 메타포의 달인

    “이건희 회장님이 승지원으로 헤즐타인 장관을 초대한 자리에 제가 배석했습니다. 헤즐타인 장관은 윈야드 공장뿐 아니라 미국 월가와 같은 영국의 금융가 ‘시티’도 큰 개발사업을 한다면서 투자 의향이 있는지 물었어요. 그만큼 우리를 좋아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거였죠.

    대화 내내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사업 이야기뿐 아니라 두 분이 관심사를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나왔는데 헤즐타인 장관이 화초(花草) 전문가더라고요. 회장님도 모르시는 게 없으니 대화가 정말 흥미진진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인데 장관이 불쑥 회장님한테 “정치를 하셔도 잘할 거 같다. 생각이 없으시냐”고 묻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 답변하시던가요.

    “당신이 정치가가 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셨어요. 우선은 어릴 때부터 주판알을 갖고 논 사람이라 안 된다는 거였죠. 선친으로부터 보고 배운 게 비즈니스여서 정치는 유전자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친구 중에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란 분은 정치하는 부친(김성곤 회장)의 모습을 보고 자란 사람이라 잘할 수 있다는 거죠. 두 번째 이유는 기업과 정치는 가까이 해서도 멀리해서도 안 되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관계라는 거였습니다. 세 번째 이유가 제일 압권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루 24시간 중에 3분의 2이상을 잠옷을 입고 지내기 때문에 양복이 없어서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다들 식사 자리가 떠나가라 웃었습니다. 저는 그때 ‘아니 회장님이 저렇게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하실 수도 있나?’ 하고 새삼 놀랐습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평소에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비유의 달인, 메타포의 달인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 마음에 쉽게 다가가는 말을 해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깊이 연구했던 분이죠.

    저 역시 보스톤대 연구교수로 있을 때 대기업병을 성인병에 비유해 복잡하고 거대한 조직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했다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는데 메타포 덕분이었습니다. 비유를 하면 메시지가 쉽고 간결해지죠. 핵심에 쉽게 접근하니까요. 저는 이걸 메타포 경영의 힘이라고 보는데 회장님한테 배운 겁니다.”

    그는 또 당시 윈야드 추억에서 회장의 소통 능력을 다른 측면에서 경험한 적도 있다고 했다.

    “윈야드 복합단지 준공식을 할 때 필립 공을 포함해 여왕 가족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따님인 앤 공주가 승마를 좋아하잖아요. 회장님은 미리 이런 걸 아시고 승마 대회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영국이 역사를 중요시해서 박물관 문화가 있다는 것도 참작해서 앨버트 뮤지엄에 한국관을 만드는 것도 지원합니다.

    영국 왕실에서는 ‘삼성은 영국을 배려하고 대접하는구나, 단지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대단히 품위가 있는 회사야’ 이렇게 되는 거죠.

    돌이켜 보면 회장님이 ‘이거 해봐라, 저거 해봐라’ 지시하실 때 ‘왜 저런 지시를 하시지?’ 처음에는 감이 잘 안 올 때가 많았어요. 나중에 결과를 보면 아, 그런 의미와 의도가 있었구나 깨닫지요.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보통 잘 모르지요. 얘기를 잘 안 해주시니(웃음).”

    삼성전자가 윈야드에 들어간 이후 다른 계열사들도 들어갔나요.

    “아니요. 그 사람들 냉정합디다. 1995년 삼성중공업 쪽에서 중장비 공장 투자를 지원받고 싶다고 해서 헤즐타인 장관을 만났는데 단칼에 ‘노’를 하는 겁니다. 이미 카타필러, 스카니아, 고마쓰 등 초우량 글로벌 회사가 들어와 있는데다 삼성중공업이 이들을 능가할 만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삼성전자가 들어올 때는 온갖 특혜와 인센티브를 제공했는데 말이죠. 기업 세계가 냉정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던 경험이었습니다.”

