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민주당은 화천대유와 다를 바 없어
‘국회의원 조국’은 코미디… 오만 형태 비리 잡범일 뿐
국민의힘은 목소리 없는 정당, 한 사람에 다 맡겨
정치 5일 선배 한동훈, 시련 잘 버텨내면 좋겠다
비대위원이 쓴소리 않으면 의무 방기
앞으로도 감시 대상엔 비수 꽂을 것
[영상] 김경율 격정토로<1>
[영상] 김경율 격정토로<2>
나이가 들수록 신념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절대’라는 말로 허용하지 않았던 선(線)을 어느 순간 넘기도 하고, ‘남들 다 하는데’라며 적당히 타협하기도 한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된 줄도 모른 채 고개를 들고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은 세상이다. 타인은커녕 자신과의 타협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귀해졌다. 그렇게 올곧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뾰족하게 존재가 드러난다.
김경율(55) 국민의힘 비대위원 겸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자양분이 된 건 1980년 광주다. 1969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에서 10대를 보내던 중 5·18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겪었다. 그날 이후 그는 신념 하나를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러곤 1988년 연세대 철학과 입학 후 곧장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시위, 수배, 노동운동을 겪고 복학한 그는 1998년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뒤 곧장 참여연대에 합류했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대위원. [지호영 기자]
69년생 광주 출신 김경율
참여연대에서 그는 잘 드는 칼이었다. 2009년 쌍용차 해고 무효 소송, 2015년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공론화, 2019년 조국 전 장관 사모펀드 비리 의혹 제기 등 거대 권력과 싸울 때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다.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에 오를 정도로 지분이 상당하던 그가 2019년 9월 27일,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조국 전 장관 일가의 비리에 핏대를 높였다는 이유로 그 바닥에서 공공의 적이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와서도 그는 홀로 거대 권력과 계속 싸웠다. 2021년 1월 단군 이래 최대 토건 비리라는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조목조목 분석해 공론화한 것도 바로 그였다.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국민의힘행 소식에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그는 2023년 12월 28일 국민의힘 비대위원직을 맡았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총선을 앞두고 그에게 정치 현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정의연·노무현재단 비리 의혹, 이종석 등 야권 인사 비위, 김건희 리스크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관련 인사들을 향해 직언을 날렸다. 그 덕에 정치권에 발을 들인 지 두 달여간 기존 정치인보다 더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정치인이 돼서인지 회계사일 때보다 인터뷰 섭외가 어려웠다. 1월 말부터 인터뷰를 여러 차례 요청했는데 전화와 문자에 시종일관 묵묵부답이던 그가 3월 중순에야 답을 했다. 당 차원의 인터뷰 자제령이 풀린 것인지 묻자 “그런 게 전혀 아니다. 그동안 내가 기자 분들을 일부러 피했다. 말만 했다 하면 여러 사람 힘들어지니 자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가 잘 안 맞는 모양이다.
“여의도 정치 영역은 전혀 안 맞다. 예전에 친한 정치평론가들이 ‘너는 정치하면 안 될 것 같다’고 하기에 속으로 ‘뭐 그게 어렵다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 말이 떠오르더라(웃음). 정치와 시민사회 일은 결이 완전히 다르다. 시민사회에서도 여의도 정치인처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해오던 시민운동 방식과는 180도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선대위 부위원장직도 맡았다.
“어쨌든 여의도 정치에 발을 디뎠고, 단기 목표는 총선 승리니까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다. 선대위 부위원장 제안받았을 때 고민하지 않고 맡았다.”
비대위원 수락 당시의 목표는 무엇이었고 어느 정도 달성했나.
“목표는 시민사회에 있을 때랑 같다. 공공선을 이루는 것이다. 다만, 여의도 문법대로 하는 거다. 정확히 비대위원을 시작한 지 75일(3월 14일 기준)이 지났는데 도달할 수 있었던 게이지가 100%라면, 지금 한 20% 정도 온 것 같다. 꽤나 스스로에게 실망스럽고, 제가 짐작했던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몰랐다.”
