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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⑮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선수 연애 상담까지 도맡는 ‘어머니형 리더십’의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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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목 부상으로 실업팀 입단 1년 만에 농구를 접은 선수가 있었다. 이후 지도자가 아닌 구단 주무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 관리, 숙소 및 식당 예약, 감독과 코치 수발, 홍보까지 안 해본 업무가 없을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10년 프런트 생활 끝에 지도자로 변신했지만 주위의 평가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는 정규시즌 1위 네 차례, 챔프전 우승 세 차례 등의 성과를 거두며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화려한 농구 인생을 살고 있다. 부산 KT 전창진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전창진(49) 부산 KT 소닉붐 감독은 프로농구계의 대표적인 명장(名將)이다. 정규시즌 1위 네 차례, 챔프전 우승 세 차례(통합우승 2회)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고, 플레이오프 최다승인 38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2009년 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부산 KT 소닉붐 사령탑으로 옮긴 후 세 시즌 동안 112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전 감독은 올해 초 KT와 3년 재계약을 했고, 프로농구 감독 중 최고 몸값인 4억50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전창진 감독의 성공 시대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상 때문에 그가 불과 1년여의 짧은 선수 생활을 한 데다 그 기간의 성적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선수 생활을 접은 후에도 엘리트 선수들이 코치로 직행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프런트 말단 직원, 즉 주무 출신으로 지도자 인생의 첫발을 디뎠다. 당연히 그가 처음 감독이 됐을 때 “주무 출신이 무슨 감독을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적지 않았다.

전 감독이 처음 감독 지휘봉을 잡은 2002~03년 시즌에 보란 듯 우승컵을 거머쥐었을 때도 “김주성 같은 S급 선수를 데리고 있으면 누가 감독이 되건 우승을 못하겠느냐”는 식의 폄훼가 이어졌다. 당시 정규 리그 3위 팀이 시즌 챔피언에 등극한 유일무이한 사례였지만, 세간의 평가는 인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전 감독은 이후 꾸준히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실력을 입증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선수 덕분에 잘나가는 감독’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한 감독이 단일 농구팀과 6년 계약을 맺은 건 프로농구 역사상 그가 최초다.

전 감독은 오랜 프런트 생활을 통해 선수단은 물론 언론, 트레이너, 구단 직원, 찬모나 운전기사에 이르기까지 농구단 안팎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선수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식사와 술 외에도 연애 상담, 전화, 문자, 채팅, 목욕탕 대화 등 갖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수단의 밥을 해주는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화장품 세트를 선물하고, 구단 운전기사를 깎듯이 ‘형님’으로 모시며, 한 줄짜리 기사를 위해 밤늦게 언론사에 간식거리를 사 들고 찾아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행동 자체가 한 권의 인맥 관리 교본이다. ‘좋은 지도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라는 그의 지도자론 또한 여기에서 탄생했다.



전창진은 누구인가

전 감독은 서울 상명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3년 처음 농구공을 만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또래보다 덩치가 컸던 그를 눈여겨본 상명초등학교 농구팀 감독이 조회 시간에 그를 찾아와 대뜸 “농구 한번 해보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평소 농구부 유니폼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소년 전창진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전 감독은 몰랐지만 그의 아버지는 중앙대 재학 때까지 농구선수 생활을 한 경력이 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농구 유전자가 내재돼 있었던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농구 명문인 용산중에 스카우트됐다.

중3 때 그의 농구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전 감독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춘계연맹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했다.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 깁스만 6개월을 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의 재활 치료에 관한 개념이 전무했던 터라 그는 변변한 재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결국 이때 입은 발목 부상은 두고두고 농구선수 전창진의 인생을 가로막는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있었고, 차비를 아끼려고 먼 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다. 당연히 운동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당시 그는 부모에게 “농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하지만 전직 농구선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제껏 힘들게 운동을 했는데 지금 그만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최소한 대학교 졸업은 해라. 그때도 결심이 달라지지 않으면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2학년 때 주전이 됐고 한일 대학대회 등에 국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이번에는 왼쪽 발목까지 다치고 만 것. 졸업 후 운 좋게 삼성전자 실업 농구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발목 부상이 다시 문제가 됐다. 두 시즌 동안 사실상 벤치만 지키던 그는 견디지 못하고 1988년 은퇴를 선언했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은 전 감독의 앞길은 그야말로 막막했다. 방황하던 그에게 이인표 당시 삼성전자 단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단장은 그에게 다짜고짜 선수단 매니저 역할을 맡겼다. 주 업무는 선수 스카우트였다.

“농구를 몇 년이나 했는데 스카우트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는 그의 생각과 달리 프런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프런트 인력의 전문화, 분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터라 그는 선수 스카우트는 기본이고 구단 홍보, 물품 관리, 선수단 관리 및 뒷바라지까지 도맡아야 했다.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제대로 자는지 밤마다 방을 돌며 이불을 덮어주고 문단속을 해야 했다. 고참 선수들에게는 밖에 나가 술 먹고 사고 치지 말라고 일부러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숙소에 넣어주고 문을 닫았다. 심지어 선수들의 빨래거리를 챙겨야 할 때도 있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있듯 위계질서와 위기관리를 중시하는 대기업의 조직문화 또한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1분 1초 쉴 틈도 없었고 퇴근은 꿈도 못 꿨다. 하지만 이때의 생활은 전창진 감독의 리더십을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선수단을 속속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엘리트 선수들은 지도자가 된 후 구단 및 언론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쉽게 말해 ‘갑(甲)’이 아니라 ‘을(乙)’의 처지가 되어 본 적이 별로 없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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