    복합화 구상의 정점 도곡동 마스터플랜

    도곡동 전자복합단지 계획안. [이승한]

    도곡동 전자복합단지 계획안. [이승한]

    이번에 이승한 전 회장 증언에서는 국내 언론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이 있었는데 서울 시내 랜드마크와 관련한 구상이었다.

    “한때 회장님 지시로 삼성의료원 복합화를 기획했습니다. 마침 의료원 맞은편에 삼성 땅이 있었는데 자연 녹지였어요. 건물을 위로 올리는 건 한계가 있지만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건 용적률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하에 병원을 만들어 본관과 이어지도록 하는 복합단지 마스터 플랜을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이뤄졌다면 병원의 현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아쉬웠던 건 도곡동 전자복합단지 개발이었습니다.”

    현재 타워팰리스가 들어가 있는 일대를 말씀하시나요.

    “그렇습니다. 거기는 원래 타워팰리스가 아니라 삼성 본사까지 들어가는 전자복합단지가 설립될 계획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증언이네요.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회장님은 국가 장래를 위해 첨단 전자 복합단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문했어요. 그러려면 우선 땅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희가 서울시 부지 매각 입찰에 참여해 강남구 도곡동 부지 2만2000여 평을 낙찰받았습니다.

    당시 저희 꿈은 컸습니다. 1년여를 매달려 1996년 1월 ‘도곡동 파크 건립 계획안’을 완성했습니다. 연면적 3만2000평에 지상 111층짜리 초고층 건물을 세워 세계 최초 전자디지털 복합단지를 만들자는 거였습니다.

    도곡동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비즈니스 파크로 만들어 전자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가보지 않으면 안 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개념이었지요. 삼성전자 본사가 들어가고 세계 초일류 전자 기업들도 유치하고 전자 쇼를 할 수 있는 전자컨벤션센터, 전자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자도서관, 24시간 운영되는 로펌·은행·병원까지 넣자고 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지금의 양재천 개발도 시동을 걸 수 있었다”고 한다.

    “복합단지 개발을 위한 기부채납 차원에서 양재천 개발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강남구청에 제안해 30억 원가량 투자를 했습니다. 하천 개발을 하려면 일본의 하천 개발 노하우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님들이랑 도쿄도 직접 가보고 심층 연구를 해서 구청 측에 설계안을 냈어요.

    참신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습니다. 수양버들도 심고 물고기가 살 집들을 아파트식으로, 단독주택식으로 따로따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모든 게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양재천 정리의 마중물이 삼성이었다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양재천이 참 좋잖아요. 그때는 사실 너무 정리가 안돼 있었어요. 양재천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된 천변(川邊) 개발입니다. 이후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하천 개발에 뛰어들었으니까요. 대한민국 하천 개발에 효시가 된 셈이죠. 하천에 대한 생각과 문화를 바꾼 겁니다.”

    복합단지 계획은 결국 물 건너 간 거죠.

    “구청에 이어 서울시도 처음에는 허가를 내준다고 했는데 나중에 ‘삼성 특혜’라는 여론이 일어서 무산됐죠. 그렇지 않아도 강남 일대 교통이 복잡한데 체증이 어마어마해질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우리 생각은 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강남으로 출근해야 하니 분산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IMF 외환위기가 터졌죠.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복합단지는커녕 땅을 팔자는 의견들이 사내(社內)에서도 많이 나왔어요. 당장 현찰이 없었으니까 말이죠. 어려울 때였으니 당연히 그런 판단에 힘이 실렸습니다. 결국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주상복합건물로 용도를 변경해 지금의 타워팰리스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복합단지 건설 계획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회장님이 사장단을 함께 모아 살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시는 거예요. 같은 건물에 살면 자주 빨리 모일 수 있고 회의도 자주 할 수 있으니 그게 다 경쟁력으로 연결되지 않겠느냐는 거였죠. 그러면서 ‘나도 들어갈까?’ 하셨어요.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지 사장들이 ‘아이고~~제발~~ 그것만은 막아달라’고 저를 만날 때마다 통사정(?)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웃음). 지금의 타워팰리스 세 개 동이 들어서기 전에 찍은 항공사진을 갖고 있는데 볼 때마다 아쉬움이 커요. 세계 비즈니스맨들이 몰려드는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정말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이 됐지만 말이죠.”