김경율 위원은 1월 초부터 한 달간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제일 뜨거운 사람이었다. 1월 8일 국민의힘 지도부 가운데 처음으로 ‘김건희 리스크’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갈등으로까지 비화했다가 윤 대통령이 2월 7일 KBS와 인터뷰하면서 견해를 밝히고 마무리됐다. 그사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 지역구인 마포을에 출마하기로 했던 김 위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며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으나 김 위원은 “1교시 시험은 끝났다”며 더 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내·외 현안에 대해 발언할 때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하는지 궁금하다.
“국민의힘 비대위원으로서 언론이 묻는 것에 진실되게 답할 의무가 있다. 정치 혹은 언론의 목적과 기능이라는 것이 국민과 정치인 간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몸으로 비유하자면 혈관처럼 이어지게끔 말이다. 많은 소용돌이와 풍파를 지났지만 언제고 다시 물어본다면 똑같이 대답할 거다. 기자 분들 전화 받기 전에 ‘진실과 맞닥뜨릴 용기가 있는가’ 스스로 묻는다. 그게 정치와 언론의 역할이라고 본다.”
대통령을 상대할 때도 거침없었다.
“내가 만약 여의도 정치에 발을 안 디뎠다면 김건희 리스크에 대해 말을 안 했을 것이다. 입당하기 훨씬 전에 윤 대통령, 김건희 여사와 같이 밥도 먹었는데 내 성격상 그런 사적 인연 때문에 발언을 안 했을 것 같다. 그러나 비대위원이라는 공적 지위에 있고, 공공선을 실현해야 하는 한, 말을 하지 않는 건 ‘의무의 방기’라고 생각한다. 말 안 할 거면 자리를 내려놔야지.”
“70년대생 색채 가진 최초 정치인”
2월 초 정대협, 노무현재단 비리 의혹을 제기했을 때 한동훈 위원장이 “저런 일 하시라고 모신 분”이라고 말했다. 동의하는가.“한 위원장의 그 발언은 같은 풍파를 지난 처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것 같다. 과거부터 여러 차례 정치권에서 ‘정당에 가입해 달라’ ‘의원 자리 줄 테니 들어와라’ 했을 때 모두 거절했다. 문재인 정부와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어느 시점부터 한 위원장과 사적 연락도 했다. 한 위원장이 저보다 정치 5일 선배인데(웃음), 무너진 가치를 복원해 내는 데 저런 분과 함께라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영입 전화 받았을 때 같이 하자고 하는 것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숱한 제안을 거절하고 한 위원장을 선택한 거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한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 시절 네 번 좌천당할 때 나도 ‘반(反) 조국, 반(反) 민주당’을 외쳐 비슷한 처지였다. 그 이후 법무부 장관으로서 하는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할 만하다’는 생각이 있던 차에 연락이 와 기꺼이 수락했다. 또 정치가 시민단체 활동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일에 정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의힘 공천이 속도감 있게 이뤄졌다. 이른바 국민의힘 ‘시스템 공천’을 어떻게 평가하나.
“민주당도 시스템 공천을 했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로직을 내장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김영주 의원이 특정 영역에서 0점, 박용진 의원이 어떤 기준에 따라 하위 10%로 나올 수 있다. 시스템에 어떤 논리를 내장하느냐가 중요하지 시스템대로 공천했다고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의힘 시스템 공천에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차가 잘 굴러갔냐’를 따지면 잘 굴러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결국 공천이란 인재를 잘 뽑아내는 시스템인데 인재풀 자체가 너무 좁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메이저리그와 KBO리그는 인재풀 자체가 다르지 않나. 국민의힘 22대 공천 인재풀을 보자면 많이 아쉽다.”
국민의힘에서 인재 영입에 꽤 공을 들이지 않았나.
“인원수는 많았지만 (질적 측면에서) 아쉬웠다. 과거에 어떤 인사와 21대 국회 이야기를 하다가 ‘국회를 바꾸려면 딱 10명만 있으면 된다’고 하더라. 상당히 공감했다. 10명만, 혹은 5명만이라도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분이 있다면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우리 국민의힘 공천이 국민 눈높이에서 그런 10명의 후보, 최소 5명의 후보를 공천했냐 하면 조금은 회의적이다.”
영입 인재 가운데 “한동훈 위원장의 말에 마음이 움직여 입당했다”는 사람이 많던데.
