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에세이] 그렇게 새벽은 왔다

  • 장보영 작가

    입력2023-02-0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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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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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없어.”

    산고를 치른 후 남편에게 뱉은 첫마디. 출산 후 몇 년이 지나자 저 말이 무색하도록 나는 매일 고민했다. 남편은 한 아이만 기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두 가지 삶을 자꾸 저울질했다.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법도 아니건만, 무슨 고민을 그렇게 오래 했는지.

    둘째를 갖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감사하며 새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둘째가 찾아왔다는 걸 알고서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딸의 수술까지 겹쳐 태아에게 전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태교는 생각도 못하고 검진도 미뤄가며 겨우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둘째에게 좀 미안하긴 하다. 그렇게 달을 채우고 슬슬 출산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어디서 낳을까?”내가 사는 제주도 서귀포시는 분만할 수 있는 산부인과가 하나뿐이다. 병원에서 출산할 수 있었지만 아직 어린 딸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병원에서 진통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다섯 살 딸아이가 소외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누군가 와서 대신 봐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조산원을 생각했다. 제주도에는 무려 40년 경력의 조산사가 계신다. 듣기로는 전국에서 아이를 가장 많이 받은 분이라고 하고, 내가 자주 가는 빵집·분식집·카페 사장님들도 그분이 자신의 아이를 받아주셨다며 내게 용기를 주셨다.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출산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산원에 마음이 기울었다.

    조산원에 가고 싶다는 말에 산부인과 담당의 선생님은 산모나 태아의 상태가 아주 좋다며 흔쾌히 허락하셨다.



    “산모님은 아마 집에서 낳아도 잘하실 거예요. 그건 걱정이 안 돼요. 급하게 가느라 차 안에서 낳지만 마세요.”

    가족이 함께하는 따뜻한 출산의 꿈

    임신 38주에 들어서던 날, 진통이 심상치 않고 곧 아기가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진통이 심해져 잠을 못 이루다 새벽 즈음 5분 간격이 된 걸 체크하고 조산원에 전화했다. 아침부터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부지런히 한라산을 넘었다.

    조산원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나를 척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아직 안 아픈가 보네요?”

    사실 그랬다. 분주하게 아침을 보내다 보니 진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이 된 기분. 이러다 다시 집으로 가게 될까 걱정이 됐다. 결국 진통이 오기까지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몇 바퀴를 돌아도 감감무소식.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여쭤보자.”

    낙심한 우리와는 달리 조산사 선생님은 편안하게 웃으셨다.

    “아기가 준비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러더니 내진을 하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기가 더 내려왔어요! 아침에 본 거랑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됐어요. 오늘 밤에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집에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니!

    그날 저녁, 밖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매우 가는 바늘이 아랫배를 관통하는 것 같은 통증이 찌릿 지나갔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진짜 진통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헐레벌떡 조산원에 돌아오니 또 진통이 사그라졌다. 내 맘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잔뜩 흥분해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다가 결국 버럭 화를 냈다.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동생의 탄생을 앞둔 아이의 불안을 모르지 않지만, 나 역시 동물적으로 민감한 상태였다.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니 우리는 각자 긴장했고 쉽게 날카로워졌다. ‘가족과 함께하는 따뜻한 출산’을 꿈꿨으나 현실은 팽팽한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했다.

    남편과 아이가 모두 곤히 잠들어 혼자 시간을 보내다 진통이 예사롭지 않아 선생님을 찾았다.

    “저요, 아까보다 더 아파졌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으면 아직 먼 거예요. 진짜 아프면 아예 고개를 못 들어요. 좀 더 기다려봅시다.”

    나는 소파에 누웠다. 가만가만 느린 파도처럼 진통이 밀려오고 있었다. 진짜가 왔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렸다.

    진통이 온다

    새벽 2시쯤 되자 숨쉬기가 어려울 만큼 아팠다. 침대에 누웠다. 거센 파도처럼 고통이 밀어닥칠 때마다 남편이 등을 마사지해 주었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줄였지만 어느새 아이도 부스스 일어났다. 그렇게 우리 셋은 운명 공동체가 됐고, 아이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작은 손으로 내 허리를 둥글게 문질러주었다.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에 준하는 고통을 내주어야 한다. 첫 출산 이후 잠시 잊었던 이 명징한 진리를 다시 절실히 깨달았다. 새 생명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할 차례. 이 과정을 치러야 아기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이제는 그야말로 척추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숯덩이가 돼 박살 날 것 같은 느낌. 이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는 줄 알았지만 아직 어린 딸아이를 위해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엄마가 괴로워서 소리 지르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호흡을 하며 가족과 사인을 만들었다.

    진통이 오면 나직이 말했다.

    “온다.”

    그러면 남편과 아이가 내 등을 열심히 문지른다. 가족의 사랑 어린 손길에는 감통 효과가 분명 있었다. 진통이 물러갈 때도 사인을 줬다.

    “갔어.”

    그제야 두 사람은 등을 기대앉아 잠시 쉴 수 있다. 이렇게 “온다, 갔다”를 한 시간쯤 하고 나니 이젠 저절로 “우우우” 하는 신음 소리가 났다. 죽을 만큼 아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이거였구나. 조산사 선생님이 오셨다. 이제 누워서 낳기만 하면 된다.