    종로 하늘에 UFO를 띄우자

    종로 탑클라우드 계획안. [이승한]

    종로 탑클라우드 계획안. [이승한]

    도곡동 프로젝트가 강남의 랜드마크 계획이었다면 강북에는 실제로 구현된 프로젝트가 있다고 한다. 종로타워 건물이다.

    “조계사 건너편 종로1가에 있는 종로타워 건물인데 저희가 ‘탑클라우드’라고 이름 붙인 건물입니다. 가장 꼭대기 층과 바로 아래층이 가운데 뻥 뚫려서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형상이라고 해 ‘탑클라우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총 건물 높이가 133.501m여서 높기도 높지만 모양이 특이해서 지금도 눈에 많이 띄죠. 그 빌딩이 세워지기까지에도 사연이 많았습니다.

    부지를 매입한 뒤 골조 공사에 들어갔는데 땅 주인 한 사람이 이른바 ‘알 박기’를 해서 구입하지 못한 작은 땅이 하나 있었어요. 이것 때문에 뼈대를 세 개만 세운 채 몇 년간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1994년 3월인가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회장님이 ‘공사 중단하고 다 철거하라’ 이러시는 거예요. 난리가 났죠. 돈도 억수로 많이 들어갔는데 말이죠. 회장님 왈 ‘대한민국 건축 문화, 건축 디자인 역사를 새롭게 쓸 랜드마크를 만들어야지 남들하고 똑같은 건물 지을 거면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단 돈을 최대한 아끼는 차원에서 기존 골조를 살리되 눈에 띄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고민하는데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어요. 랜드마크가 되려면 우선은 높아야 하는데 주변 건물들과 같은 용적률을 적용받을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재주를 부려봐야 평범한 형태밖에 안 나오는 거죠.

    설계도와 종로 일대 지도를 며칠 동안 번갈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제게 어느 날 묘안이 스쳤습니다. 건물 가운데를 뻥 뚫으면 같은 용적률을 적용받더라도 높이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바로 회장님께 보고를 드렸죠. ‘처음엔 좀 낯설더라도 잘 지으면 랜드마크가 될 것입니다’ 했더니 ‘한번 해보라’ 하시는 거예요. 기존에 세워놓은 3개 골조는 삼성의 3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서 살리기로 했습니다.

    제일기획을 통해 세 명의 건축가를 소개받았는데 이 중에 도쿄국제포럼 건물을 설계한 뉴욕주립대학 건축학 과장 라파엘 비뇰리라는 사람이 제안한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차례 회의가 이어지고 마침내 공사가 결정됐는데 생각지도 못한 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먼저, 서울시의 반대였습니다. ‘가운데를 뻥 뚫어놓고는 나중에 메우려는 술수’ 아니냐는 거였죠.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서 겨우 설득해 통과됐습니다. 여기에 청와대 경호실, 수도방위사령부가 안보 문제를 들고나왔는데 나중에 안보상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 넘어갔습니다. 이런 과정이 한 1년이 걸렸어요,

    기존 건물 위에 또 다른 건물을 올리는 방식은 한국에서는 처음 시도된 리프트 업 공법이라고 하는 건데 무게 4300t짜리 대형 구조물을 한 시간에 3m씩 하루에 10m씩 해서 꼬박 사흘이 걸렸습니다.

    건물이 완공된 후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회장님이 낸 아이디어였습니다. 위로 붕 떠 있는 건물에 ‘자체 발광하는 식당을 만들면 어떠냐’고 하셨어요. 밤에 빌딩 내 모든 사무실에 불을 꺼버리면 마치 UFO가 떠 있는 모습으로 보일 거라는 거였죠.