“한 위원장은 소중한 자원이다. 결국은 정치인도 국민과 당이 키운다고 생각한다. 이분을 우리 국민의힘, 내지는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발전시켜 내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정치의 미래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X세대 정치인’이자 70년대생의 색채를 가진 최초의 정치인이다. 기존의 70년대생 정치인은 5060년대생 정치인을 따라가는 형태였다면 이분은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면모를 갖춘 정치인이다. 한 위원장의 정치 경력이 80일 정도인데, 그간 저로 인해 순탄치 않아서 다른 사람의 800일 혹은 8년과 같은 시간을 보냈을 거다. 지금 이 시점이 첫 시련이지 않을까 싶은데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
왜 지금이 첫 시련인가.
“최근 한 위원장 체제 이후 여론조사에서 나온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 기류가 꺾였다. (3월 8일 기준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도는 37%로 지난주보다 3%포인트 낮아졌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주(駐)호주대사 취임 등 여러 악재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그에겐 지금이 하나의 시험대다.”
개인이 홀로 악재를 돌파할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쓴소리일 수 있는데, 어느 정치평론가에게 ‘국민의힘은 다른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했더니 ‘국민의힘은 다른 목소리가 아니라, 한동훈 이외에 목소리가 자체가 안 나온다’라고 하더라. 그게 현실이다. 목소리 없는 것이 국민의힘의 컬러일 수도 있지만, 한 위원장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저도 그간 민주당, 정의당과 소통했지만 이곳은 참 묘하다. 목소리가 없는 정당 같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지금은 한동훈 위원장이 해줄 거야’ 이런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내 業은 문제 제기
김경율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20대부터 50대가 된 지금까지, 찢기고 밟힐 줄 알면서도 ‘아닌 건 아니다’라는 생각 하나로 불구덩이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왔다. 재벌 회장부터 대통령까지, 상대가 누구든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물으면 답은 하나다.광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김경율은 없었을 것 같다.
“극적인 의미로 5·18 마지막 날의 충격이 컸다. 도청에서 가까운 달동네에 살았는데 총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날 이후 광주 사람들 인생의 방향은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누군가 마지막 날에 ‘너 지금 도청에 들어갈래? 안 들어갈래?’ 물으면 어떻게 답할지 가끔 생각해 본다. 들어간다는 건 죽는다는 뜻이다. 20대, 30대 때는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40대 때는 안 들어갈 것 같다. 50대 때는? 어휴, 총도 들지 않았을 거다. 이런 말을 왜 하냐면, ‘광주에서 희생당한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이야기해야 할 순간과 행동해야 할 순간에 부끄럽지 않게 살자’는 생각이 늘 있기 때문이다.”
20대 때 총학, 수배, 노동운동을 거친 7년의 시간은 무엇을 남겼나.
“88학년도에 입학해서 그런 일을 겪었다. 음…. (고심하다가) 그때는 주어진 과제만 생각하고 달렸다. 30대에 뒤늦게 회계사 합격하고 나서도 어떻게 하면 계속 운동을 해볼까 생각했으니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의사라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있는데 회계사는 그런 게 없어서 참여연대에 발을 디뎠다. 지금의 나는 서른 살에 참여연대에 발을 디딘 그때 그 문제의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참여연대는 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까지 국가권력과 재벌을 감시하는 역할에 충실해 왔다. 적어도 2019년 전까지는 그랬다. 분식회계를 일삼던 대기업과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활개 치던 정관계 인사들이 시민사회와 국민 눈치를 보기 시작한 데는 참여연대의 공이 크다. 권력을 상대할 때 김경율 비대위원은 어떤 마음으로 달려들었을까. 그는 “문제 제기할 때는 그렇게 비장하지 않았다”며 다만, 참여연대 안에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가 적어 힘들었음을 고백했다.
“누구든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회피하지 않고 부딪쳤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의문이 들 뿐이었다. 초창기에 현대건설 건을 하는데, 참여연대에 회계사가 4~5명 정도로 많았다. 너무나 뚜렷하게 잘못된 사안인데 다른 모두가 아니라고 하더라. 아직도 기억 날 정도로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이 반복됐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다스 등을 다룰 때도 집단지성을 떠나 적어도 같은 직업군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힘이 빠지더라. 이 일을 하면서 ‘왜 문제 제기를 안 할까. 왜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조국에 대한 문제 제기도 비슷하다. 당연히 던져야 하는 질문인데 회피하니까 회의가 들었다.”
