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왕리쥔의 美 망명 시도, 그리고 中 ‘엘리트 연합’과 ‘포퓰리스트 연합’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2-02-21 09: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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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리쥔의 美 망명 시도, 그리고 中 ‘엘리트 연합’과 ‘포퓰리스트 연합’

    지난해 10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제2회 국제법의학회 행사에서 연설하는 왕리쥔.

    1년간 치밀한 준비 끝에 2만3000여 건의 범죄를 척결하고, 375개 조폭 집단을 소탕한 충칭(重慶) 시의 ‘범죄와의 전쟁’(打黑除惡·조직폭력배를 소탕하고 악행을 근절한다). 충칭 시 검찰총장인 원창(文强) 사법국장과 경찰 2인자 펑창젠(彭長健) 공안국 부국장 등 조직폭력배 비호 공무원을 전원 구속하고, 원창을 사형시킨 인물. 그는 ‘치안 영웅’이 됐고, 2011년 1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5월 충칭 시 부시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왕리쥔(王入軍·53) 전 충칭시 치안국장 얘기다.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중국 인민들은 그의 성역 없는 수사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던 그가 돌연 2월 2일 공안국장 자리를 내놓고, 6일 할머니로 변장해 300㎞ 떨어진 청두(成都)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중국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왕 전 국장은 보시라이(薄熙來) 충칭 시 당서기가 공안국장에서 자신을 해임하자, 자신의 비리 혐의에 대한 조사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고 미국 영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왕 전 국장은 “보 서기의 비위 혐의에 대해 공정하게 조사하겠다”는 국가안전부의 약속을 받고 7일 영사관을 나와 베이징(北京)으로 향했다. 그가 제보한 비위 혐의는 보 서기의 뇌물수수와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해외 재산도피 혐의 등이다. 왕리쥔 역시 자신이 비호하는 조폭을 동원해 다른 조폭을 쳤다는 혐의 등으로 1년 전부터 중앙기율검사위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었다. 보 서기는 이러한 사실을 알았지만 그를 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사론과 양모론

    이 사건으로 오는 10월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9명의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을 노리던 보 서기는 정치적 시련기를 맞았다. 6년 전에 비리혐의로 구속돼 18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당서기처럼 형사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상무위원 진입은 물 건너갔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정치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영사(影射)론과 양모(陽謀)론이 다시 불거졌다.

    ‘영사’는 속임수로 남의 눈을 현혹한다는 뜻으로, 우두머리를 치려면 그의 2인자를 공격해 우두머리를 간접 겨냥한다는 게 영사론의 핵심이다. 상무위원 자리를 놓고 왕리쥔을 건드려 보 서기를 겨냥했다는 추론이다. 집단지도체제의 중국에서 상대 우두머리를 직접 공격했을 경우, 자칫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부담감 때문에 ‘영사책(策)’을 썼다는 데 여러 중국 전문가가 동의하고 있다. 상무위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공청단(共靑團·공산주의청년당)과 태자당(太子黨), 상하이방(上海幇)이 ‘왕리쥔 사건’을 통해 보 서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양모론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드러내놓고 책략을 펼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음모(陰謀)의 반대말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이 문화대혁명 초기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허용해 지도부를 비판하도록 해놓은 다음, 반대파를 찾아내 대거 숙청한 것이 대표적인 양모론이다. 차기 주석 자리에 오를 시진핑(習近平) 부주석 등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이 사건을 활용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중국의 중요한 정책 결정은 공산당 최고 권력 기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 주요 안건은 1인 1표를 행사하는 집단지도 체제다. 여기서 1표는 중국 정책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만큼 상무위원을 향한 권력투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당 대표대회를 불과 8개월 앞둔 미묘한 시점에 터진 ‘왕리쥔 사건’은 결국 최고지도부 선출을 앞두고 권력 핵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놓고 벌어진 파워게임으로 규정되고 있다. 일당 독재의 중국에서 “웬 파벌이냐”며 되물을 수도 있겠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이지만 그 속에는 크게 2개의 파벌 연합이 존재한다. 태자당·상하이방의 느슨한 연합체인 ‘엘리트 연합(elitist coalition)’과 공청단의 ‘포퓰리스트 연합(populist coalition)’이라는 두 거대 파벌이다.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도 공산당 내부 파벌과 깊숙이 연관돼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파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대표로 하는 상하이방,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의 태자당이 분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 파벌은 사회·경제적 성장 배경과 정치 기반인 지리적 배경도 다르다. 하지만 공산당 내 주요 자리를 비슷하게 차지해 세력균형을 이루고, 날선 각을 세우면서도 상호 협력한다.

    왕리쥔의 美 망명 시도, 그리고 中 ‘엘리트 연합’과 ‘포퓰리스트 연합’
    앞서 소개한 천량위 전 상하이 서기는 한때 상하이방의 황태자였지만 후진타오 지도부의 경제정책 등에 반기를 들다가 2006년 제거됐다. 당시 상하이방은 천량위의 부패 혐의가 명백해 손을 쓸 수 없었다.

    반면 색깔은 다르다. ‘포퓰리스트 연합’이 주로 농민·이주노동자·도시빈민 등 사회 취약 계층에 관심을 가진다면, ‘엘리트 연합’은 기업과 신흥 중산층을 대변한다. 지리적으로 ‘포퓰리스트 연합’은 중국 내륙지방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집중한다면, ‘엘리트 연합’은 주로 경제가 발전한 동부 해안지역을 적극 대변한다. 엘리트 연합의 고위 지도자들은 대부분 혁명원로 및 고위 공직자의 자녀이다. 태자당의 ‘대부’ 장쩌민은 1939년 항일전쟁 당시 사망한 공산혁명 지도자 장상칭(江上靑)의 아들이다. 엘리트 연합은 주로 상하이 등 경제가 발전한 해안 지역에서 정치 경력을 쌓는다.

    잘사는 동부 해안 ‘엘리트 연합’ vs 낙후된 내륙 ‘포퓰리스트 연합’

    반면, 포퓰리스트 연합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각각 차(茶)를 파는 가게의 아들, 중학교 지리 교사 아들로서 평범한 가정 출신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내륙에서 실질적인 리더십을 쌓는다. 후진타오는 간쑤(甘肅) 성에서 14년, 구이저우(貴州) 성에서 3년을 보냈다. 원자바오는 대학 졸업 후 15년 동안 간쑤 성 지질국 기술원으로 근무했다.

    두 파벌은 공산당 내 최고 조직의 자리를 거의 동일하게 점하고 있다. 현재 정치국 위원 25명 중 엘리트 연합은 7명(28%), 포퓰리스트 연합은 8명(32%). 또 차세대(5세대)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이런 균형추는 유지된다. 태자당의 시진핑은 오는 10월 주석직에 오르고, 공청단의 리커창(李克强)은 총리직에 오르게 돼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왕리쥔의 美 망명 시도, 그리고 中 ‘엘리트 연합’과 ‘포퓰리스트 연합’
    중요한 것은 이 두 파벌이 중국 사회·경제적 안정성과 국내 중국공산당 규율을 공고하게 만들고 국제무대에서의 역할을 강화시키겠다는 근본적인 목적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치세력은 과거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처럼 절대자가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도 아니다. 더욱이 이들을 지지하는 다양한 계파와 정치 세력들이 권력의 파이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협력과 견제의 상호작용을 부단히 한다는 점이다. 보 서기의 조사 결과를 놓고 ‘영사론’일지‘양모론’일지 예단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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