    부랴부랴 레안 카르살데라는 세계적인 프랑스 조명 기술자를 섭외해 착수했습니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CNN에서 조명을 설치하는 과정부터 마지막에 불이 켜지는 과정까지 생중계하겠다고 나섰어요.

    하지만 불행히도 IMF 외환위기가 터져서 모든 계획이 취소돼 버렸습니다. 온 국민이 잔뜩 허리띠를 졸라매던 때에 웬 ‘무슨 조명 잔치냐, 삼성만 돈이 남아돌아 사치를 한다’는 비난 여론이 우려된다는 자체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적 건축물이 나오는 과정을 세계에 발신할 좋은 기회였는데 안타까웠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쉬워요.

    탑클라우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독특하다, 정말 차별화됐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새롭고 이색적인 건축물이라고 자부합니다. 이후 다양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나오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요.

    실제로 그 전과 후에 한국 도심 건축물이 어떻게 바뀌어나갔는지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제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실 겁니다. 그전에는 전부 상자처럼 된 빌딩 각이었거든요. 회장님 말씀대로 문화를 바꾼 거죠.”

    실버타운, 장묘 문화까지

    그가 전하는 이건희 회장의 아이디어는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졌다.

    “한번은 장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알아보라 한 적도 있어요. 그때만 해도 다들 매장을 하던 시절인데 화장(火葬)을 원칙으로 해서 납골당 문화를 만들자는 거였죠. 지금이야 일반적이지만 당시 그런 걸 얘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납골당 형태에 대해서도 도서관식으로 해서 고인의 유해와 불경이나 성경책 3권 정도를 꼽아 넣을 수 있는 정도의 넓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어요.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참배와 예배도 할 수 있게 하고 말이죠. 지금 생각해도 기발했던 것이 납골당에 디지털 스크린을 만들어서 USB도 꽂아 플레이를 하면 돌아가신 분이 화면에 나오게 해서 요즘 말하면 메타버스로 쌍방 커뮤니케이션하는 식으로 하면 어떨까 이런 아이디어도 내셨죠.

    덕분에 저희가 전 세계 묘지 탐방을 엄청 다녔습니다. 미국은 수목장(樹木葬)을 많이 하더라고요. 나무 밑에 고인의 유해를 묻는다든지 호수같이 물을 만들어서 나무랑 모신 곳도 있고 말이죠. 지금이야 일반적이지만 그때 우리나라에는 없는 형태였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관심은 실버타운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실버타운에 대해서도 워낙 생각해 놓으신 것이 많았어요. ‘사람들이 노후에는 한적한 산골보다는 도시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게 나을 거다, 자식들도 자주 볼 수 있고, 젊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일반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시설,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될 거다’ 이러셨어요.

    그런 점에서 ‘병원 케어’처럼 하는 시설, 식사만 제공하는 시설, 일반 아파트처럼 스스로 모든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설 등의 형태로 나눠 설계해 보라고 하셨죠. 그거 연구한다고 태스크포스팀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일본 실버타운까지 다 다녔습니다.

    일본의 경우 회장님이 고베에 있는 ‘시아와세노 무라(幸福의 村·행복의 마을)’ 라는 곳을 벤치마킹 해보라고 하셨는데 가족들이 방문했을 때 투숙하면서 지낼 수 있는 시설이 있다고도 하셨어요.

    실버타운에 각계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분들이 들어오면 좋겠다고도 하셨어요. 퇴직한 교수님들이 도서관에 ‘마이 북(my book)’ 같은 코너를 만들어 책을 기증하거나 퇴직한 정원사들이 입주하면 화초를 심을 수 있는 땅을 마련해 원예 기술을 가르치게 한다거나 하는 등 현업에서 했던 전문 분야를 취미 삼아 입주민들에게 가르치면 노후가 얼마나 건강하고 재미있고 행복하겠느냐면서 말이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넣고 수영장도 만들어 일반에 개방해서 지역사회 시민들도 이용하게 하면 좋겠다는 게 회장님 아이디어였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원 영통 노블카운티입니다. 저는 부지 확보할 때 현장에 가본 적이 있지만 완공할 때는 제가 삼성물산으로 옮긴 뒤였어요. 여하튼 이런 모든 회장님의 상상력은 단지 삼성만 생각한 게 아니라 국가 인프라 차원에서 생각한 것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리움미술관도 원래는 미술복합단지 일부