2월 5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의 1심 판결에서 이재용 회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판결 나왔을 때 충격이 컸을 듯하다.
“우스개로 ‘지금 무죄판결이 나와서 가장 당황하는 쪽은 삼성’이라고 하더라. 충분히 그럴 거라고 본다. 재판 판결문을 읽었다. 재판부가 ‘40점 과락만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낸 그런 낙서장 같은 답안지에 100점을 준 거다. 우리는 재벌 재판에 항상 목표를 집행유예로 잡는데, 이번에 만약 집행유예가 나왔어도 나는 비판했을 거다. 그 정도로 혐의가 분명한데 무죄라고 해버리니까 힘이 빠진다.”
혐의가 분명하다고 보는 이유는.
“삼성바이로직스 사건의 핵심 중 하나는 회계변경이다. 회계변경이라는 수법만으로 수조 원의 이익이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 그 근거를 공시해야 하는데 안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을 맨 처음 보고 자신했던 단초 중 하나가 바로 ‘공시 누락’이었다. 그 같은 지배구조 변경을 야기하는 공시를 누락한 것 때문에 자신 있게 금융감독원에 문제 제기를 했다. ‘삼성이 A에서 B로 회계변경을 하면서 수조 원의 이익을 만들어냈는데 주석 공시를 해야 하는데 안 했습니다’라고 했더니 금감원도 ‘진짜네?’ 했다. 금감원, 금융위원회, 검찰도 이 사실은 인정했다. 그런데 이것마저 무죄가 났다. 지금은 바빠서 내가 못 건드리지만 총선 끝나면 기대해도 좋다. 이번 건은 판사가 너무 하셨다.”
조국은 도를 벗어났다
김 위원은 이른바 조국 사태로 참여연대와 결별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욕은 그가 다 먹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그는 “일말에 아쉬움도 없다. 인간관계가 아쉬우면 독서 토론회나 산악회에 가면 된다”고 말했다. 국가권력 비리와 드러난 범죄를 묻어버리자고 하는 사람들과는 한배를 타기 어렵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지금 그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린 여러 사람이 국회 입성을 앞두고 있다. 조국 전 장관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혐의로 기소된 그는 2월 8일 2심에서도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3월 3일 조국혁신당을 창당하고 대표직을 맡고 있다.조국 대표의 국회 입성이 코앞이다.
“이것은 희화화(코미디)다. 도를 벗어났다. 우리나라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마치 본인이 양심수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그는 ‘오만 형태의 비리 잡범’일 뿐이다. 비리 잡범이 ‘검찰 독재, 반윤석열’을 외치면 면죄부가 되나. 최근 나타나는 지지율 약진도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것 아닌가 싶다. 많은 분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뭐라고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2019년 조국 사태가 시작됐고, 5년 뒤인 2024년에조차 우리가 조국의 강을 못 건너고 있다면, 30년 뒤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정말 있을 수 없는 정치적 퇴화라고 생각한다. 회귀, 반동이라고 봐야지.”
조국 대표는 불법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조국 씨(그는 직함을 붙이지 않고 ‘씨’라고 호칭했다)는 제 이름을 거론하면서 사모펀드 운용에 무슨 죄가 있냐고 한다. 아니, 정경심 여사 판결문에 이미 사모펀드 관련 유죄 혐의가 인정됐다. 기소조차 안 된 내용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조국 씨가 민정수석이었을 때 5촌 조카가 50억 원 상당 주식을 받았다. 데칼코마니 사례가 있다. 곽상도 의원은 자기 아들이 50억 원을 받아서 지금 어떤 위치에 처해 있나. 마찬가지로 조국 씨가 민정수석일 때 조범동이 50억 원 상당의 주식을 받은 일이 공소장에 없다는 이유로 전혀 불법이 아닌 게 되나. 도덕적으로 최고 공직자로서 합리화할 수 있는 사안인지 묻고 싶다. 지금 생각났는데, 조국 씨가 한 웅동학원 사회 환원 약속은 어떻게 됐나? 이분은 공적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김 위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은 조국 이외 한 명 더 있다. 그는 2021년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공론화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당시 대장동 일당 7명이 총 3억5000만 원을 투자해 배당금 4040억 원을 가져간 사실이 드러났을 때 많은 국민이 분개했다. 대장동 일당과 이재명 대표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지만, 민주당은 대장동 사건 관련해 이 대표 및 그 일당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5명을 공천했다.