    온 가족이 참여한 출산의 순간

    앉아 있던 의자에서 출산 자리까지 고작 1m도 안 됐는데 좀처럼 쉽게 일어서지지 않았다. 이건 누가 해줄 수도 없이 혼자 넘어야 할 산이라는 생각에 사무치도록 고독했다. 마지막 힘과 용기를 그러모아 간신히 누웠다. 몸이 비틀릴 만큼 괴로운데 선생님이 내진해 보시더니 느닷없이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펼친 손을 내미셨다. 순간 당황했지만 고독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손을 맞댔다.

    “정말 애쓰셨어요. 잘 참았어요. 이제 다 됐습니다!”

    그렇지만 난 이미 초죽음 상태였다. 이제는 아이가 보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괴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이 차분히 말씀하셨다.

    “소리를 내면 힘이 아래로 모이지 않고 얼굴로 분산돼요. 얼굴에 힘 들어가면 실핏줄이 터질 수 있어요. 호흡에 집중하셔야 해요.”

    그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고통을 어쩌지 못해 몸을 비틀었다.

    “이제는 진통이 오면 짧게 후, 후, 후, 후, 후 끊어서 호흡하세요. 진통이 물러가면 후우- 길게 숨 쉬면 됩니다. 해보세요.”

    죽을힘을 다해 호흡에 집중했다. 첫아이는 힘주기 한 번 만에 낳았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면 회음부가 찢어진다고 했다. 사실 첫아이가 빨리 나오긴 했지만 회음부 절개 방향과 다른 쪽을 와장창 찢는 바람에 한동안 고생했다. 이번에는 자연주의 출산이라 촉진제나 회음부 절개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상을 방지하기 위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호흡하며 아기가 스스로 빠져나오길 기다렸다.

    양수가 먼저 터졌다. 사선을 넘으며 나는 으스러지도록 남편의 손을 움켜쥐었다. 남편에게 이 고통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아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에게 물 좀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가 물컵을 들고 왔다. 아이도 온 힘으로 출산에 참여하고 있었다.

    “목마르면 거의 다 된 거예요.”

    선생님이 격려해 주셨다.

    “얘가 새벽이야?”

    첫 출산은 워낙 급속 분만이어서 잘 몰랐다. 이날은 아기가 스스로 나오길 기다려야 했기에 처음으로 아기가 끼어 있는 느낌을 경험했다. 고통의 최정점. 정말이지 영겁을 지나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호흡을 시작하고 5분 남짓 흘렀다고 한다.) 따뜻한 양수가 주르르 흘러나오더니 아기가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이름처럼 새벽에 우리에게 와준 아기.

    거짓말처럼 산고가 끝났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남편은 곧 울어버릴 얼굴로 마주 보았다. 다 끝났다. 나는 입술만 움직이며 나직이 기도했다.

    조산사 선생님은 출생 시각을 알려주시고 아기를 안아 축복과 환영의 인사를 전해 주셨다. 이 순간 표정이 가장 궁금한 사람, 딸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막 누나가 된 아이가 내뱉은 첫마디.

    “얘가 새벽이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엄마의 불룩한 배를 향해 수도 없이 새벽이의 이름을 불렀던 누나는 이제야 동생을 눈으로 확인했다. 진짜 네 가족이 됐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조산사 선생님이 젖을 물려보라고 하셨다. 갓 태어난 아기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젖을 쭈욱쭈욱 빨다가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자 금세 뱉었다. 그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말했다.

    “맛이 없나 봐.”

    우리는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새벽이가 새벽에 찾아온 지 3년이 됐다. 큰아이는 동생을 무척 귀여워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준다. 물론 둘이 싸울 때도 많고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본심이겠지만, 대체로는 사이가 좋으니 고맙다. 큰아이에게 “엄마는 너를 최고로 사랑해” 속삭이면 아이는 정색한다.

    밖은 어느새 새벽이다

    “그럼 새벽이는 안 사랑한다는 거예요? 얘도 엄마의 아기잖아요.”

    동생이 태어나던 해 마지막 날, 올해 언제가 가장 좋았는지 물었더니 ‘동생 생겼을 때’라고 대답해 준 아이. 다 표현하지 못해도 그동안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하길 선택한 아이가 대견하다.

    한 아이를 키우다 둘째가 태어나면 행복은 두 배가 되지만 부모의 고난은 네 배 이상인 것 같다. 아이의 귀여움에 땅이 솟고 육아의 고단함에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매일 경험하며 새롭게 인생을 배운다. 얼마 전 새벽이는 새벽 3시에 깨어 울부짖으며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남편과 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을 그냥 ‘아침이’로 할 걸 그랬다며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피로한 얼굴로 속절없이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지금 우리는 생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먼 훗날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너는, 한숨짓는 지금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그러니 마음을 겸허히 하고 오늘을 충만하게 살라고. 새 생명을 맞이했던 날처럼 가만히 호흡해 본다. 밖은 어느새 새벽이다.

    장보영
    ●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 2017년 에세이집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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