    이승한 회장이 홍라희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리움미술관 건립 설명을 듣는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장하는 건축가는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 테리 파렐 순이다. [이승한]

    이승한 회장이 홍라희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리움미술관 건립 설명을 듣는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장하는 건축가는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 테리 파렐 순이다. [이승한]

    이승한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인프라 구현에서 또 주목할 만한 것이 미술관 건립이었다며 지금의 한남동 리움미술관도 건립 초기부터 관여했다고 한다.

    “회장님께서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문화시설도 따라가 줘야 한다, 시민들이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대표적 문화공간이라고 한다면 미술관 아니겠느냐,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하셨죠. 세계 어디에도 없는 미술관을 만들어보자는 게 기본 미션이었죠.

    원래 검토했던 부지는 지금 안국역 근처에 있는 창경궁 맞은편 운현궁 쪽이었어요.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프랭크 게리 뮤지엄을 지으려고 했는데 땅 주인이 절대 안 팔겠다고 해서 결국 안 됐죠. 그러면서 부지 매입에 한계가 있으니 한남동 근처에 댁까지 포함해서 복합예술타운을 만드는 것을 검토해 보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리움미술관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95년쯤부터였습니다.”

    복합예술타운이라면 어떤 걸까요.

    “세계에 없는 미술관을 지으라고 하시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제가 도시 개발사업도 해보았고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이 궁리 저 궁리하다 생각해 낸 게 세계적 건축가들을 한꺼번에 불러 모아 각자 미술관을 만들게 하면 어떨까 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미술관 일대에 작가들 작업실과 뮤지업 숍 등이 들어서게 해서 예술문화타운을 만들자고 한 거죠.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회장님과 홍라희 관장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추려진 건축가들이 스위스 마리오 보타, 프랑스 장 누벨, 네덜란드 렘 쿨하스, 영국 테리 파렐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한 사람씩 부르기도 어려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은다는 게 가능한 일이냐. 허무맹랑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집요하게 밀어부쳤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현지 설득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건축가들이 살고 있는 집까지 일일이 찾아다녔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리오 보타도 장 누벨도 램 쿨하스도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대놓고 ‘불쾌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미술관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짓는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고 원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저는 ‘미술관 땅이 세로로 죽 길다, 하나의 콘셉트보다는 서너 가지 각기 다른 콘셉트로 각자 개성이 살아 있는 미술관을 한자리에 펼쳐놓으면 정말 멋있을 거다, 세계 최고 건축가들이 이렇게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 선례가 없지 않으냐, 세계적 명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면서 설득했습니다.

    진심과 열정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에까지 찾아가서 여러 번 간곡하게 설득하다 보니 눈빛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이번에만 한번 해볼까’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결국 성공했습니다. 네 명의 세계적 건축가가 서울 한남동에 모여 미술관 설계를 시작했는데 일명 ‘H프로젝트’ 였습니다.

    리움 미술관은 2004년 완공되는데 마리오 보타가 한국의 전통 도자기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고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 장 누벨이 세계 최초로 녹슨 스테인리스와 유리를 이용해 만든 현대미술관, 렘 쿨하스가 설계한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가 세워지죠.

    하지만 아직도 많이 아쉬워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래 마스터플랜은 이태원 입구에서부터 일대를 거대한 예술촌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였거든요. 미술관을 중심으로 주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아트숍, 카페 레스토랑촌을 만들고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예술가들이 활기차게 모여드는 낭만적 공간을 생각했어요.”

    왜 안 됐나요.