민주당 공천에 대해, 지금의 민주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이재명에 의해 공천 학살이 이뤄진 현재의 민주당을 한국 정당사에 어떤 식으로 위치 매김할 수 있을까. 한민당으로부터 내려오는 민주당 계통 속에 넣을 수나 있을까. 말 그대로 이재명 사당화, 이재명 지킴이, 사조직이 된 것 아닌가 싶다. 대장동에 투자한 천화동인, 화천대유 이분들이 10만% 이익이라는 돈을 챙겼다면, 공천받은 대장동 변호사들은 10만%의 권력을 챙겼다. 지금의 민주당은 화천대유와 다를 바 없다. 일례로 언론인 출신 양문석은 막말만 일삼다가 징계까지 받았는데 전해철 의원을 밀어내고 안산갑 후보가 됐다. 이게 무슨 공적 정당인가. 사채업자 창구가 돼버린 것 같다. 과거 민주당에서 재벌 이슈, 회계 이슈로 찾아오면 흔쾌히 도와드렸는데 참 안타깝다.”
모든 수식은 虛名일 뿐
인터뷰 날짜 기준 정치인 경력 75일. 김 위원은 아직 시민사회 활동가와 정치인,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했다. 기성 정치인이라면 으레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지 않은 채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솟구쳤다. 조금은 특이한 정치인으로, 보수 진영에 없던 정치인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계속 입바른 소리를 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일까.국민의힘 비대위원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는데, 총선 이후 행보가 궁금하다.
“깊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과거에 시민운동하다가 정치한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분들의 모습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싶더라. 솔직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웃음). 어떤 식으로든 이제는 여의도 문법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치 않나 싶다. 공공선 추구, 재벌·정치권력·경제권력 감시를 어떤 방법으로 해나갈지 깊이 고민하고 있다.”
의원에 대한 꿈은 아예 접었나.
“국회의원 되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있었다. 시민사회에 있으면 자료 하나를 받으려고 해도 국회의원 통해서 받아야 한다. 그 국회의원이 내 문제의식과 맞닿아야 한다. 더군다나 재벌에 대한 거라면 국회의원 한 명 뚫기도 어렵다. 그런데 조국 사태를 계기로 정의당, 민주당 창구가 아예 없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갖기도 했다. 국회의원 꿈을 접은 이상 앞으로 누구를 통해 자료를 얻어야 할까 걱정은 된다.”
23대 총선은?
“그때가 되면 내가 60대다. 그때까지 지적 활동, 감시 활동은 계속하겠지만 한편으로 그 나이에 국회의원 활동해서 뭐 하나 싶다. 한번 포기한 이상 국회의원 꿈은 접는 게 낫지 않은가.”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김 위원 같은 사람이 내 편이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편 하자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김 위원은 누구의 편이 되고 싶은가.
“한 달 전, 힘들었을 때 친한 후배가 밥 먹자고 하더라. ‘힘들다. 그런 말 하지마’ 했더니 우스개로 ‘형 때문에 힘들어했을 사람들을 생각해 봐. 형이 힘든 것보다 열 배는 힘들었을걸’ 하더라. 근데, 난 누구의 편도 되고 싶지 않다. 지금 이순간의 답변은 ‘약한 자의 편에 서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하지 말자’다. 누구의 편도 아닌, 감시의 대상인 사람에게는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그런 역할만 계속할 거다.”
앞으로도 삼성, 대장동 같은 큰 건을 기대해도 좋을까.
호기롭게 답할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항상 어떤 사안을 접할 때 조심스럽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때만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삼성, 다스 등등 항상 맨몸으로 부딪쳤다. 그때마다 ‘저쪽은 나를 죽일 수 있는 상대’라는 그런 무서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대했다. 저한테 붙여진 모든 수식은 허명(虛名)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조심스럽게 살려고 한다.”
신동아 4월호 표지.
정혜연 차장
grape06@donga.com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폭풍군단’ 노림수는 다탄두 ICBM 텔레메트리 기술”
제8회 ‘K사회적가치·ESG, 경제를 살리다’ 포럼 성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