    “한창 부지를 마련하는 와중에 ‘이건희 회장이 주변 부동산을 모조리 매입해서 아방궁을 만들려 한다’는 기사가 나온 거예요. 마침 비서실 팀이 용인에서 워크숍을 하던 첫날이었는데 저하고 홍보 쪽 배동만 팀장하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바로 다음 날 기자회견을 했어요.

    ‘한남동 예술촌’ 계획 일부를 공개하면서 문화예술 벨트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논란이 끊이지 않았어요. 결국 사업이 축소돼 버렸습니다. 땅 매입도 쉽지 않았고요. 그 바람에 테리 파렐이 설계한 뮤지엄 숍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이건희 회장이 “세계적 미술관을 지을 수 있다면 내 집을 허물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정말 쉽지 않은 말 아닙니까. 회장님의 미술관 프로젝트에 대한 진한 애정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씀이었죠. 하지만 저는 반대 의견을 드렸습니다. 제가 런던에 근무할 때 기업 오너들이 생가를 그대로 보존해 마치 박물관처럼 일반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더라, 한남동 자택도 내부를 전시관으로 만들어 후대들이 볼 수 있는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유통업에 대한 관심과 매각에 대한 아쉬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규모가 너무 큰 대단위 프로젝트여서 민간 기업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갸우뚱할 때가 많았지만 구체적인 설계안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건희 회장이 구상한 국가 인프라 시설에 대한 관심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전 회장도 “생각한 대로 모두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큰 꿈을 꾸어본 것 자체가 가슴 벅차고 설레는 경험이었다”며 “회장님의 상상력은 단지 기업 잘되는 것에만 있지 않았고, 나라 잘되는 것에 늘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이승한 전 회장은 홈플러스라는 유통 매장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만들어 대표 브랜드로 키운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를 만나 삼성의 굵직굵직한 복합화 프로젝트를 들었던 건 의외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통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어떻게 홈플러스와 인연이 됐나요.

    “삼성이 유통을 한다고 유통사업본부를 발족시킨 것이 1995년이에요. 회장님이 유통 사업에도 워낙 관심이 많아서 태스크포스팀이 미국 유럽을 돌며 현황도 파악하고 했지요.

    회장님은 유통업은 단지 돈벌이 차원이 아니라 삶의 질에 관련되는 산업이며 상품의 마지막 경쟁력은 유통에서 나온다, 앞으로는 유통이 파워를 쥐는 시대가 온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죠. 다들 어떻게 하면 값싼 제품을 빨리 만들까만 고민하던 때, 정말 앞서간 통찰이었죠. 두 번째 강조하신 포인트는 중소기업, 농어민,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직거래를 할 수 있는 그런 업태의 유통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마침 토지주택공사가 갖고 있던 경기도 분당 서현역사 건물이 70~80% 공정으로 올라가고 있던 와중에 유통시설을 넣겠다고 공개입찰을 했어요. 제가 그걸 인수해 해보는 게 어떠냐 해서 그룹 전체적으로 동의가 돼 입찰 금액까지 정해 삼성물산 주도로 백화점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게 분당 서현역사 삼성플라자점이죠.

    처음엔 잘 안됐어요. 이건희 회장께서 남들과 똑같은 백화점 만들지 말고 유망 중소기업 제품이나 스타트업 제품을 많이 입점시키라 하셔서 중소기업관도 넣어보기도 하고 지하는 슈퍼마켓도 시도했는데 사업이 기우뚱거리고 있었죠.

    그러다 제가 파견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현명관 비서실장이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가 있던 시절인데 어느 날 회장님과 하는 점심 자리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습니다. 1996년인가 1997년 여름쯤이었는데 저는 당시 비서실 보좌역 부사장 겸 신경영추진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현 부회장이 유통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이승한 부회장이 적임자라며 저를 지목하시는 거예요. 사전에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는데 말이죠. 잠시 후 회장께서 ‘본인이 적성에 맞고 좋다고 해야지’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건 ‘하라’는 말씀이잖아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회장 말씀이 끝난 뒤 ‘모직, 건설에 있다가 비서실로 올라왔는데 최근에 건설 사업개발 본부장하면서 이제야 일머리를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유통은 지식도 경험도 없지만 그룹에서 필요로 하고 회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하겠습니다’ 했지요. 그래서 느닷없이 삼성물산 유통 대표이사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마 삼성플라자 서현역사가 문을 열고 3, 4개월 뒤였을 겁니다. ‘다 두드려 부수고 새로운 걸 하겠다’고 보고를 드렸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개혁이란 것이 늘 저항이 있잖아요. ‘틀림없이 매출을 올려보겠습니다. 중간에 불평하는 소리들이 나올 텐데 지켜봐 주십시오’ 했더니 회장님이 ‘알겠다’ 하셨어요. 이렇게 밀어주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했죠. 결국 1년 만에 매출을 서너 배까지 올리고 분당 최고 쇼핑 명소로 만들었습니다. 하루 매출 4억 원이던 것이 20억 원까지 찍은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떻게 영국 테스코로 넘어가게 되나요.

    “삼성플라자를 대구·안산·영등포·부산 총 4개점을 목표로 확장하려고 땅을 사는 과정에서 갑자기 IMF가 터졌어요. 확장은 꿈도 못 꾸고 계열사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라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삼성물산은 눈물을 머금고 유통 부분을 팔기로 했습니다. 여기저기 안을 냈는데 다들 장부 가격의 40%밖에 안 쳐주는 거예요. 그야말로 후려쳐서 먹으려는 거였죠. 아무리 어렵다 해도 도매급으로 팔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생각해 낸 게 합작을 유치해 보자는 거였어요. 월마트, 까르푸, 메트로독일 등 전 세계 대형 유통업체 20개사에 제안을 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IMF 외환위기를 맞아 어려워서 합작할 상대를 찾고 있다’고 말이죠.

    월마트에서 먼저 제안이 와서 협상을 시작했는데 자기들이 51% 지분을 가져야 한다, 50대 50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렬됐습니다. 일본 기업에서도 제안이 왔는데 추가 투자 계획이 없었어요. 그러다 영국 테스코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테스코 그룹과 합작계약을 진행했습니다. 저는 삼성 본사, 테스코, 직원들 입장까지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선 직원들 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회사 복도가 온통 담배 연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일류 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는데 합작이 이뤄지면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절망 때문에 다들 어두웠습니다.

    밖으로는 여러 계약 조건을 만들고 맺는 과정을 진두지휘하느라 힘들었고 안으로는 직원들 다독이느라 힘들었어요. 그때 제가 세운 원칙은 어느 쪽에도 거짓된 정보를 주거나 그럴듯한 말로 현혹하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직원들과도 계속 소통했고요. 그 결과 전별금 400%에 전원 고용승계를 관철했습니다.”

    내가 보는 이건희 회장은 사상가

    모든 협상이 마무리된 뒤 인사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의외의 소식이 날아든다.

    “회장님이 현명관 부회장 이름으로 테스코 대표에게 ‘이승한 대표는 삼성에 남아 있어야 된다’는 레터까지 보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저는 삼성 내 다른 계열사로 간다고 생각하고 인사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갑자기 난리가 난 거예요. ‘안 된다’는 거였죠.

    사실 협상 결과는 삼성 측에 유리했습니다. 매출원가, 마진, 인건비, 경비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걸 다 입증하고 향후 사업 계획을 같이 세우면서 장부 가격보다 무려 200억을 더 받았으니까요. 점포 하나씩 열 때마다 로열티도 4억씩 받기로 마무리했어요. 테스코 측은 이런 모든 조건을 기존 CEO가 그대로 와서 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건데 그 CEO가 안 오면 ‘말짱 꽝’이라는 거죠.

    이걸 들으신 회장님이 처음에는 오해하셔서 ‘도대체 어떻게 처신을 했길래 테스코가 저렇게 나오느냐?’ 화를 내셨어요.”

    어떻게 하셨나요.

    “그동안 협상 과정의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보고하면서 제 뜻도 전했습니다. ‘제가 삼성에 남아 기여를 해도 좋습니다만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대한민국 유통산업은 세계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수준보다 15년에서 20년가량 뒤처져 있습니다. 이걸 발전시켜야 되는데, 제가 가서 발전시킨다면 그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는 거였죠.

    잠자코 듣고 계시던 회장님이 ‘유통산업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면 한번 해봐라’ 하시는 거예요. 삼성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라와 산업 전체를 생각하시는 평소 모습 그대로였죠. 그렇게 해서 결국 제가 대표를 맡게 됩니다.”

    테스코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홈플러스’가 출범할 당시인 1999년 5월 한국 할인점 시장은 11개 업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마트를 선두로 롯데마그넷, 킴스클럽, 하나로마트, 엘지마트, 메가마트, 아람마트, 탑 마트 같은 국내 업체는 물론 월마트, 까르푸, 코스트코 등 막강한 자금력을 갖춘 선진 유통 업체들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무한 경쟁을 벌이는 와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요.

    “‘가치(價値)점’을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삶의 질을 올리는 가치요. 홈플러스 이전 한국 할인점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겉만 흉내를 내고 물건을 싸게 파는 창고형 할인점이었습니다. 매장은 온통 무미건조한 진열대뿐이고, 그나마 그 위에는 상자째 포장된 상품들을 빽빽하게 쌓아놓고 있었지요.

    지금처럼 무빙 워크도 없어서 한 층에서 계산을 마쳐야 다른 층으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에는 커다란 변화가 불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가격만 보는 게 아니라 가격 대비, 시간 대비, 사용 대비 가치가 높은 제품을 합리적 가격에 사기를 원했고, 분위기와 서비스는 백화점처럼 고급스럽고 세련된 쪽을 원했죠.

    그래서 우선 시도한 것이 매장 1층에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문화센터, 푸드코트, 약국, 클리닉, 안경점, 세탁소, 은행에서부터 어린이 놀이터, 수유실,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할 수 있는 시청 민원실까지 넣었습니다.

    금싸라기 1층 매장에 돈이 안 되는 편의시설을 넣는다고 반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홈플러스는 3년 만에 연매출 1조 원을 달성해 업계 3위에 올랐고 4년차에는 연매출 2조 원을 달성해 업계 2위로 올라섰습니다. 맨 꼴찌에서 출발해 10년 만에 매출 10조 원대를 달성했습니다. 연평균 매출 성장률이 47%, 이익성장률은 그 4배에 달하는 175%였으니 그야말로 경이적 기록을 낸 거죠.”

    긴 인터뷰가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건희 회장은 어떤 경영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회장님은 늘 ‘위기’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어요, 그다음에 ‘미래’ ‘변화’ ‘기술’ ‘사람’ ‘한 방향’ 이런 단어들이 사장단 회의 때 가장 많이 쓰신 단어인 거 같아요.

    회장님이 사람 평가하는 것 중에 무서운 점도 있는데 인재를 무지하게 아끼시고 키우는 데도 적극적이셨지만 (변화에) 뒷다리 잡는 사람, 부정한 일을 하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은 잡초라고까지 표현하시면서 이런 사람은 조직에서 뽑아내야 한다는 말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보는 관점은 미래학자, 사상가입니다.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실용사상가’ 혹은 ‘실용주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앞에서 인프라 이야기할 때 언급했지만 늘 가치 추구, 인류 사회 공헌, 삶의 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삼성 헌법 만들어서 인간미, 에티켓도 강조하셨잖아요. 그런 점에서 인본주의 사상가이고 뭐든지 일류, 최고, 챔피언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으니 일류주의 사상가라고 할까.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고 했듯이 엄청난 ‘파괴적 혁신자, 디스트럽티브 트랜스포메이션 (Disruptive Transformation)’이라고도 할까요. 그런 키워드들이 회장님 경영 철학을 말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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